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위쪽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수많은 이들의 고함성에 올라가려던 강태석과 서있던 페리트란, 앉아 널부러져있던 군파츠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당장 나와아아아아!
이어지는 찰나의 정적.
잠시후.
벌떡.
군파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페리트란이 사다리의 손잡이를 강하게 붙잡았다.
누가 들어도 뭔가 사단이 난 상황.
그렇게 둘이 빠르게 올라가려던때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강태석이 성큼 걸어가 한개의 벽면 앞에 섰다.
붉고 푸른 건틀렛과 푸른 액체의 병이 든 케이스 앞에.
이윽고.
쩌어어엉!
후두두두둑!
"어어? 너 뭐해?"
놀라는 군파츠를 향해 창을 빙글 휘둘러 케이스를 깨버린 강태석이 짧게 대답했다.
"느낌이 딱 와서."
강태석은 스스로의 특성을 어느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첫번째, 어떤 때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재수가 없다는것.
두번째, 개판을 감지해내는 능력이 기가 막히다는 것.
지금은 왠지 두가지 다 적용될것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안 해먹으니 걱정마. 일처리 제대로 되면 원래대로 돌려놓을테니."
터어어엉!
터엉!
창을 휘둘러 케이스안을 팽팽히 얽어매고있던 사슬들을 끊어낸 강태석이 안에 묶여있던 청홍투갑과 블루 블러드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잠시후.
우우우우우웅...
쿠르르릉!
긴급좌표지정기의 코드가 담긴 회로형태의 케이스마저 관리자 권한으로 캡슐,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버린 강태석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사방을 처음, 반투명한 케이스의 큐브들로 채워넣은 후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캡슐 위쪽, 지하섹터.
"아이 진짜. 무슨 일이래."
키이잉...
군터를 대신하여 센티널의 콕핏 안에 타있던 아린이 센서를 통해 전해지는 바깥상황을 살피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린의 주변, 화기를 든채 엄중히 지키고 있던 무장병들도 마찬가지.
그들의 눈앞, 수백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려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곳의 공간이 좁아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 바깥에서 소리치고 있는 이들까지 감안하면 그 수는 더욱 많을터.
그리고 그게 아린을 비롯한 이들이 당황하고 있는 이유였다.
이들 대부분이 위에 모여있다 짓쳐내려온 피난민들이었으니까.
차라리 참가하지 않은 주제에 콩고물을 노리고 습격해온 타쉘터팀 녀석들이었으면 그냥 시원하게 갈겨버렸을텐데 그게 아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터어엉.
"무슨 일이야."
"아 다들 올라왔어?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자꾸 책임자 불러오라고 난리인데."
이에 사다리를 올라온 페리트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현재 자신들에게는 대표자라 할 이가 여럿 있었지만 당장 불러오라는 책임자에 가장 부합해보이는건 자신.
그리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듯 페리트란이 나타나자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좌악 가르며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고.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페리트란의 표정이 삽시간에 착 가라앉았다.
누구인지 헷갈릴 일도 없었다.
이번 캡슐확보작업에서 대놓고 불참을 선언했던 쉘터장들.
그중 가장 앞에 선, 장년의 사내가 페리트란을 보며 여유로이 웃었다.
"페리트란. 놀랐어. 설마 그런걸 감춰놓고 있었다니 말이야."
"...?"
"뭘 그런 표정을 짓지? 배 말이야. 배."
순간.
"배?"
"쯧."
'결국 들켰네.'
의아해하는 군파츠 옆, 사태를 지켜보던 강태석이 작게 혀를 찼다.
**
장년 사내가 수하로부터 받은 보고는 간단했다.
지하에 수상한 공간이 있다고.
터를 잡으면 가장 먼저 해야할것은 주변 정보의 확보.
장년 사내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지하공동망으로 보냈던 이들은 지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이내 이상한걸 깨닫게 된다.
입체적으로 그려진 지도의 군데군데를 요상한 철판벽들이 틀어막고 있었던 것.
사실 철판벽 자체야 도시가 함락될 때 생존자들이 도주로 확보를 위해 세웠다고 한다면 이상할거야 없었지만 어떤 <구역>을 통째로, 단 하나의 빈틈도 없이 틀어막아버렸다면 이건 이상한 일이 된다.
생존자도 사람인데 들락날락할 공간은 있어야할것 아닌가.
자기 무덤을 짜려고 안쪽에서 통째로 막아버린게 아니라면 이건 분명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감춘 구역.
탐사를 진행하던 이들은 그즉시 만만한 철판벽 하나를 골라 작게 구멍을 뚫은뒤 광섬유케이블을 집어넣어 그 안을 살폈고 이내 놀라운걸 발견하게된다.
"이야. 정말 놀랐다고. 그런걸 만들고 있었다니."
위쪽, 피난민 임시거주 보호소 한가운데 중앙천막.
임시로 만들어진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장년사내가 페리트란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정말로 놀랐다.
설마설마 꿍꿍이가 있을줄은 알았지만 숨기고있던게 그토록 거대한 육상장갑전차, 아니 <배>였다니!
심지어 언제부터 준비한건지 몰라도 그 배는 거진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태였다.
거대한 크기, 육중한 외양.
페리트란이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는건 누가 봐도 알수있었던 상황.
어쩌면 핵융합엔진도, 캡슐도 모두 이를 감추기위해 뿌려놓은 떡밥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리.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저건 페리트란의 약점이자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의 열쇠라는걸.
그때의 환희를 떠올리며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장년사내가 자신의 옆에 앉은 쉘터장들을 훑어본뒤 건너편의 페리트란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뭐. 그런걸 만들고 싶을수야 있어. 이 답답하고 거지같은 도시를 떠나고 싶을테니까. 한데... 아무리 봐도 그걸 움직이려면 일반 엔진가지고는 안될거같단 말이지?"
"..."
"그래서 어느순간 합리적인 추론에 이르렀지. 아... 공업단지의 균형자를 자처하는 우리 정의의 페리트란 이 작자가 어느날 배를 완성시켜 야반도주를 할 생각 아니었을까? 완성시킨 배에 핵융합 엔진이랑 아래 캡슐의 물자를 모조리 싣고... 너희 쉘터랑 이번에 붙어먹은 그 추종쉘터들만 바리바리 데리고 말이야."
장년사내의 미소가 정점에 달했다.
사실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하나.
만약 그렇게 되면 여기 모인 피난민들은 모조리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다는것.
물자도, 에너지도 모두 잃은채 이 황량한 도시에 남아 죽음을 기다려야한다는것.
그게 지금 자신과 쉘터장들 뒤, 임시로 차출된 47명의 피난민 대표들이 분노하다못해 증오에 가득찬 눈길로 테이블 건너편의 페리트란들을 노려보고 있는 이유.
콰앙!
"이런 썅. 나도 몰랐다고!"
장년 사내의 말과 피난민들의 시선에 열받아 테이블을 으스러져라 내려친 군파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페리트란을 향해 속삭였다.
터져라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꽈득 쥐며.
"페리트란 이 새끼야.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저게 사실이야?"
솔직히 배신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합집산의 결집체라고 해도 함께 싸웠던 동료.
거기에 자신은 반발마저 무릅써가며 이놈들을 전폭지지했다.
앞으로 함께 해볼만한 녀석들이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한데 저딴걸 아래 몰래 숨겨놓고 있었다니.
거기에 저놈들은 지금 자신과 자신들 쉘터를 페리트란과 붙어먹은 취급하고있지만... 페리트란 이 새끼가 사실 자신들마저 버려버릴 속셈이었는지 어찌 안단말인가.
잠시후.
"단도직입적으로 가자. 뭘 원하지?"
침묵을 깬 페리트란이 군파츠를 무시하고는 건너편 장년사내를 향해 말했다.
저녀석들이 지금 자신들이 느낀 배신감과 상처를 치유해달라고 이자리를 만든게 아니다.
본질은 하나.
그리고 그런 페리트란의 덤덤한 태도가 다소 의외였는지 이채를 띄던 장년사내가 이내 웃으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뭐 간단해. 배는 너희 가져. 우린 그딴거 상관없어. 그런 장난감 완성시키든 말든 알아서 하라구."
"..."
"단."
타앙.
빙글빙글 돌리던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리찍은 장년사내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핵융합엔진이랑 캡슐. 그건 어림도 없지. 당장 그 주변에 배치해놨던 너희 병력들 빼. 앞으로 그 두가지는... 우리 <연합>이 관리한다."
너희가 발견했지만 이제부터 너희의 것은 아니다.
너희에게 권한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진다.
왜냐면 상황은 반전되었기에.
쏠리던 무게추는 붕괴되었고 힘과 명분, 모두 자신들에게 넘어왔기에.
분노한 수천피난민들을 대리하는 47인의 임시대표.
그앞에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십명의 쉘터장들.
그들의 가장 앞에 자리한 장년사내가 천군만마를 등에 엎은 느낌으로 페리트란을 보며 다리를 꼬고 웃었다.
**
하루아침에 상황은 반전되었다.
캡슐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군파츠를 비롯한 참여쉘터들의 강한 지지를 얻어내며 순식간에 공업단지, 범접불가의 세력으로 부상했던 페리트란 쉘터의 전성기는 화무십일홍, 채 하루도 가지않아 끝났다.
페리트란네 쉘터는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고 이는 새로 만들어진 <연합>에 넘어갔다.
그뿐이랴.
페리트란을 지지하던 쉘터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페리트란네는 핵융합엔진을 탐낼수도있다는 명목으로 공업단지 중심부에서 순식간에 외곽, 가장 위험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모조리 쫓겨나야했다.
그들이 제일 처음 이곳 공업단지를 향하며 가져왔던 물자들.
그리고 간신히 껍데기만 완성된 <배> 한척만을 지닌채.
<으하하하. 그건 너희가 가져가라고. 여기에 그런 쓸데없는건 둘 공간도 없으니 말이야.>
쿠르르르르릉!
지하에서 지상으로.
공업단지 외곽 금속대지 위.
널찍한 공터 한가운데, 덤프트럭들에 이끌려 황량하게 내던져진 배 오시리스를 바라보던 강태석이 주변을 향해 짝짝 박수를 쳤다.
"자자. 하던거 마저 합시다."
강태석이 보행중장비 옆, 침묵을 지키고 서있는 빌더들을 향해 외쳤다.
아래 구동계나 전체적인 골격, 외장등은 어느정도 갖춰졌지만 아직은 미완성.
제대로 된 배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좀 더 작업을 진행시켜야한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이에 도달할 터.
그리고 그런 강태석의 말에 침묵을 지키던 이들은 뭔가 말하려는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보행중장비들에 탑승했다.
생각이 복잡하니 일단은 하던 일이나 마저 하겠다는듯 말이다.
이윽고.
키이이이잉...
키이이잉...
달리안의 컨트롤 아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경쾌하게 움직이며 이리저리 배의 작업을 진행해가는 보행중장비들을 바라보던 강태석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너스빌.
"정상에 있다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내려왔군. 기분이 어때?"
"정상? 내가?"
이에 기분전환이나 하라고 농을 건네려던 아너스빌이 혀를 차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몰랐단 말인가?
이미 공업단지 전체, 알만한 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말이야 페리트란이 대표지, 실세는 저녀석이라는걸.
지지쉘터들의 수장, 군파츠를 격없는걸 넘어 막 대하고 이곳 공업단지 화력의 정점인 센티널의 주인을 마치 오리새끼마냥 졸졸 데리고 다닌다.
지상의 <적마인>을 목격했던 이들은 그나마 양반이고 지하의 <검은 무언가>를 직접 겪었던 이들은 아직도 가끔 밤잠을 설치며 발작하듯 깨어난다.
죽음이란 죽음에 산전수전은 다 겪은 이들이 말이다.
그나마 티가 안나는 이유는 이녀석이 제 할일에만 집중하는, 세력이고 뭐고 아무런 관심없는 타입이었기때문.
하지만 알걸 아는 이들은 녀석앞에 서면 기가 눌리다 못해 숫제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못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 득의양양하게 웃던 연합의 새로운 수장, 장년사내마저도 말이다.
'하긴 뭐. 그래도 머리수에 장사없긴 하지.'
어깨를 으쓱한 아너스빌은 눈앞의 강태석을 보며 물었다.
"이제 어쩔거야?"
지지도, 신뢰도 많이 꺾였다.
예전 헛기침 한번으로 공업단지 전체를 들썩이던 시절은 가고 지금은 그들 쉘터 내부에서마저도 드문드문 성토의 목소리가 솟구쳐나오고 있다.
지금에라도 저 우스꽝스러운 <배>의 건축을 포기하고 연합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야하지 않겠냐는 것.
그도 그럴것이 핵융합엔진도 없고 배에 실을 물자도 없다.
설령 배가 만들어져도 출항은 어림도 없다는 뜻.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배를 완성시키겠다고 그나마 챙길수 있는 약간의 권리들마저 모조리 포기하고 나왔으니 보는 이들은 답답할 수밖에.
그리고 그런 아너스빌의 말에.
"글쎄. 난 고민할게 없는데."
"...?"
짧게 대답한 칠채영창을 가지고 있던 강태석이 기지개를 쭈욱 펴던 그때.
….
… 저긴가보군. 아하하!
저멀리, 중심쪽에서 그들이 선 배로 웃으며 걸어오는 일련의 남녀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