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29화 (29/221)

29화

띠익...

띠이이익...

"..."

강태석이 USB로 넷북 화면에 띄워준 캡슐, D-8191의 정보와 진공튜브의 위치를 바라보던 페리트란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핵융합엔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전파방해장치 바깥으로 나간다고?

이는 실로 위험한 도박.

물론 이동식 전파방해장치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장비는 결코 무적이 아니다.

기계병기의 레벨이 지나치게 높으면 전파방해가 뚫릴 확률은 급증.

재수없어 그렇게 되어 사방에서 그런 놈들이 줄줄이 달려들기 시작하면 보낸 탐사대는 모두가 몰살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이 근방에 제법 많은 쉘터들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것도 그들의 <대장>을 비롯한 몇몇이 목숨걸고 그런 고레벨 병기들을 유인해 도시외곽, 혹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흩어내거나 지반을 붕괴시켜 가둬놓고있기 때문.

지하로 간다면 그런것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기까지 별문제 없이 도착한다고 치고... 캡슐의 물자들은 어떻게 확보할 생각이지?"

"이곳 지하공동망, 7섹터 아래로 진공튜브가 지나가. 그곳에 폭탄으로 구멍을 뚫고 내려간 다음 캡슐을 공업단지 아래까지 끌고오는거지. 3km 정도 옮겨야하지만 캡슐에는 비상용 자가동력장치도 있어. 그걸 작동시키면 여기까지 몰고올수 있을거야."

즉 캡슐을 통째로 끌고와 공업단지 아래 지하저장고처럼 만들자는 뜻.

이에 페리트란이 눈을 감았다.

할만한 계획이고 실현가능성도 높다.

어디까지나 기계병기들이란 변수만 없다면.

잠시후.

"인원이랑 장비는 얼마나 필요하지?"

"되는대로."

조용히 처리할수 있는 계획이 아니다.

어차피 실행할거면 전력으로 빠르게.

캡슐을 끌어온뒤 양쪽의 튜브를 무너트려 기계병기들의 출입로를 원천차단한다.

녀석들도 돌무더기까지 파며 돌아다니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잘만 된다면 이 지하에 아주 거대하고 아늑한 물자창고를 하나 장만할수 있을터.

그런 강태석의 말에 페리트란이 눈을 감았다.

잘만 된다면 계획은 깔끔하다.

하지만 뭔가 배가 아프다.

기계병기들의 습격을 받으면 몰살당할수도 있는 일에 자신들의 최대가용전력을 집어넣어야한다고?

거기에 저걸 가져오면 독식할수 있는것도 아니다.

마치 위험하고 힘겹게 누의 사냥을 끝난 치타에게 달려드는 하이에나와 사자, 독수리들마냥.

쉘터와 피난민들이 모조리 달려들어 결과를 아름답게 공유하리.

"... 조금 속이 상할거같은데. 디테일을 추가해야겠어."

"그렇지?"

강태석이 웃었다.

**

1시간 후.

퍼억!

"배고파서 한짓이라 생각하고 한번만 봐주겠다. 꺼져."

쇠밧줄을 푼뒤 걷어차 쫓아내는 무장병사내, 군터의 행동에 강태석을 습격하려다 풀려난 피난민들이 눈을 희번득거렸다.

자신들도 세력이 없다뿐이지 나름 독하게 살아온 녀석들이었기에.

하지만...

"다음부터... 조심하지."

무심하고 투명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장병사내와 뒤, 군인들의 모습에 피난민 사내들은 조용히 무기를 돌려받고 침을 꿀꺽 삼키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눈동자를 본순간 알수 있었기에.

자신은 저들 <쉘터>민들을 습격하려고 했다.

사람은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될때 가장 잔인해지는 법.

저벅.

저벅저벅.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정말 살려서 보내주기 싫다는듯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빠르게 걷던 피난민 사내를 향해 옆의 한명이 물었다.

"아니 켄. 그런데 어쩔거야. 우리 군파츠 쉘터랑 약속한게 있잖아.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면 죽는다고."

"썅.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나도 안다고."

켄이라 불린 사내가 옆의 녀석의 칭얼거림에 낮게 쌍욕을 내뱉었다.

자신도 안다.

아직 군파츠 쉘터와의 계약이 있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페리트란 쉘터가 숨겨놓은 무언가를 파악할것.

그런게 없더라도 어떻게든 피난민들의 분위기를 몰아가 페리트란 쉘터를 공적으로 만들것.

한데 두가지 다 실패한 상황.

두번째는 어떻게든 시도해볼수 있겠지만 아까전 눈동자를 살펴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선동하던 것이 걸리면 이번에는 말 그대로 피난민마을 한가운데 걸려 찢겨죽을수도 있으니까.

예로부터 가장 엄하게 처벌했던 것이 반역, 혁명, 내란죄.

'제기랄.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천막을 지나 지하 공동망쪽 앞을 걷던 사내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때.

다들 조용히. 이쪽으로.

빨리빨리.

"...?"

저멀리서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고개를 돌린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페리트란쉘터의 막사 뒤쪽에서 지하공동망, 으슥한 통로로 향하는 열명 가량의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빈 배낭을 잔뜩 맨체, 조심스럽게 말이다.

심지어 한놈은 이동식 전파방해장치까지 등에 메고 있었다.

전파방해장치가 작동하는 공업단지 안에서는 필요도 없을텐데 말이다!

만약 자신들이 이근처에서 얼씬거리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의 조심스런 움직임.

그리고 이걸 본건 켄이라는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켄."

"... 너희 먼저 가라. 나혼자 갔다올테니까."

"위험해. 또 걸리면..."

"등신아. 그래서 하는 소리야. 다 뒤질셈이냐? 나 혼자 뒤지는게 낫지. 군파츠한테 가서 얘기나 잘해놔. 제대로 하면 우리 가족들은 풀어주는 거라고."

"..."

"여럿 가봤자 걸릴 확률만 커. 빨리 가."

이에 이를 악문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일도 없다는듯 가던 발걸음을 향했다.

잠시후.

스윽.

따로 조심스레 떨어져나온 사내, 켄이 지하공동망 안으로 들어가는 열명 가량의 뒤를 쫓았고...

삼십분후.

쿠르르르릉!

"맙소사.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직경 150m 튜브.

폭탄에 뻥 뚫린 지하공동망 바닥을 지나, 늘어져있는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장소.

그 거대한 구조물의 틈 사이에 숨은 켄이 저 멀리, 이 굵고 두꺼운 튜브를 통째로 틀어막고 있는 타원형의 <무언가>를 향하는 열명의 남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역시 꿍쳐놓은게 있었잖아.'

표정을 굳힌 켄이 몸을 돌렸다.

더 따라가보고 싶었지만 조금 더 나가면 전파방해장치 권역 밖.

하지만 굳이 온전히 확인할 필요는 없다.

저게 뭔지는 자신이라도 단번에 알수 있었으니까.

잠시후.

타타타타탁...

몸을 돌린 켄이 빠르게 위쪽, 자신이 들어왔던 방향으로 어둠속을 뛰었다.

**

1시간 후.

페리트란의 천막 앞은 아까전에 비해 훨씬 더 분주해진 상태였다.

짓쳐들어온 십수개 가량의 쉘터 리더들.

그리고 그들이 끌고온 수백명의 무장민들에 의해!

콰아아아아앙!

"페리트란. 이 쥐새끼. 감히 그딴걸 꿍쳐놓고 있어!"

부랴부랴 반협력상태의 쉘터 리더들은 모조리 모아온 장신의 여인, 군파츠가 급조된 테이블을 박살낼듯 내려치며 으르렁거렸다.

눈 앞,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페리트란을 향해!

그리고 그건 주변의 쉘터 대장들과 무장민들도 마찬가지.

이 개새끼들 진짜. 뭔가 있는건 알고 있었지만...

지들 혼자 천년만년 먹고 살겠다 이거야?

모여든 이들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캡슐>이다!

페리트란네 쉘터민들이 파먹어봤자 티도 안날 정도의 막대한 물자를 담은!

모두가 근근히 아껴쓰고 있는 와중에 그딴걸 숨겨놓다니!

모여있는 이들 전부가 당장에라도 페리트란을 장대에 메달아놓고 사격연습이라도 하고싶은 표정.

아니, 실제로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들이 그러고 있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왜냐하면 페리트란의 양옆에 선 두 존재 때문.

키이이이이이이잉...

치킹...

철커덕...

페리트란의 왼쪽에 선, 거대한 금속팔의 기계 센티널이 흉악한 기계음을 내며 자신들을 겨눈다.

양손 네개의 팔, 수백개에 가까운 금속촉수에 수백개의 개인화기와 미니건을 들고 사방에 탄약을 주렁주렁 쌓아둔 채!

조종사, 아린이 타고있는 콕핏은 이미 개조를 끝마쳐 빈틈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철갑을 주렁주렁 두른 상태.

저 병기가 얼마전 공업단지 한복판에서 보여줬던 난리와 위용을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그들은 섣불리 움직일수 없는 상태였다.

자칫하면 그들 모두가 이자리에서 선채로 갈려나갈 테니까!

그리고 오른쪽.

평범하게 생긴 인상의 사내.

하지만 사람들은 되려 오른쪽을 더욱 신경쓰고 있었다.

풍기는 기세로도 저 녀석이 누구인지 알수 있었기에.

적마인.

그토록 대단해보이던 센티널을 맨손으로 달려들어 때려부수고 해체한 녀석.

어느 정도의 신체개조를 행한 녀석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호가호위.

위풍당당하게 선 둘을 데리고 가운데 태연하게 선 페리트란을 보며 이를 갈던 사람들을 향해 페리트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놈들은 정말 양심도 없구나. 안방에 따듯하게 재워주고 불때주면 됐지 곳간까지 털어 내놓으라고 그래?"

"크흐. 무슨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그래 우리 사이에. 너희가 기부천사라서 내준거야?"

철컥.

손에 들린 개인화기를 한손으로 빙빙 돌리며 이죽거리는 여인, 군파츠의 말에 페리트란이 한숨을 푸욱 내쉰뒤 이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고."

"..."

"우리가 에너지를 나눠주는건 너희말대로 뻗대다 다같이 죽기 싫어서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나눠도 될만하니까 나누고 있는거야. 하지만 물자는 다르지."

페리트란의 희번득거리는 눈동자에 모인 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치솟아올랐다.

이럴줄 알았기에.

자신들도 핵융합엔진이나 공업단지의 자재들을 밀어붙인건 어느정도 다리뻗을 구석이 있기에 밀어붙인것.

하지만 밥그릇은 다르다.

누구도 이걸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다.

심지어 상대는 그 짧은 사이에 막강한 전력을 보충한 상태.

예전에야 힘으로 찍어누르면 됐지만 지금 저것들을 상대하려면 대체 피해가 어느정도 생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상대하려면... 상대할수야 있겠지만.'

가라앉은 눈빛으로 양쪽, 센티널과 적마인을 살피던 군파츠를 향해 페리트란의 한탄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우리도 뭐 배부르게 퍼먹고 있는줄 알겠지만 나름 목숨걸고 다녀오고 있는거야. 곳간이 가득 차있으면 뭐해. 거기까지 가는 길이 험난한데. 우리 쉘터 먹고 살 정도만 야금야금 캐오고 있다고."

"야금야금?"

"그래. 3km 넘는 거리를 왔다갔다하는게 쉬운줄 알아?"

여기까지 들은 순간.

"아 이 개새끼. 페리트란 진짜.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군."

"응? 뭐가? 왜그러지."

이에 우르르 모인이들 앞에 선 군파츠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같이 날라달라는거 아냐. 이 아래까지. 빌어먹을 놈이 이딴 식으로 티나게."

"오 그런 방법이. 근데 그러면 참 좋긴 하겠는데. 서로서로에게."

페리트란이 마주 사납게 웃었다.

**

지하튜브.

쿠르르르르릉...

작업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폭파로 더 넓어진 직경 20m 구멍의 위에 자리잡은 대형 거치형 크레인이 아래로 거대한 덤프트럭과 크레인들을 내려보낸다.

그렇게 굵다란 전선을 주렁주렁 매단 크레인들은 구멍 아래에서 뒤쪽, 약 200m 가량 이동한 뒤 보행중장비들에 의해 단단히 지하튜브 바닥을 파내며 고정되고 덤프트럭들은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가 어둠속을 향하며 대기했다.

그 주변을 그득 메운건 각 쉘터에서 차출된 수백명의 무장병들.

철컥...

폭탄 설치 완료!

이쪽도!

지하통로 입구로 양쪽 250m 위치.

커다란 지하튜브의 천장과 벽면을 따라 매달린 이들이 부지런히 폭탄을 설치하며 사방으로 소리쳤다.

이제 준비는 어느정도 마쳐진 상황.

대형 크레인과 수십대의 덤프트럭들이 저 어둠너머에 있는 <캡슐>을 여기까지 끌고온뒤 양쪽을 폭파시켜 막으면 작업은 끝난다.

문제는 하나.

"야 적마인. 너도 알겠지. 이정도 작업이 대형 전파방해장치 바깥에서 이뤄지면... 반드시 <옵저버>가 온다."

"카트란이다."

"뭐건 이 새끼야. 대책은 있는 거겠지?"

뻥뚫린 천장 오른쪽으로부터 300m.

정확히 대형전파방해장치의 가동범위 경계안에 선 군파츠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태석이 입을 열었다.

조용히, 차분하게.

"재수좋으면 안오지 않을까?"

"아니 이 새끼가 진짜?"

군파츠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