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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2화 (2/221)

2화

2000년경 대통합 과정에서 인간과의 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지하쉘터.

혹은 지하방공호.

기계의 습격을 받아 도망친 사람들의 생존대피소로.

우우우우웅!

복도 한구석,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강태석이 아까전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하던 아린을 떠올렸다.

이 쉘터의 상황을 제대로 알수는 없지만 회의의 내용은 짐작이 가능하다.

점점더 떨어져가는 물자, 작동을 멈춰갈 발전기.

당장 지상의 기계들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었다지만 사람들은 결정을 해야한다.

이곳에서 서서히 말라죽어갈 것인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다른 곳, 더 물자가 풍부하고 안전하다 판단되는 곳으로 이동할지.

둘 모두 쉽지않은 결정.

두가지 선택지 모두 결국은 죽음에 한층 가까워지는 느낌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두 선택은 강태석에게도 중요하다.

강태석 본인도 아까전, <무기고> 퀘스트를 비롯한 몇가지 활동을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이니.

안전한 곳이 있는데 굳이 먹을것도, 쉴데도 변변치못한 지상에서 활동하는건 미친짓이다.

'그러니 이정도쯤은 감수해야겠지.'

철컥.

어느새 저벅저벅 다가와 목에 총을 들이대는, 두 동료와 함께 나타난 무장병 사내가 손을 들어보이는 강태석을 향해 물었다.

"너 어디서 왔지?"

"..."

"요즘 시국이 정말 만만치 않지. 기계놈도 모자라 이제 다른 쉘터 놈들 스파이도 경계해야할만큼."

동료를 뒤로 세운 무장병사내의 말에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뻔 했다.

연방이 패배하고 대부분의 생산이 정지된 시대.

물과 식량도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건 연료다.

발전기가 멈추는순간 쉘터를 중심으로 하는 방해전파가 멈출터이고.

그렇게 되면 스캐럽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어 이곳에 살아가는 수십, 수백 사람들의 피와 살점을 사방팔방으로 흩뿌려놓을 테니까.

당연히 멸망이 74%나 진행된 지금 이시기는 쉘터간의 전쟁과 약탈도 극심한 상태.

하지만 강태석은 이런 무장병 사내를 비롯한 이 셋의 의심을 걷어내는 법도 알고 있었다.

의심은 언제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까.

"나는 도시, <센트라>에서 왔지."

"... 지금 뭐라고?"

"<센트라> 출신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그곳을 향하고 있다. 안전한 길도 알고."

철컥.

강태석의 덤덤한 말에 무장병사내가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겨누고 있던 총구를 내렸다.

**

지구통합연방.

대륙위, 통합의 주축이 된 수많은 <귀족>들이 이 연방을 통치하며.

각 <귀족>들은 스스로의 영역을 지니고 자리잡은 수많은 도시, <센트라>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센트라.

보통 거주민 100만-300만 가량, 혹은 그 이상.

그 모든 도시민들과 주변지역으로의 물자와 에너지를 생산하고 공급하던 연방의 심장들.

썩어도 준치라고.

이런 촌동네가 아닌, 귀족이 직접 소유하는 방위도시 <센트라>는 맹렬한 멸망 와중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 이 세계에 생존하고있는 모든 이들의 목표가 대지 위,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들을 뚫고 방위도시, <센트라>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물론 통신과 연결이 단절된 세상, 변변찮은 무장으로 향하는 이들 100중 100이 가다 살해당하지만.

한데 갑작스레 방문한 이방인이 그 안전한 길을 안다고 하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

그게 지금 강태석이 쉘터 깊은곳, 자그마한 회색빛 회의실 가장 앞에 서있는 이유.

그리고 탁자에 앉은,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있는 아린을 비롯한 열명의 위원회들로부터 냉랭한 눈길을 받고 있는 이유이다.

"너무 형편좋은 얘기인데. 딱 맞춰 아린을 구해준 녀석이 도시로 가는 길까지 안다고? 거기다 무장도도 낮은데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무장도.

이곳에서의 레벨을 이르는 단어.

띠딕.

강태석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회의석상의 사내중 한명을 바라보았다.

<페리트란>

<추정레벨 8>

<그는 이곳 쉘터의 무기 및 전투물자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핵심인력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를 담당하게 된 이유는 누구도 잘 믿지않는 폐쇄적 성격과 꼼꼼함, 즉결성때문입니다.>

<만약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할시 즉결처분당할수 있습니다.>

키이이잉.

강태석이 전신, 기묘한 빛의 금속으로 피부를 대체한체 앉은 사내, 페리트란을 바라보았다.

예전, 게임에서의 NPC들은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구성되었다.

설정과 리액션.

이중 캐릭터별 설정이야 대충 정해져있었지만 리액션은 그야말로 진짜 사람처럼 무궁무진했다.

자신이 행하는 바에 따라 천사가 될수도, 악마가 될수도 있는게 NPC들.

물론 후일 지대한 영향을 미칠 메인캐릭터들 설정이야 기억하고 있고, 또 그때는 이런것들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이런 변두리캐릭터들 설정이야 당연히 모른다.

즉?

앞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하기 나름.

확실히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자리에서 변사체가 될터.

회의석상이라 무기가 없다하더라도 8레벨, 7레벨 차이면 맨주먹으로 자신의 심장을 꿰뚫어 죽이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잠시후.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건 맞아. 하지만 굳이 너희 쉘터가 아니라 아무 쉘터라도 상관없던 이야기다."

"흠?"

"당장 함께 할만한 무력이 필요했으니까."

강태석이 페리트란과 아린, 그외의 이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아린을 제외한 모두가 제법 높은 무장도, 즉 전투용 육체개조를 진행했다.

쉘터 전체 수백명을 모두 합치면 상당한 무장세력이라는 의미.

강태석은 그런 이들을 향해 마저 말을 이었다.

"폐허 외곽으로 정찰대를 꾸려 정찰을 다녀오는걸 제안하지. K 1411, 32232. 그쪽이 이곳을 벗어나 센트라로 향하는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

"다른 경계로 가면 몰살이지만 그곳은 그나마 안전하지. 거기가 유일하게 <웜즈 씨>를 뚫을수 있는 곳이다. 가보면 내말이 맞다는걸 알겠지."

웜즈 씨.

벌레들의 바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페리트란의 냉정하던 얼굴에도 곤혹이 스쳤다.

이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어차피 쉘터를 떠나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결정해야하던 시기.

저게 사실이라면 최소한의 피해로 돌파구를 찾게된다.

거기에 그런 페리트란을 향한 강태석의 덤덤한 한마디.

"거기다 나는 내 자신을 입증하도록 하지. 근방 <무기고>를 털어오겠다. 그곳에서 이동식 전파방해장치를 가져와 너희와 나누지. 그쯤이면 너희가 보낸 정찰대가 내 말이 맞다는걸 확인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일테니."

무기고를 털어와 이곳, 폐허도심 탈출의 가장 핵심이 될 전파방해장치를 확보한다.(운이 좋다면 추가적인 병기와 보급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돌파해 도시로 향한다.

그게 강태석의 가장 기본적인 계획.

하지만 그런 강태석의 말에 페리트란이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무기고가 이근방에서 가장 위험하다는걸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걸 너같은 준민간인 녀석이 다녀오겠다고?"

페리트란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고.

도심 연방시민들의 기본방위를 책임질 물자들이 모여있던곳.

하지만 그런 이유로 가장 먼저 습격을 받아 지금은 기계병기들로 지옥이 열린 장소.

그게 주변 쉘터의 생존자들 모두가 물자가 절박함에도 그곳으로는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하지만...

"물론이지. 나는 혼자가도 전혀 상관없어. 자신있으니까.  물론 너희가 나 혼자 보내진 않겠지만."

"..."

"내가 무기고 공략에 성공하면 그것들 챙겨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 확신할수 있겠어?"

이에 페리트란의 입술이 작게 일그러졌다.

**

쉘터, 비는 방중 하나.

작은 원룸 크기, 마찬가지로 회색벽과 바닥사이의 침대에 앉아있던 강태석이 바깥에서 잠긴 철문을 바라보다 몸을 우득 풀었다.

아까전, 회의실에서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건방진놈. 주리를 틀어주마!>

... 같은 상투적인 대사와 고문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페리트란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제안은 손해볼게 하나없었으니.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모험을 할수 있다.

정찰이야 어차피 매번 보내는것, 정확한 위치를 알고 간다면 피해없이 자신의 말의 진위를 확인할수 있으며.

무기고도 어차피 자신이 간다했으니 쉘터 입장에선 큰 전력손실이 없는것이다.

최악의 경우 몰살당해도 그들이 잃는건 자신을 따라보낼 소수의 지원겸 감시병력일테니까.

아 그리고 자신이 요구할 적당량의 무기와 물자정도.

"올때가 되었는데."

후우우웅.

가부좌를 틀고있던 강태석이 철문을 바라보던 그때.

철컥.

"익숙한 얼굴이라 반갑네."

"그것때문에 내가왔지. 난 달갑지 않지만."

잠긴 철문을 열고 들어온, 험상궂은 무장병 사내가 자신이 짊어지고 들어온 것들을 촤르륵 풀어놓았다.

투박하게 생긴 칼, 배낭, 얼핏보면 잠수복같이 생긴 검은색 피복슈트, 기타등등.

이를 보는 강태석의 눈에 실시간으로 정보가 떠올랐다.

일단은 칼부터.

<태도-야마하(4.1 ver)>

>대국, 아스란을 단신으로 무너트린 통합연방의 대초인, <야마하>의 이름을 딴 연방제식대검.

>워프게이트 연구를 진행한 기업, <룽켈>은 이계에서 화기를 사용할수 없는것을 알고 그곳에서 발견된 기계병기들의 에너지원을 연구하여 이 대검을 제작했습니다.

>기계병기들의 에너지팩으로 가동되며 화기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 기계병기들을 대상으로 유효한 타격을 입힙니다. (현재 충전량 : 54%)

>단 조심하십시오. 기계병기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진화합니다. 이 태도는 신식 기계병기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엔 상당히 구버전입니다. (최신버전 : 9.4)

키이이이이이잉!

손잡이끝, 작은 붉은빛 보석을 깜박거리고 있는 칼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쥐자 길이 1m정도 되는 칼 전체에서 붉은 에너지가 희미하게 흘렀다.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넘실거리며 끊임없이 부드럽게.

"군인출신인가? 한수 있긴 한가보군."

"그런적도 있지."

유려하게 흐른 에너지에 이채를 띄며 묻는 무장병 사내의 말에 짧게 대답한 강태석이 나머지 슈트와 배낭을 바라보았다.

<강화피복(D)>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근력강화용 피복. 어느정도의  방열방한기능 또한 제공합니다.

>군용이 아니기에 방탄/방검/방호력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전용내장회로가 망가지지 않게 주의해주십시오.

<특수전투목적용 배낭(도시-센트라 : 소돔에서 제작)>

>3일치 보급품//전투 스테로이드//급속 고양제//신호탄//비상수리키트 등을 담고 있습니다.

>암시장에서 아주 인기있는 물건입니다. 그렇기에 비적들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중고비축품이라 몇가지 내장물품들이 빠진 상태입니다. 이를 잊고 사용하다 비명횡사당하는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 좀 멀쩡한걸로 주지. C급 피복이나 새 배낭이라도."

"굴러들어온 주제에 별걸 다 바라는군. 그리고 그런걸로 죽을거면 그런거 가지고 있어도 죽을거다."

이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의한다는 의미.

이어 강태석이 훠이훠이 손짓하자 무장병사내가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나가달라고. 남자 옷갈아입는 걸 감상하는 취미없으면."

"..."

"곧있으면 무기고로 갈것 아닌가? 바로 준비해야지."

피복을 들어 흔들거리는 강태석의 손짓에 무장병 사내가 킁 콧김을 내뿜으며 바깥으로 향했다.

잠시후.

타아앙!

"좋아. 개조 좀 해볼까."

사내가 나간뒤 적막해진 방안.

치이익.

특수배낭안, 작은 수리키트안에서 납땜기와 금속재 몇가지를 꺼낸 강태석이 침대위에 강화피복을 널어놓았다.

**

30분후.

콰르르르릉!

"..."

'얘도 간다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무장병 사내를 비롯한 열명의 군인과 함께 탄 강태석이 그 사이, 콧바람을 흥얼거리는 아린을 바라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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