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20화 (32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20화

각자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또다시 운명이 교차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헤어질 때 그런 말을 했었지.

그때의 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국 또 만났네.”

그렇게 말하며 ‘강예나’는 검을 한 번 휘둘러 검집에 집어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내 주위에 서 있던 친구들을 하나하나 훑다가, 이우연에게는 좀 더 오래 머물렀으며, 그리고 마침내 검은 신관복을 입은 아리아드네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리아드네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의 출현에 놀랐는지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역력했다. 입술이 떨렸다.

“레나가 여기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운영자인 제가 부르지 않는 이상…….”

“뭐, 처음 저 애를 부른 건 저니까요.”

나는 뜻밖의 말에 놀라 일리아스를 돌아보았다.

일리아스가 묘지기 녀석을 불렀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아리아드네님과 싸우려면 히든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말하며 일리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리시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레나에게 다른 세계의 자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었으니까 말이야. 네 세계의 운영자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아서 저쪽의 레나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어. 사실 황제와 전쟁할 때부터 보냈는데…… 문제는 메시지를 받았는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다는 거였지.”

전혀 예상도 못 한 이야기에 나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고 보니 일리아스가 홀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던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 그럼 나도 믿어 볼까. 비록 지난번에는 시간에 맞추지 못했지만.

- 어떻게 생각하면 이번이야말로 적절한 때인 걸지도 모르고.

그게 다른 루트의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메시지는 확실히 받았어.”

묘지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리아스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는 했는데, 여기로 오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지.”

“오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니…….”

“차원의 틈새라는 거, 정말 망망대해 같더라고. 여기로 오기 전에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

설마…… 그냥 대책 없이 차원의 틈새에 빠진 채로 이 세계로 오는 길을 찾으려고 했던 건가?

“뭐 그렇게 무모한 짓을…….”

나도 그 차원의 틈새에 떨어져 본 만큼, 이게 저렇게 가볍게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아조차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허무의 공간.

만일 기적처럼 정소현이나 이우연과의 인연이 강하게 나를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영원히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강예나의 경우, 일리아스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방향조차 잡지 않은 채 그 망망대해 속에 몸을 던졌다는 건가.

어쩌면 그대로 그 우주 속에서 홀로 미아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결국 네 영혼이 나를 부른 덕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어. 고맙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묘지기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보다가 일리아스의 어깨를 한 대 쳤다.

퍽!

“윽!”

“부르는 너도 너고, 오란다고 오는 저 녀석도 저 녀석이다. 그런 일을 벌였으면 한 마디 정도는 해.”

“……나는 일단 답장부터 할 줄 알았지. 그 후에 던전을 열어서 오게 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저렇게 차원의 틈새로 곧장 들어갈 줄은 몰랐지…….”

일리아스로서는 드물게도 변명을 하는 걸 보니 저 말 자체는 진심이겠지만…….

루카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저 성질은 아무도 못 말리는군. 대책도 없이 일단 나서기부터 하다니…….”

“나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묘지기는 주위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푸른 자연 사이로 점점 퇴색되고 있는 인간의 흔적들.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메시지로 대충 들었고.”

그 말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리아드네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

“아리아드네.”

강예나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 모습에, 아리아드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리아드네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묘지기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나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왜 저 묘지기한테는 저렇게 구는 거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아리아드네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횡설수설하는 말이 앞뒤 없이 튀어나왔다.

“저는…… 제가, 당신의 세계가 그런 꼴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타르토스도 이렇게 된 상태라, 다시 불러들일 수가…….”

‘……아, 그런 거였나.’

아리아드네가 내 등을 민 것은, 결국 나를 앞으로 있을 타르토스의 혼란에 말려들게 하기 싫어서였다.

그러니 그냥 본래의 내 세계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라는 의도로 한 짓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배신이었던 것은 별반 다름없지만.

어쨌든 ‘나’는 아리아드네의 의도대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뭐, 한국도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웠으니…… 아리아드네의 생각대로 되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저쪽의 ‘나’는 다르다.

저 녀석이 돌아간 한국은 이미 멸망해 있었던 것이다.

세계를 구한 용사는 친구마저 잃은 채 홀로 남은 세상으로 떠밀려졌다.

아리아드네의 의도와는 달리 행복해지지도, 평온해지지도 못했다.

“그것만은…… 제가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이쪽의 타르토스도 멸망해 있었기에……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기구한 운명이었다.

나는 가만히 아리아드네에게로 다가가는 ‘강예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 달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저 녀석은 이 세계를, 아리아드네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의 운명은 이제 완전히 갈렸다.

내 일리아스와 알리시아, 루카스는 살아남았지만…… 심지어 한국에도 소중한 동료가 생겼지만, 저 녀석의 세계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본인의 입으로 자신에게는 지킬 것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그렇다면…….

“아리아드네.”

그 부름에 아리아드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런 아리아드네와 시선을 맞추기 위한 것일까.

‘강예나’는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릎에 풀물이 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

“예……?”

아리아드네가 예상했을 원망이나 증오의 말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 그렇겠지.’

내가 할 법한 이야기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인 아리아드네는 놀람을 넘어 거의 얼이 빠진 것 같았지만.

“네가 괴로울 때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 없는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랬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런 짓은 못 하게 막았을 거야.”

“레나…….”

아리아드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저한테…… 화나지 않아요?”

“당연히 화는 나.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돌려보낸 것, 그래서 내가 친구들의 끝을 지키지 못한 것도, 네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말이야.”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아리아드네의 몸이 떨렸다. 딱히 비난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아마도 눈앞의 강예나는 나보다도 더욱, 아리아드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되어 있던 탓일 것이다.

그야, 저 아리아드네의 ‘강예나’는 내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요.”

아리아드네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아리아드네가 눈을 감았다.

“당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마치 강예나가 그대로 검으로 목을 쳐도 받아들이겠다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리아드네에게 돌아간 것은 검이 아니라…….

“그래도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아리아드네.”

포옹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리아드네를 껴안은 묘지기가 그 등을 토닥였다.

“이제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걸. 너마저 잃고 싶지는 않아.”

“레나…….”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글쎄. 솔직히 아직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 말은, 그러니까…….”

일리아스가 서로를 껴안고 있는 강예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 세계로 이 아리아드네 님을 데려가겠다는 말이지?”

묘지기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리아드네가 무슨 바이러스 덩어리나 전염병이라고 해도 어차피 망한 세계, 그게 그거지. 여기서 더 망할 것도 없어.”

“아니…… 아무도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

바이러스 덩어리니 전염병이니, 아무리 그래도 폭언이다.

무슨 세기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옹하고 있으면서 잘도 저렇게 말하는군.

“오히려 기대되는걸. 아리아드네를 데려가면 꼴 보기 싫은 녀석들이 좀 꺼질지도 모르지. 특히 릴리스 같은 녀석들.”

그 말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릴리스라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걔는 아직도 거기에 붙어 있는 거야?”

“말도 마. 틈만 나면 생겨나는 게 초파리 같다고, 진짜.”

“초파리…….”

릴리스가 들었다면 배를 잡고 눈을 까뒤집으며 웃었을 비유였다. 딱히 틀린 것 같지도 않다만.

“어쨌든, 아리아드네가 여기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적긴 하지만 지구의 다른 나라에도 살아남은 녀석들이 있어. 다들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고 있지.”

묘지기의 말에서 내가 저쪽 세계를 떠난 후로도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그게 나답기는 했다.

싸우고, 힘이 모자라 패배하고, 결과에 실망하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다시 한번 발버둥 치는 것.

그렇게 투쟁한 결과 저 녀석도 이곳으로 왔다.

도중에 한 번이라도 포기했더라면 절대 도달하지 못했을 곳으로.

“그러니까 나한테 와, 아리아드네.”

‘강예나’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물론 지금의 지구는 살기 편한 곳도 아니고, 엄청나게 고생하긴 하겠지만 말이야. 아마 우리가 초창기에 여행 다닐 때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

“………….”

“그래도 올 거지?”

그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결국 바닥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아리아드네는 세계를 멸망시킨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온당한 결말이 아니라고 했지만.

“……네.”

나는 그래도, 다시 한번 아리아드네가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랐다.

또 다른 내가 그렇듯이.

* * *

그렇게 하나의 결말이 마무리 지어진 후.

“이, 이, 이…… 바보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알리시아가 남은 한 팔로나마 녀석을 끌어안았다. 묘지기는 웃으며 더욱 세게 알리시아를 마주 안았다.

“팔 한 짝은 또 어디 팔아먹었어, 알리시아.”

“팔아먹은 거 아니거든?”

“본인이 성질에 못 이겨서 잘라 먹기는 했지.”

“너희는 아직도 싸워? 그만 좀 싸워. 사이좋게 지내야지.”

강예나는 웃으며 일리아스도 한번 세게 껴안고 놔주었다.

그리고,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는 왕자를 관찰한 강예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야, 루카스. 너도 나이를 먹긴 하는구나?”

“……나를 보고 할 말이란 게 고작 그거냐?”

“아하하, 그것부터 생각난 걸 어떡해.”

그렇게 말하며 강예나는 루카스를 한번 꽉 껴안았다.

루카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포옹을 받으며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귀에 무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강예나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환하게 웃었다.

“응, 그럴게.”

무엇이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게 마무리해야만 하는 관계도 있는 것이겠지.

루카스와의 인사를 마친 강예나는 곧이어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인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흰 신관복에 풀물이 들어가는데도 아리아드네는 도통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너희 아리아드네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네.”

“그러게. 몸에 이상은 보이지 않는데…….”

그 말에 깨어 있는 ‘아리아드네’ 쪽이 끼어들었다.

“제가 있는 동안에는 계속 이 상태일 거예요. 몸에 ‘죽음’이 깃들어 있었던 거니까요.”

“그래? 인사하고 싶은데 아쉽다. 아, 그건가? 잠자는 공주님을 깨우려면…….”

“감당 안 될 소리는 하지 마라.”

“아하하. 네 쪽은 둘, 아니, 셋 사이에 끼어서 고생 좀 하겠는걸.”

“뭐라는 거야?”

계속 웃으며 농담을 하곤 있었지만, ‘강예나’의 표정 어딘가에서는 그림자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강예나와 아리아드네의 세계는 여기가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군데군데 드리운 그 슬픔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굳이 꺼내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단 한 명, 그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 앞에 선 이우연을, 묘지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우연은 ‘강예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저 녀석과 내가 걷는 운명이 달라진 결정적인 이유.

이 이우연이, 그러니까 과거의 루카스가…… 내가 아는 이우연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세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수많은 세계가 있는 차원에서 루카스가 내가 있는 세계에 태어난 우연이야말로 기적이었다.

만일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적시기에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을 테고, 결국 한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우연은 저쪽 세계의 한국이 멸망한 것이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웃긴 이야기였다.

“미안해하지 마.”

아니나 다를까, ‘강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저 녀석이, 아니, 우리가 루카스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책임감이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왕자가 된 것 같은 남자가 그럼에도 승부에서 패배했다면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예나의 말에 잠깐 놀란 듯했던 이우연이 이윽고 픽, 웃었다.

“……누가 같은 사람 아니랄까 봐, 정말 같은 소리를 하네.”

“그만큼 진심이란 뜻이야, ‘이우연’ 씨.”

그렇게 말하며 강예나가 주먹을 들었다.

이우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부딪혔다.

“괜한 생각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아. 알았지?”

“그쪽이야말로.”

그 인사를 끝으로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벌써 두 번째긴 했지만, 정말이지 또 다른 나를 만난다는 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수많은 가능성으로 분화한 세계들.

그 별처럼 많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기적일까.

눈이 마주치자 또 다른 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지난번에 두 세계를 모두 지키라고 했었지.”

“응, 이제 내 쪽은 걱정할 필요 없어.”

“오, 자신만만하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한테 줄 게 있어.”

계속 생각했다.

‘이것’을 어디에 써야 할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건 내가 정할 몫이 아니었다.

또 다른 나는, 내가 내민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이제 너한테 필요하겠지.”

마지막으로 남은, 다섯 개째의 운명의 씨앗.

“나는 이제 지켜야 할 것을 모두 지켰어.”

첫 번째로는, 알리시아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페트라와 엘리사를 구했고, 그렇게 세계의 희망이 될 불씨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는, 일리아스의 마음을 되돌렸다.

철저하게 짓밟히고 배척당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의는, 그럼에도 결국 보답받았다.

엘리사 메이가 알리시아를 구해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로는…… 또 다른 거대한 절망이 찾아와 실패하고야 말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는 돌아왔다.

그리하여 네 번째의 씨앗은 결국 이 세계에 뿌리를 내려, 새로운 내일의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내일로 향하는 길은, 부름을 받아 세계마저 넘어온 용사 덕분에 지켜졌다.

그러니 이 다섯 번째 씨앗은 우리 세계의 몫이 아니다.

“이제는 네 차례야.”

이것이 또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불씨가 되기를.

운명의 씨앗을 받아 든 강예나가 잠시 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가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과제를 받아 버렸네. 너무 어려운 거 아니야?”

“힘에 부치면 불러. 내키면 도와주러 갈 테니까.”

“그것참, 힘이 되는 소리네.”

누가 무어라 말을 꺼낼 것도 없이.

챙!

우리는 이전에 헤어질 때처럼 검을 맞부딪혔다.

두 개의 성검이 마주쳤다가, 이윽고 다시 각자의 검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검은 신관복을 입은 아리아드네가 나를 껴안았다.

나는 그런 아리아드네의 등을 마주 안아 주었다.

숱한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이별하기 싫다는 말이 입을 맴돌았지만, 그래도…….

“안녕, 아리아드네.”

이번에는 제대로 인사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삶은 이별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제 너도 네 세계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안녕, 레나.”

아리아드네가 울면서 웃었다.

그것이, 우리의 이별 인사였다.

파아앗!

강예나가 휘두른 성검이 세계를 찢었다.

마치 종이처럼 찢어진 틈 사이로, 강예나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고 뛰어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용사와 눈이 마주쳤다.

입술이 움직였다.

- 언젠가 또 만나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새로운 미래로 사라져 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