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치지지직...
치직...
<숨겨진 비밀공간에 진입하였습니다.>
<경고 : 현재 사용자에게 지나치게 레벨이 높습니다.>
<경고 : 현재 사용자에게 지나치게 레벨이 높습니다.>
...
강태석은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경고를 무시하고 눈앞, 기계장치들이 자리잡은 연구실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어차피 경고란 이 연구실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지하5층 존재들때문에 뜨는것.
나갈일이 없으니 마주칠일도 없다.
중요한건 눈 앞에 있는 물건.
스르르륵.
연구실 중앙까지 걸어간 강태석이 천장에 매달려 내려온 흰색의 흉부갑옷을 쓰다듬었다.
예전 드래곤볼에서 나오던 전투복과 비슷한 형태.
강태석이 갑옷의 표면을 매만진 순간 요란한 음성과 함께 설명창이 떠올랐다.
<전투강갑(S)>
>레벨제한 : (-)(성장형)
>연방의 학자, 카트란이 중앙에서 빼돌린 물건.
>카트란은 이를 연구하여 멸망해가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죄값을 치르고싶어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덜컥.
허공에서 흉갑을 빼내린 강태석이 물건을 쓰다듬으며 예전을 떠올렸다.
카트란.
자신이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의 원주인.
이 게임에서 이 세계를 몇회차인가 반복하다 만난.
동시에 이세계를 멸망으로 몰고간 워프게이트의 핵심연구인력.
워낙 거대한 프로젝트였기에 카트란조차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는 제대로 몰랐다.
다만 그 초인, <야마하>를 비롯한 연방의 핵심무력부대들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까지 차원너머에서 이를 가져왔고.
연방은 이를 연구하거나 양산화하지 않은채 그대로 묻어버리려고 했다는것 정도.
카트란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빼돌린뒤 이곳, 친분이 있던 도시무기고 담당자의 지하에 비밀연구실을 만들고 숨어버렸다.
이를 연구하여 기계병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비록 결과적으로 보면 멸망을 막는건 실패했고 이 세계는 착실하게 망해가고 있지만...
"나중에 꼭 대신 써달라고 했지."
흉갑을 떨꺽 들어올린 강태석은 이를 조심스레 내린후 몸안에 입고있던 피복을 매만졌다.
혹시나 해서 과부하 개조까지 해놓았는데 거기까지 쓸일은 없었다.
뭐 언제나 대비해서 나쁠건 없으니까.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 목숨줄에 여분을 만들어두는건 기본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녀석과의 인연은 여기까지.
지이이익.
지이이이이익.
옷을 벗고 피복을 탈의한뒤 다시 옷을 입은 강태석은 흉갑을 들어올린뒤 심호흡을 하고 머리로 가져가 몸에 들이씌웠다.
순간.
차르르륵.
몸에 들어맞은 흉갑이 마치 녹아들듯 흰물결을 일으키며 전신 피부로 퍼져나갔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는듯한 모양새와 함께 서서히 피부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백색의 파도.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문구들.
<... 기본방어력이 믿기힘들 정도로 상승합니다. 단 사용자 레벨이 낮기에 한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 기본마력효율이 믿기힘들 정도로 상승합니다. 단 사용자 레벨이 낮기에 한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 기본근력과 반사신경이 믿기힘들 정도로 상승합니다. 단 사용자 레벨이 낮기에 한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
전신 모든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는 수십개의 문구에 지켜보던 강태석의 눈꼬리가 만족스럽다는듯 살짝 휘었다.
이게 S등급 보구, 혹은 유산의 힘.
세계에서도 정말 몇개없어 보물취급받는 것들의 위력.
고작 2레벨에 찼는데도 이정도의 옵션과 강화치를 보여준다.
훗날 레벨이 오르고 제약이 풀리면 어느정도로 성장할지 상상도 하기 힘든 노릇.
하지만...
"이렇게해도 될까말까라 이거지."
스르르륵.
어느새 모조리 흡수되어 이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피부를 매만지며 강태석이 숨을 내쉬었다.
기본적으로 <그랜드크로스>는 후반부로 가면 절대 이길수없는 녀석들이 마치 배경화면처럼 등장하며 사용자들을 괴롭힌다.
말하자면 내 한계레벨은 50인데 500짜리 용의 둥지에서 뭔가를 훔쳐오라고 한다던둥.
레벨제한이 200인데 300짜리 마수가 사는 숲에 영지를 지으라고 한다는둥.
즉 심하게 난이도가 무너진 게임.
레벨차이가 심하게 나면 정면대결로 어림도 없음은 기본.
재수없으면 미션중 재앙처럼 터져나온 무언가들에 휘말려 비명횡사할수도 있다.
이런 것들로 <떡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들어지다는 의미.
실제로 이 세계만 해도 그렇다.
레벨제한은 100.
하지만 자신이 알기로 <노아> 근처에는 레벨 100 넘는 기계병기들이 득시글거린다.
"... 더 철저히 준비해야겠구나."
촤르르르륵.
1차목표를 완수한 강태석이 이제는 주변, 연구실 구석구석에 배치된 수십개의 전파방해기를 모조리 떼어내 준비해온 큰 포대자루에 쓸어담으며 중얼거렸다.
살아남는건 기본, 현지의 것들을 잘 활용하는 건 물론이고.
가는길에 이런 <전투강갑>같은 S급, 혹은 A급 무언가들을 모조리 쓸어담아 둘러야한다.
안그러면 잘 진행하다가 갑자기 터져나온 뭔가에 휩쓸려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잉....
<경고 : 현재 사용자가 하는 행위는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경고 : 현재 사용자가 하는 행위는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철커덕...
철커덕...
쿠우웅...
전파방해기기를 떼어낼때마다 쉴새없이 경고음이 울려퍼졌고.
동시에 연구실 외벽너머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기계음 역시 커져갔다.
연구실을 숨기기위해 중첩되어있던 기계들이 떼어내어질때마다 적들의 눈을 가리던 방해전파가 약해지고 있는것.
어느순간.
철커덕...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득!
연구실 벽면을 박살내고 튀어나온 기계손이 거침없이 뚫고 들어온 구멍을 사방으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두께 50cm는 되어보이는 합금벽면이 마치 종잇장으로 보일 정도.
거기에 이는 말그대로 시작일뿐.
콰드드득!
키이이이잉!
콰드드드드드드득!
"성격급한 놈들. 기다려라."
사방팔방에서 짓쳐들어온 수십개의 손들이 연구실 벽면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와중에도 강태석은 유유히 전파방해기기를 챙겼다.
열하나, 열둘, 열셋.
이윽고 각면에 배치된 열네개의 기계들을 모조리 챙겨넣은 강태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밀연구실과 무기고 5층을 격리하던 금속격벽은 이제 모조리 너덜너덜해져가는 상황.
쿠르르릉...
그렇게 뚫린 구멍, 어둠 너머로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무언가>들이 차례대로 짓쳐들어오려던 찰나.
키이이이이이잉!
스팟!
코드를 발동한 강태석이 아까전처럼 발동된 검은 구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
파파팟!
"후우."
포대를 메고 튀어나온 강태석이 아까전보단 훨씬 산뜻한 지상의 공기를 맡으며 심호흡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위험한 곳에서 중요한 일을 해내고 돌아왔으니 어느정도 긴장되었던 것도 사실.
'그래도 진도가 빠르다.'
산뜻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려던 강태석은 순간 분위기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고오오오오...
적막한 폐허.
있어야할 무장병 사내도, 군인들도, 아린과 여인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어둠, 적막.
그리고 전파방해기기가 자리잡고있던 작은 스파크의 흔적뿐.
이윽고...
"환장하겠군."
키이이이이이이잉!
키이이이잉!
전파방해기기는 있지만 이를 활용할 동력원이 없다.
자신의 갑작스런 등장을 감지하고 사방에서 내달려오기 시작하는 익숙하고 불쾌한 소음에 강태석이 빠르게 칼을 뽑아들었다.
**
무기고 폐허, 300m 가량 떨어진 폐허 빌딩.
저벅.
"경치가 좋지않아? 나는 가끔 여기와서 주변을 주욱 살피고는 하지. 사방의 빌딩이 다 무너져서 잘보이거든. 높아서 지상 개미들 소리도 안들리고."
후우우웅!
대략 50여층가량 높이, 사방벽면이 무너져 탁트인 곳 플로어의 가장자리를 따라걷던 청년이 무장한채 우뚝선 십수명의 군인들 사이, 모조리 묶인채 무릎꿇고있는 무장병사내와 아린들을 보며 씨익 웃다가 그 앞으로 가 쪼그려앉았다.
"기분좋을때 솔직히 말하자고. 무기고로 뭐 줏어먹으려고 간거야."
청년의 의심은 합리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강력한 기계병기일수록 생체펄스 감지능력이 강해진다.
이를 막아주는게 방해전파기기라지만 상대 기계병기가 너무 강하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뜻.
그리고 무기고는 그런 녀석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방해전파기기가 목숨을 온전히 담보해줄 그런데가 아니라는 거다.
그게 주변 모두가 무기고로 접근하지 않고있던 이유.
한데 갑자기 미쳐서 무기고로 향했다?
목숨을 걸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
그런 청년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아린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카트란. 너라도 살아서 다시 쉘터로 가라.'
"야야? 눈 안떠?"
아린이 자신의 눈꺼풀을 강제로 열어제끼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레드헬.
이근방에서 가장 악명높은 생존, 아니 무력집단.
재미로 사람들을 살해하고 생존에 필수적인 전파방해기기를 부수며 물자를 약탈한다.
어느날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이녀석들 때문에 근 1년간 망해버린 쉘터만 일곱개.
누군가는 총기에, 누군가는 괴물에, 누군가는 아사로.
그리고 아마 잡힌 이상 자신들의 운명 역시 똑같이 될것이다.
다만 카트란이라도 목표를 완수한후 자신들 쉘터로 돌아가길 바랄뿐.
그런 아린의 태도가 영 고까웠던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청년이 혀를 차며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여간 말로 하면 안돼. 칼 줘봐. 펜치랑."
"..."
이에 기다렸다는듯 가죽수납세트를 열어 각종 고문기구들, 그중 날카로워보이는 칼과 펜치를 꺼내 건네주는 수하의 모습에 아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꾸욱 움켜쥔 그때.
퍼어어어억!
꺼어어억…
“…!!”
계단쪽, 덤프트럭에라도 치인것처럼 퉁겨나오는 수하의 모습에 쭈그려있던 청년이 표정을 굳히며 벌떡 일어섰다.
**
5분전.
"언제까지 이런 촌동네에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재미있잖아? 눈치안봐도 되고."
"그렇긴 하지."
빌딩 1층에서 보초를 서던 두 무장병이 전파방해기기를 옆에 둔채 희희낙락 수다를 떨었다.
적이 많기에 누군가의 기습에 긴장될 법도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애초에 근방 전파방해기기는 보이는족족 박살내 이제 이 기계들의 킬링필드에서 안전할수있는건 자신들뿐이 없기 때문.
보초도 그저 형식상의 인원배치일 뿐이다.
"위층은 좋겠네. 오늘은 여자가 둘이나 있으니 재미 좀 보겠어."
"무슨 소리야. 여자군인들도 있었는데."
"크흐. 그것들도 여자라 쳐주냐?"
"으하하하. 하긴. 그래도 우리까지 순서가 돌지 않을까?"
둘이 허접한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며 히죽거리던 그때.
키이이...
키이이잉...
콰드득...
콰드드득...
"...?"
저 멀리서부터 아련히 들려오는 파열음에 미간을 찌푸린 둘이 철컥 총화기를 잡았다.
익숙한 소리에 익숙하지 못한소리.
익숙한 소리는 스캐럽의 불쾌한 돌진음이다.
저 소리에 이어지는 특유의 찢어지는 비명성은 이제 너무 많이 들어 감흥이 없을 정도.
반면 익숙하지 못한 소리는 무언가 부숴지고 으깨지고 박살나는 파열음.
키이잉..
콰득!
콰드드득!
돌진음과 파열음.
그 두가지가 쉴새없이 뒤섞인 소리들은 천천히, 하지만 아주 착실하게 폐허가 된 도심 사이를 지나 그들에게로 울려퍼져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건...
키이이잉!
콰드드드득!
“... 저건 또 뭐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장전까지 마친 두 무장병이 눈을 비비며 도시너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은빛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은빛의 파도가 아니다.
끊임없이 뛰어드는 스캐럽의 박동들.
마치 연어가 물살을 뛰어넘듯.
피라냐가 먹이감을 향해 달려들듯.
키이이잉!
콰드드득!
땅에서 솟구치는 수십개의 스캐럽들이 어딘가로 날아들고 추락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자리잡은건 믿기 힘들게도 사람.
콰직!
콰지지지지직!
셀수도 없이 내달려드는 스캐럽들의 한가운데.
백색의 갑옷을 휘감은 채 칼을 휘두르는 정체불명의 존재 하나가 미친듯이 스캐럽들을 동강내며 그들이 선 빌딩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온갖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로서도 처음보는 광경.
"... 내가 지켜보지. 올라가서 보고해."
심상치가 않다.
굳은 표정으로 수평선 너머를 지켜보며 말하는 사내의 지시에 다른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 뛰어올라가려던 그때.
퍼어어어어억!
"... !!!!!!!! 이런 미친!"
계단을 오르기도 전, 일직선으로 날아든 뭔가에 꿰뚫려 벽에 처박힌 동료의 모습에 사내가 기겁을 하며 화기를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