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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메인컴퓨터의 접속단자에 손을 올리고 있던 강태석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키이잉...

보이는건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보이는 여인.

오른 이마부터 시작하여 코위, 왼뺨까지.

강아지상의 고운 미녀상이었을 여인의 얼굴을 사선으로 난 깊은 상처가 이미지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었다.

... 아마 성격마저도 말이다.

치익...

철커덕.

"유언을 남겨. 이곳까지 최초로 온 기념으로 기억해줄테니 말이야."

상처가 난 얼굴, 그 위로 나노갑옷의 투구를 완성시켜가린 여인의 말에 그뒤, 금발 사내를 비롯한 열두명의 남녀노소가 웃었다.

그 말대로.

올림포스에 사는 자신들은 세피로트에 사는 하층민들이 타워 전체에서 무슨 난리를 치건 상관하지 않았지만 이곳, 150층과 151층은 예외였다.

출입금지.

혹여나 멋모르고 컴퓨터를 건드리거나 망가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심지어 1년전의 <그놈>도 이곳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한데 외부에서 들어온 녀석이 하루, 아니 몇시간도 채 안되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런 이들의 말에 강태석이 마주웃었다.

"그런 말을 해도돼? 너희가 여길 너무 소중히 하는게 보이잖아. 그 이유도 뻔히 보이고."

키이이이잉...

강태석이 칼에 마력을 잔뜩 불어넣은채 컴퓨터 아래, 케이블에 가져다대자 여유있게 걸어오던 여인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희미한 푸른빛을 띤 채 진동하는 시퍼런 칼날.

그 빛이 약해보이지만 가져다대면 뭐든지 성둥성둥 잘려나간다.

아무리 금속케이블이라지만 손목에 힘을 살짝 주면 순식간에 토막나 끊어질터.

하지만 머뭇거림도 잠시.

"하하. 그래 뭐. 협상하려는 거면 아주 좋은 태도야. 대화를 해서 너희가 원하는걸 얻어낼수도 있겠지."

웃으며 말한 여인이 이내 차갑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거였으면 작년에 내가 내려갔을때 말로 풀었어야지."

"?"

"대화는 이제 없다. 너희들에게 줄건 자비대신 징벌뿐이야."

동시에.

쿠르르르르릉!

쿠르릉!

강태석이 선 바닥을 비롯한 타워 전체가 기묘한 진동으로 떨어울렸다.

**

1층.

"제대로 될까? 150층으로 간다고 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아래에 모여든 이들의 웅성거림 속, 노인의 말에 리더 사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뭔가 방법이 있겠지요."

"너무 믿는 거 아냐? 오늘 본 상대를?"

이에 화기를 정비하던 리더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제일 위험한 곳으로 들어갔지 않습니까."

"..."

"일이 잘못되면 아마 제일 먼저 찢겨 죽을텐데 설마 대책 없이 들어가진 않았겠지요."

그런 사내의 말에 노인이 침음을 삼키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대로.

151층이 위쪽으로 연결되는 유리창때문에 금지된 구역이라면.

150층은 말 그대로 이 타워를 관리하는 메인 컴퓨터가 있기에 절대엄금된 곳이다.

위쪽에 살아가는 이들이 설령 151층을 허락하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150층만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자신들이 151층을 통해 위로 짓쳐들어가도 녀석들은 웃으며 모조리 밟아 죽일수 있겠지만, 150층만은 녀석들의 역린이기에.

그리고 그런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무섭다.

'하지만... 거기로부터 우리도 자유로운가?'

대장 사내가 걱정스럽다는듯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야 카트란이라는 녀석이 망둥이마냥 홀로 상대를 들쑤시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위의 녀석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이미 녀석들은 자신과 녀석을 통째로 싸잡아 묶어 생각하지 않을까?

이 타워의 모든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여 분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과연 자신들을 내버려둘까?

잠깐 150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림포스층에 불길하게 멈춰서있는 엘리베이터.

가만히, 어떤 변화도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두렵다.

당장이라도 짓쳐내려올것 같았기에 더더욱!

철컥.

공연히 손에 들린 화기를 매만진 리더 사내가 불안감을 없애려는 듯 숨을 고른 그때.

쿠르르르릉!

쿠릉!

타워 전체를 기묘한 진동이 휘감았다.

짧고 굵은.

하지만 불길하지 그지없게.

마치 재앙의 전조를 알리듯.

어? 뭐야?

응?

갑작스런 진동에 모인 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윽고 어딘가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미약한 소리.

키이이잉...

키이잉...

저 멀리 바깥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두려워 잊을수 없었기에 익숙했던.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서는 들을 일이 없었기에 점차 낯설어진 그 소리.

그리고 기억속에서 이 소리를 떠올린 순간 리더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미친... 끈겁니다."

"꺼? 뭘?"

"... 타워의 전파방해장치를 다 꺼버린거라구요!"

철컥.

화기를 들고 입구로 내달려간 리더 사내가 사방을 향해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모두 무기 들어! 쳐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후.

투타타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

키이이이이잉!

우아아아아아아아악!

타워 1층.

마치 해일처럼 몰려드는 다양한 기계병기들 속, 맞서 싸우는 이들의 비명과 탄환성이 입구와 공간을 그득 메웠다.

**

....

...투타타타...

150층, 거진 상공 1km.

정말로 높은 고도.

하지만 지상에서 들려오는 화약들의 폭발음이 어찌나 강렬하고 시끄러웠는지 그곳에 선 강태석과 이들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아주 미약하고 아련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말이다.

"우리가 직접 내려올 때 감사히 여겼어야지. 너희는 선을 너무 넘었어."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의 앞에 선 여인이 강태석을 향해 말했다.

자신들이 직접 내려와 손을 쓰는 건 옐로카드.

손보기야 하겠지만 직접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어느정도 손속에 여지를 두겠다는 거다.

어찌 되었건 자신들이 직접 손을 쓰니 봐줄 여지가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이번에도 옐로카드 정도로 끝내려고 했다.

눈앞에 선 녀석이 뒤의 얼간이를 통해 150층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번엔 완전히 선을 넘었다.

역린의 침범.

그게 레드카드를 꺼내든 이유.

이 타워 안의 모든 생명체들을 모조리 말살해버리기로 결정한 원인.

생존자가 있으니 저항의지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철저하게, 완전히.

모조리 지워버려 감히 도전하려고했던 역사와 흔적, 기억조차 없애버리리라.

"컴퓨터는... 상관없지. 어차피 그게 없어도 에코시스템과 플랜트는 대충 작동하는걸 확인했으니. 한번 부숴보던가."

여인이 칼을 가져다댄 강태석을 보며 시리게 웃었다.

스스로들의 가장 큰 취약점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을리가.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저게 망가지면 어떻게 될지 다각도로 이것저것 시도해봤고 이에 대한 결론이 최근에 나왔다.

결과는 안심.

메인컴퓨터와 올림포스의 시스템은 별개.

메인컴퓨터는 오로지 이 세피로트 타워를 위해 존재하는 부품이며.

망가지면 타워의 통제가 조금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높은 확률로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말에 강태석이 전선에 대고있던 시퍼런 칼을 후웅 떼어 허리춤에 걸쳤다.

메인컴퓨터의 접속단자에 올린 왼손은 떼지않은채, 자신의 행동에 득의양양해지는 이들을 바라보며.

"알아. 이게 따로 돌아가는거."

"????? 안다고? 네깟 게?"

"알지. 알고 들어왔으니까."

강태석이 이들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안다.

이게 올림포스와 따로 구동되는 시스템이라는 것도.

인질로 삼는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애초에 자신은 그런 걸 믿고 들어온 게 아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뛰어내려서 도망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

"하지만 이제 도망갈필요 없다는거 알았어. 작동하는걸 알았거든."

키이이잉....

<코드 : 여의 접속권한 확인중...>

<접속권한 확인.>

<발동가능여부 판단중.>

<발동가능확인.>

<코드 : 여의, 실행합니다.>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시스템 음성과 함께.

쿠르르르르릉!

아까전보다 더 크고 묵직한 진동이 타워 전체를 떨어울렸다.

**

짧은 진동.

하지만 아까전과 달리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주르르르륵...

주륵...

"어어? 이거 왜이래?"

여인을 비롯해 모여있던 이들이 당혹성을 내뱉었다.

입고있던 갑옷.

그도 모자라 코와 귀, 입.

그들의 내외를 감싸고 채우고 있던 은빛 액체들이 전신에서 모조리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당황 속, 제대로 반응하고 움직인 건 앞에 있던 여인뿐.

"무슨... 짓을 한거야!"

터어엉!

콰드드드드득!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내달려 강태석의 앞에 나타난 상처 여인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튕겨들며 그대로 내리찍었다.

금발 사내와는 다른 상당한 솜씨.

거기에 강화전 레벨도 낮지 않은지 휘둘러 내리찍어지는 칼에서 묵직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콰드드득.

오른손의 칼을 들어 막아낸 강태석이 자신을 노려보는 여인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분노, 그 속의 감출수 없는 당혹감.

원래대로라면 단번에 곤죽이 되었어야할 일격.

육체강화시술과 나노장갑은 그 정도의 위력을 지니건만 지금은 강태석의 한손에조차 간단하게 막혀버렸다.

이유는 하나.

금발사내와 마찬가지로 모든 무장이 해제되었으니까.

터어어엉!

"...!"

심상찮음을 느끼고 마주대던 칼을 뗀채 뒤로 멀찍히 물러난 여인을 바라보던 강태석은 이내 고개를 돌려 덤덤히 타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콰르르르르릉…

콰르르르릉!

회색빛 벽면을 띄던 타워 전체가 격렬하게 꿀렁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녹아내리듯 서서히 결집되며.

그리고 그 방향은... 메인컴퓨터의 접속단자, 강태석의 손이 마주한 자리.

정확히 말하면 어느새 강태석의 손과 접속단자 사이에 생겨나 있는 작은 원형의 술식진.

마치 무기고 때의 점프워크를 닮은 도형.

콰르르르르릉!

촤르르르르륵!

촤르르르르륵!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하던 은빛의 물결은 어느 순간부터 미친듯이 가속해가며 한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건물의 벽, 바닥, 천장 전체를 지나.

바닥과 위로 연결된 케이블과 메인컴퓨터의 위를 따라.

어느새 강태석의 왼손바닥 위로 옮겨간 원형 도형 안으로 말이다.

"대체... 대체 무슨! 이게 어떻게 된거야! 탑이 갑자기 왜!"

쿠르르르르릉!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150층속, 여인이 절규하며 외쳤다.

그들이 선 자리뿐만이 아니다.

천천히 타워 전체가 녹아내리고 무너져간다.

빨려들어가는 속도가 너무나 빨랐기에.

이대로 가면 탑만이 문제가 아니다.

위에 올려져있는 올림포스조차 떨어져내린다!

콰르르르르릉!

우아아아악!

아아악!

그렇게 모두가 당황하고 아우성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속, 자리에 서서 절규하는 여인을 향해 강태석이 웃었다.

"올림포스가 본질이 아냐. 그건 장식이지."

"...?"

"진짜 귀한건 이 <타워>란 말이다. 너희들이 무시하던."

나노머신 유동집합체.

별칭 세계의 기둥.

이게 올림포스를 떠받치고 있던 타워의 진실.

콰르르르르르르릉!

강태석이 손안으로 미친듯이 빨려들어오는 나노머신의 해일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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