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커흐... 커흐..."
키이잉...
쿵.
쿵쿵.
벽면에 머리를 박아대던 구스트가 거친 괴성을 토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에너지를 너무 가득 채워서 그런가?
하지만 이내 그런 상념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머리속에 시뻘겋게 차오르는 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잊혀져간다.
이성, 기억, 통제.
머리속에 점점 남아 강렬하게 휘몰아치는건 분노, 고통.
그리고 광기뿐.
이 버러지들이 감히 뭉쳐서 대항해? 밟아죽여도 모자랄 것들이?
재미좀 보려고 했더니 벌써 끝?
콰직.
콰지지지직.
힘이 들어가자 구스트가 부여잡고 있던 벽면이 마치 종잇장처럼 부스러져갔다.
참을수 없는 분노.
당장에라도 모든걸 때려부수고 싶다.
내면의 넘치는 열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녀석들을 갈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를 막는건 최후까지 남은 한줄기의 이성이자 본능.
모든 생명체에게 우선되는 제 1순위.
생존본능.
지옥속에서 끊임없이 부여잡고 집중해온 그 본능이 구스트를 가로막았다.
자신이 철인이라 해도 무적은 아니다.
모든 놈들이 게임을 포기한 지금 미친놈처럼 난장을 부리며 화망에 뛰어들자고?
아무리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해도 무리, 무리.
온몸이 형편없이 구겨져 고철 깡통이 되어버릴 것이다.
꽈드드드득...
"끄으으..."
머리속에 밀려드는 열기의 파도와 이를 위태롭게 막고있는, 한줄기 이성 최후의 방파제의 격돌.
몸을 내던져버리고 싶은 욕망과 마지막 이성 사이에서 구스트가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던 그때.
<뭐야. 그게 문제였어?>
"...???"
<간단한 거였네.>
환청 혹은 속삭임.
어린아이가 속삭이는, 악동같은 목소리.
삐이잉...
자신의 머리속에 울려퍼지는 작은 일렁거림에 붉은 안광을 뿜어내던 구스트가 고개를 쳐들었다.
**
지하 공동망, 어느 구석.
"대체 이게 뭐야."
철그럭.
어느 허름한 지하도 구석, 제법 널찍한 수로 안을 살피던 두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이 발견한건... 대체 뭔지 모를 금속덩어리.
뭔가 천산갑같기도 하고 두꺼운 금속의 뱀같기도 한것이 직경 10m 정도 되는 수로 안에 둘둘 말린채 처박혀있다.
깊숙히, 어두컴컴한 곳에 있어 뭔지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저거 들고갈수 있을까?"
"어엉?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뭔지 알고. 거기다 적어도 중장비는 들고와야겠구만."
한 사내의 말에 앞에 선 동료가 핀잔을 주었다.
뭔지야 모르겠지만 금속 재질로 보이는데다 10m의 수로를 둘둘 틀어막을 정도의 크기.
통짜 쇳덩이, 톤 단위로 세야할것같은 녀석을 자신들이 무슨 수로 들고간단 말인가.
못해도 건설로봇 몇대는 들고와야 나를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
그런 동료의 말에 사내가 불퉁 중얼거렸다.
"그럼 어쩌냐. 초반에 여유부리다가 점수 될만한 물자 거의 못챙겼는데. 그래서 이렇게 구석구석이라도 뒤지고 있는거 아냐. 꼴찌로 돌아가면 우리 쉘터에 면이 서겠어? 우리만 믿고 있던 놈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
사내의 말에 동료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대로.
피난민들이야 넘쳐나니 천천히 잡아도 되겠지... 하고 여유부리다가 엇 하는순간 게임이 대치국면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지하 공동망 어디를 가도 <고슴도치> 천지.
거기다 이 고슴도치는 가시가 수십, 수백미터는 뻗는 살벌한 고슴도치여서 얼타고 통로 사이를 돌아다니다가는 구석 어딘가 처박힌채 잔뜩 긴장해 가시를 세우고 있는 피난민 녀석들에게 벌집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쳐도...
"어우. 어쩌냐. 이걸."
"..."
통로 안쪽 깊숙히 처박혀있는 뭔가를 두 사내가 답없다는듯 바라보던 그때.
끼릭...
끼리리릭...
"...!"
철컥.
철커덕.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 사내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몸을 튕기며 총기를 겨눴다.
한명은 수로통로안, 한명은 꺾인 통로 아래.
순식간에 엄폐를 마친 사내둘중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누구... 커헉...!"
드르르르륵!
"컥..."
순식간에 벌어진 일.
자동화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렬한 탄환의 섬광들이 일렬로 내달리며 그대로 머리만 빼곰 내밀고 있던 사내 둘을 그대로 갈아버렸다.
상반신을 가려주던 콘크리트벽들까지 통째로 말이다.
미니건.
분당 4000발의 속도로 탄환을 내뿜는 최흉병기.
그 연사력이 어마어마해 어둠속에서 보면 점이 아니라 한개의 선이 주욱 스쳐지나가며 걸리는 모든걸 갈아버리는 형태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들고다닐만한 사이즈와 반동은 아니지만...
철커덕.
철컥.
"크흐... 크흐흐흐하. 여기... 여기구나."
어둠 너머.
거대한 미니건을 들고 등장한 구스트가 오른쪽, 기계눈으로 붉다 못해 시뻘개진 안광을 뿜어내며 섬뜩한 굉소를 토했다.
**
지하, 건조구역 근처.
'50분.'
강태석이 속으로 숫자를 중얼거렸다.
50분.
현재 이 술래잡기라는 게임이 진행된 시간.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10분만 있으면 이 게임도 끝난다.
아무리 쉘터놈들이 막나가도 입구를 폭파시키고 어깃장을 놓는다고해도 한계가 있는법.
1시간은 페리트란을 비롯한 나름 온건한 쉘터들이 이에 불복하며 중장비를 가지고 입구의 돌무더기를 치워내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뭉쳐놓은 이들을 데리고 빠져나가면 그만.
거기에 두가지 이득도 있다.
'이렇게 뭉쳐놓았으니... 분명 유효한 전력군이 되어줄거다.'
강태석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쪽, 한층 평온을 되찾았는지 서로 담소를 나누고있는 피난민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이백정도 있지만 지하 공동망 전체로 따지면 더욱 많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여 뭉치지 않던 이들.
하지만 공동의 적과 위기 앞에 일단 뭉쳤다 .
그리고 이런건 원래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은 할만한 법.
수천에 달하는 피난민들은 분명 쉘터들에 비해 전체적인 세력도, 밀집력도 약하지만 그 머리수만으로도 절대 무시할수 없는 전력.
바깥에 나가 잘 보살피고 힘을 합친다면 다른 쉘터들이 막나가는걸 막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거기에 이안에서 잡아놓은, 교섭목적으로 쓸수도 있을 인질들까지.
"좋구나. 좋아."
"기분좋아요 형?"
"그럼 좋지. 이거 먹을래?"
배낭에서 초코렛 하나를 꺼내 건네는 강태석의 모습에 옆에 있던 소년이 신기하다는듯 물었다.
"이게 뭐에요?"
"뭐긴. 초콜렛... 뭐야 너 이것도 몰라?"
"네. 처음보는데요."
이에 강태석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세상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렇지.
초콜렛을 처음 본다니.
"... 동생들이랑 가져가서 먹어봐라. 맛난다."
그 말에 소년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받아든 초코렛을 내려다보던 그때.
쿠우우우우우웅!
육중한 진동이 지하 공동망을 타고 사방으로 울려퍼졌고.
어? 설마?
입구 열렸나?
모여들어있던 피난민들이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들이라고 이런 지하에 숨어있는게 반갑겠는가.
거기다 꼴도보기 싫은 쉘터놈들까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밝아진 표정으로 일어난 이들이 웅성거리며 입구쪽을 향하려던 그때.
드르르르르르르르륵!
콰르르르르르르륵...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하아아아아악!
흡사 지옥의 문 한켠을 열어제낀듯한 소리가 지하 공동망 전체, 모여있던 이들의 귓가를 강제로 긁어댔다.
아까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소음.
비교도 안되는 파열음.
비교도 안되는 괴성과 비명.
공포의 근원을 자극하는 그 소리에 일어선 이들의 표정이 절로 창백해졌다.
**
지하 공동망 제 3입구.
크아아아아악...
벌떡.
"뭐야."
"!!"
입구쪽,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수십명의 남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 뒤에 잔뜩 쌓여있는건 피난민들, 혹은 지하 공동망 구석에서 노획한 물자들.
즉 이들 모두는 게임 초반부에 우위를 점했던 이들.
이미 자신들의 우위를 확정 지어놓고 입구쪽에서 여유롭게 쉬고있던 이들이 굳은 표정으로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 비명, 이 소음.
심상치가 않다.
철컥.
철커덕.
수십명의 남녀들이 자신들이 애용하는 고등급 병기를 들고 비명성이 들려온 지하도를 겨누고 있던 그때.
쿵...
쿠웅...
쿠우우웅...
서서히 어둠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무언가>의 등장에 모여있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마치 코끼리 다리처럼 굵은,여덟개의 금속뱀 아니 금속다리.
몇개는 바닥을, 혹은 벽면과 천장에 뾰족한 발끝을 박아넣으며 거미처럼 지하통로를 걸어나오고 있었고.
나머지는 끝부분이 길게 갈라진 수십개의 금속 촉수들을 뻗은채 수십개의 총기들을 얽어쥐고 있었다.
마치 다리의 끝으로 말미잘처럼 수십개의 총기가 자라나있는듯한 모양새.
그리고 그 다리들의 중심, 한가운데 몸통에는...
"크륵... 크륵.... 크하... 크르르륵."
크기 3m가량 되는 마름모꼴 유선형의 기계몸체.
그곳에서 뻗어나온 금속 촉수들이 말 그대로 <무언가>를 얽어삼키다 못해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알아본 누군가가 신음성을 토했다.
"구스트..."
"대체 저건 뭐야."
몇몇이들이 탄식을 토할때 정신차린 몇몇이 주변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등신들아 뭐해! 쏴!"
하지만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드르르르륵!
콰가가가가가가가각!
콰드드드득!
"우아아아악... 커헉!"
"이런 제기라아아아알!"
투타타타타!
타타타타!
여덟개의 다리, 수십 수백정의 화기.
이에서 터져나오는, 그야말로 노도와도 같은 탄환의 폭풍에 입구쪽에 있던 이들이 쌍욕을 내지르며 응전했다.
**
...!!
...!!!!!!!!
쿠르르릉!
"대체 무슨..."
온 지하를 그득 메우는 격발음.
간헐적으로 쿵쾅거리는 소리.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비명성.
강태석의 주변, 폐허에 모여있던 이들의 얼굴에 불안이 들어찼다.
누가 봐도 아까전보다 훨씬 심상치않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아까전 지하 공동망을 그득 들어메웠던 것이 공포라면... 지금 온 사방을 메운것은 죽음.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그들의 주변, 전후좌우로 쫙 뻗은 온 통로들을 빈틈없이 메운다.
피할곳도, 도망칠곳도 없이.
이에 짓눌린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뭉쳐들었다.
마치 몸을 바짝 움츠리는 고슴도치마냥.
그리고 그속,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 앞에 떠오른 시스템 알람때문.
<경고. 변이 센티널 출현....>
<센티널은 이 근방에 출현하지 않는 종입니다. 사람들의 대처능력이 떨어집니다.>
<추정레벨 15... 등급 UNIQUE.>
<지극히 위험합니다. 탈출을 권장합니다.>
센티널.
여덟개의 다리와 금속 갑각으로 전신을 감싼 기계병기.
다리의 길이만 8m, 체중 17t.
스캐럽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워머신.
자유롭게 움직이는 여덟개의 다리로 인간의 무기와 탄환을 빼앗아가며 끊임없는 살육을 벌인다.
예전 게임에선 저거 하나 방어선에 잘못 뚫렸다가 작은 도시 하나가 몰살당한 적이 있을 정도.
그리고 도망칠 곳도 없이, 폐쇄된 공동안에 갇힌 지금은?
'다 죽는다.'
강태석이 감았던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레벨 10 이전까지는 어지간하면 머리수 앞에, 화망 앞에 장사없다.
하지만 항상 말하지만 이를 넘어서면 총기가, 머리수가 의미없어지는 격차가 발생한다.
예전 세피로트 타워에서의 나노장갑을 입고 날뛰던 금발사내나 지금의 센티널같은 녀석이 그 경우.
심지어 센티널은 감정도 없이 살육에 특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때보다 더욱 질이 안좋다.
잠시 후.
"저기있는 인질 다들 풀어주고 다시 무장 줘. 그리고 최대한 몸을 숨겨."
"... 아저씨는 어디 가게요?"
이에 강태석이 어둠속, 지하통로로 가며 짧게 대답했다.
"사냥하러."
죽이기 전에 죽여야한다.
다죽기 전에.
철컥.
허리춤의 리벨리온을 찬 강태석이 심호흡을 하며 저 멀리, 비명과 격발음이 터져나오는 어둠속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