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맙소사... 이게 뭔일이래."
타워 바깥.
콰르르르릉...
저멀리.
제법 멀찍히 떨어져 열심히 저격수와 기계병기들을 피해다니던 아린이 벙찐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믿기힘든 광경.
저 멀리, 하늘의 올림포스를 떠받치고 있던 은빛의 타워가 통째로 무너지며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늘어나있던 것이 원래자리를 되찾듯 쑥쑥 작아지며 말이다.
이윽고.
콰르르르릉...!
"..."
아린이 눈 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장엄한 광경을 눈돌리지 않고 직시했다.
굉음이 터져나온다.
하늘이 무너진다.
떠받들던 기둥이 사라지며.
그토록 굳건할것 같았던 <올림포스>의 추락과 함께.
잠시후.
쿠르르르르릉...
쿠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서서히 떨어져내리기 시작하는 원형의 구조물을 아린이 제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
콰르르르르르릉!
"우아아악! 이거 뭐야! 왜이래!"
올림포스 위.
정원에 다시 앉아 아래에서 벌어질 참극을 여유로이 감상할 준비를 하던 이들이 갑자기 벌어진 현상에 경악하며 소리쳤다.
불비불범.
자신들의 땅이, 자신들의 천국이 무너진다!
세상이 멸망하는 와중에도 영원할것같고 굳건할것같았던 자신들의 세계가!
하지만 비명도 잠시.
콰르르릉!
"아아... 아아아아..."
유리돔 너머.
서서히 미끄러지며 가까워져가는 지상의 풍경.
어느새 멈춰선 이들이 이를 바라보며 절망섞인 신음성만을 토했다.
피할수 없는 미래.
나노머신마저 발동하지 않거늘 그들의 땅과 지상이 점점 가까워지며 대충돌을 예고했다.
이제 그들의 죽음은 확정 그자체.
멈춰선 이들이 이제 기운마저 잃고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한 그순간.
콰르르르르릉!
이번에는 하늘이 아닌 그들의 발밑에서 또 한번의 변화가 생겨났다.
이제는 떨어져내리던 올림포스마저 그 형체가 무너지며 어딘가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것!
촤르르르르르르륵!
"와아악... 우아아아악!"
정원, 테이블, 의자.
모든것이 어느새 무너져 은빛 바다로 변하기 시작한 바닥에 풍덩 빠져들어 빨려간다!
이와 함께 떨어져내린사람들이 어딘가로 격렬히 흘러가는 은빛 해일에 휩쓸려가며 다시 비명을 토했다.
**
콰르르르릉!
붕괴되는 세상속.
강태석이 자신이 만들어낸 주변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콰르르르르르릉!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을 덮고 빨려들어오는 은빛의 해일.
기계, 인간, 물자, 병기.
타워를 딛고 존재하던 모든것들이 이에 휩쓸려 사이좋게 허우적거린다.
물론 대접은 조금 달랐지만.
콰드드득...
콰득...
우드드드득!
<스캐럽(LV. 1)을 처치하셨습니다.>
<격차가 너무 큽니다. 경험치를 확보하지 못합니다.>
<스터너(LV. 3)을 처치하셨습니다.>
<극미량의 경험치를 확보합니다. 육체가 강화됩니다.>
<현재 LV5(24.10%). 극미량의 마력이 활성화됩니다.>
<크러셔(LV. 5)를 처치하셨습니다.>
<소정의 경험치를 확보합니다. 육체가 강화됩니다.>
<현재 LV5(24.17%). 소정의 마력이 활성화됩니다.>
...
사람은 멀쩡하지만 기계에겐 가차없다.
은빛 해일에 휩쓸린 모든 기계병기들이 사방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우그러지고 박살나며 파편으로 화했고.
그 속, 그 모든 광경을 만들어낸채 오롯이 선 강태석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경험치창을 꺼버린 뒤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이 도시, 그 한가운데 서있던 세피로트 타워에 대한 기록을.
<연방은 센트라가 아닌 도시의 자치권들도 인정했지만 마냥 방자하게 내버려둘수는 없는 법.>
<나름 도시의 지배계급을 자처하는 녀석들은 통제하려하면 불만을 가지고 귀찮게 할것이고 놔두자면 하늘높은줄 모르고 날뛸것이다.>
<그러니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의 강압적인 방법은 쓰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는 레지스탕스 놈들과 손잡을수도 있으니.>
<대신 도시 한가운데 <기둥>을 설치하고 위에 거주시설을 꾸며 위장한다. 이러면 의심하지 못할테니까.>
<<기둥>의 사용은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허용하되 도시 전체가 <반역>이나 <혁명>의 기미가 보일 경우 즉시 발동하며>
<이에 대한 제반비용은 <기둥>에 입주한 민간인들과 <정원>에 입주한 자칭 지배계급들에게서 충당한다.>
<더불어... 중략.>
기둥.
그 정체는 연방이 만든 나노머신 덩어리.
정보로 통제되는 이 거대한 병기는 유사시 분해되어 모든것을 으깨어버리는 거압의 격류로, 때로는 녹여삼키는 죽음의 해일로 변한다.
나노갑옷도, 강화시술도, 벽과 계단의 변형도.
모두 이 거대한 기둥을 일부 변용하여 가져다쓰는 기능에 불과할뿐.
그리고 코드 : 여의란 이 전체를 병기화하고 통제할수 있는 지배권한.
콰르르르르릉!
쑥쑥 손 안으로 빨려들어가던 해일은 어느새 거진 모두 사라져가며 주변에 황무지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땅에 살포시 내려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는 타워와 올림포스의 생존자들도.
온전히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건 은빛 격류의 한가운데 선 강태석 혼자뿐.
잠시후.
쪼로로록...
터어엉...
치직...
한줌 은빛물결마저 모조리 왼손바닥으로 삼킨 강태석의 앞으로 고철이 된 메인컴퓨터가 땅에 떨어져내리며 육중한 충돌음을 토했다.
메인컴퓨터가 부딫친건... 바닥, 드넓게 펼쳐져 세피로트 타워의 기반을 구성하고 있던 금속재질 플랜트.
그리고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낸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들.
타워가 사라지고 드러난 사방 1km 정도의 정사각형 공간.
올림포스의 거주자도, 타워의 생존자들도 들어갈수 없이 온전히 타워의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며 전인미답으로 남아있던 곳.
원래는 타워의 지하였다 모습을 드러낸 그곳이 온통 금속의 플랜트와 막대한 물자들을 내보이며 스스로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 양이 어찌나 어마어마했던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생존자들이 다시 정신을 놓고 탄성을 토하며 환희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볼 정도.
하지만 강태석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런 물자들이 아니었다.
"..."
고개를 돌린 강태석이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메인컴퓨터가 떨어져내린 자리.
다시말해 타워, 지하의 한가운데 지점.
무언가를 세워둘 목적으로 보이는 크기 3m의 금속거치대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봉인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는 기묘한 재질의 사슬들은 모조리 끊어져있고 안에 있던 내용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지만 말이다.
'뭘 봉인해뒀던거지? 누가 가져간거고?'
하지만 강태석이 그런 의문에 대해 고민하기도 전 여러개의 창들이 떠오르며 눈앞과 귀를 어지럽혔다.
<레벨 6달성!>
<추가스탯 3이 지불됩니다.>
<외부스킬슬롯이 해금됩니다. 외부스킬을 습득하여 등록할수 있습니다.>
<레벨 7달성!>
<추가스탯 3이 지불됩니다.>
<육체 내부가 생명력과 마력으로 충만합니다. 검명이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오른 두개의 레벨.
이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스킬슬롯.
이제부터 외부의 스킬을 습득하여 익히는것이 가능하다.
자체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지만 운이 좋고 역량이 뛰어나다면 기본스킬보다 더욱 강력한 것을 익혀 사용할수 있는것.
그리고 검명.
10레벨, <검기>의 전단계쯤 되는 기술.
스킬이라기보다는 경지의 상징에 가깝다.
내부에 휘몰아치는 마력이 일정수준을 넘어 이제는 외부에 파형으로 구현이 가능해진것.
그리고 여섯개의 스탯까지.
<스탯 투자... 마력2/반사신경2/기술2투자>
<강태석>
>레벨 : 7(10.66%)
>직업 : 기계사냥꾼(등급-E)
>스킬 : 약식 EMP(Active/Passive)(등급-E)
>스탯 : 근력5/반사신경5/체력5/마력7/기술5.
>무장 : 전투강갑(S-현재 재사용대기중)/리벨리온(대여)/특수전투목적용배낭(Used)
만족스럽다.
이어 강태석 본인이 아닌 <여의>에 대한 메시지창도 떠올랐다.
<... 권한이전 완료.>
<<여의>의 주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레벨 측정중... 현재레벨 7>
<<여의>를 활용하기에 터무니없이 레벨이 부족합니다. 거의 모든 통제권한을 사용할수 없습니다.>
<<여의>를 활용하기에 터무니없이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대부분의 나노물질이 휴면에 들어갑니다.>
<<여의>를 활용하기에 터무니없이 격이 낮습니다. 거의 모든 운영모드를 사용할수 없습니다.>
미친듯이 떠오르는 경고문구에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걸 날로 먹을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여의의 추천 사용레벨은 100.
애초에 현재레벨구간의 존재들이 쓰라고 만들어놓은 게 아니다.
이를 알려주는게 아까전 떠올렸던 세피로트의 기록에 대한 마지막 문구.
<더불어... 이를 통해 연방 어디서건 일곱 대초인들은 이를 개인병기로 활용해 비상시 전략/전술적 우위를 점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자신의 왼손바닥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숨을 후우 골랐다.
당장 못쓴다지만 나쁠거 하나없다.
레벨이 오르고 강해지면 단계별로 설정된 운영모드와 권한들을 차근차근 꺼내쓸수 있을테니까.
당장은 이 사태를 해결한 것만으로 만족한다.
거기다 원래 목표로 했던 설계도안까지.
"뭐 물자랑 인력은... 포기해야겠지."
투타타타타타타!
조용! 조용!
다들 진정해라!
허공에 총을 쏘아대고 전파방해장비를 키며 착실하게 사태를 수습해가는 리더사내와 몇몇 대장들을 보며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
<남지 않겠나. 네겐 정말 최상급의 대우를 약속하지. 원한다면 나랑 동급으로 대우할수도 있어.>
후우우웅...
다시 EMP 쉴드를 걸고 폐허사이를 걸어 돌아가던 강태석이 아까전, 리더 사내의 제안을 떠올렸다.
뭐 지금 걸어가는걸 보면 알겠지만 그 제안은 거절.
이미 벌이고있는 일이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쑤욱.
"그래도 좀 아깝다. 안그래 아저씨? 그 녀석들이 우리 아래로 합류하면 진짜 어마어마한데. 물자도 그렇고."
옆에서 걷다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을 거는 아린에게서 아저씨란 단어를 고쳐줄까 말까 고민하던 강태석은 신경쓰면 지는거라고 애써 억누른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감당이 안 되지. 애초에 그쪽세력이 훨씬 더 큰데 아래로 들어올리가."
"어 목소리 떨린다. 설마 아저씨라는 단어때문에 열받은거?"
"..."
"농담이야 농담. 하긴 그나저나 아저씨 말이 맞아."
아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언덕 멀리서 지켜봤다.
족히 수천명은 될 숫자.
어찌나 놀랐는지 주변에 있는 저격수들마저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졌을 정도.
타워가 무너지고 봉인이 풀렸다.
어마어마한 머릿수.
거기다 그 모두가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으며 강해졌다.
이에 더해 그런 이들을 충분히 먹여살릴 정도의 막대한 물자까지.
아마 통합만 잘 된다면 그들은 단번에 이근방 판도를 뒤흔들어놓을 거대세력으로 급부상할것이다.
그게 저격수들이 부리나케 뛰어 그들의 본진으로 내달린 이유이기도 하고.
'... 혹시라도 적대관계에 돌입하면 피곤한데.'
속으로 차갑게 중얼거린 아린이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아저씨. 옆에 그 언니는 누구야? 설마 애인?"
이에 옆에서 조용히 걷고있던, 흉터가 난 여인이 눈썹을 치떴고.
<이 여자는 죄가 없다. 네가 데려가다오. 사람들이 분노하기전에.>
여인과 아린 사이, 떠나기전 대장의 말을 떠올리며 묵묵히 걷던 강태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왜 난 아저씨고 이 친구는 언니니?”
“…”
“…”
그 말에 여인과 아린, 둘 모두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강태석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