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페리트란 녀석. 썩 좋은 위치에 살고있진 않았군."
공업단지, 중앙.
페리트란네 쉘터들이 철수한 자리.
그곳에 새로이 자리를 틀고 주변을 둘러보던 장년 사내, 칼슨이 아까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페리트란과의, 일방적 통보에 가까운 협약.
이어 등장한 사내.
시대착오적인, 우스꽝스러워보이기까지 하는 창을 가지고 등장한 사내를 본 순간 칼슨은 본능적으로 알수 있었다.
이녀석이 그, 유명하다못해 믿기 힘들정도의 소문을 공업단지 전체에 퍼트리고 다니는 그녀석이라는 걸.
지위, 명성, 역량.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마주본순간 그냥 생물대 생물로 짓눌리는 느낌.
그 느낌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칼슨뿐 아니라 뒤에 서있는 쉘터장들, 이를 호위하는 수백 쉘터민들과 무장피난민들 모두가 스스로의 압도적인 우위를 알면서도 긴장하여 손의 화기를 움켜쥐고 상대를 노려봤어야할 정도였다.
뭐 결론은 의외로 싱겁다 못해 허무하게 끝났지만.
<손줘봐.>
<뭐?>
<캡슐 관리자 권한 건네줄테니. 축하한다.>
"..."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칼슨이 불쾌하다는듯 마주잡았던 손을 꽈득 쥐었다 폈다.
이겼는데도 기분이 찝찝하다.
분명 패배한 녀석들이건만 왠지 잠자리가 사나울 느낌.
'역시... 처리해야하나.'
칼슨이 중얼거리던 그때.
촤아악.
"칼슨. 바깥의 피난민들이 난리입니다. 당장 캡슐을 풀어 자신들에게 약속한 물자를 배분해달라는."
"..."
들어온 수하의 보고에 안그래도 정신사납던 칼슨이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캡슐 내부를 자유자재로 운용할수 있는 관리직 권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를 건네받아버렸다.
거기에 현재 피난민들의 신뢰는 바닥을 치고있는 상태.
모두가 <당장> 자신들의 몫을 받아 챙겨둔뒤 쟁여두길 원한다.
애초에 자신이 캡슐에 물자를 묶어둔다면 페리트란 그 녀석이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선동했으니 당연한 결과.
페리트란은 나름 쌓아온 신뢰가 있었기에 물자를 움켜쥐고 풀고 쥐는걸 마음대로 할수 있었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물자분배권은 자신이 가장 탐내던 권한이었으니 짜증날수밖에.
"... 그래도 좀 미룰수없나."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칼슨을 향해 들어온 수하가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안정된게 아닙니다. 아직도 페리트란네를 두고 망설이는 피난민들이 많아요."
"..."
칼슨이 혀를 찼다.
그렇다.
페리트란네는 마지막에 실수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계속 행동으로 보여줬다.
에너지를 공급하고 공업단지에 균형을 잡았으며 물자를 가져오고 나름 골고루 챙겨줬다.
어찌 되었건 믿을만한 모습을 계속 보여줬다는 의미.
반면 자신들은?
피난민들은 초반에 자신들을 지하공동망에 가둬놓고 게임을 진행했던 쉘터들이 누군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잊으려고 해도 잊을수 있는 경험들이 아니었으니까.
버려지고 굶어죽을 것에 대한 공포, 배신감에 의한 분노로 자신들에게 붙긴 했지만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된 관계는 아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약속한 물자마저 주지 않는다면 폭동이 일어나고 간신히 잡은 우위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터.
"후우. 제기랄. 그래 풀어. 그리고 각자 자리 단단히 지키라고 하고. 아직 축제 분위기 낼때는 아니니까."
"저 그게..."
"?"
칼슨의 직시에 말을 망설이던 수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미 몇몇 혈기왕성한 녀석들이 그쪽으로 향한것 같습니다. 칼슨의 자식들도..."
"후우. 으아아악 진짜!"
콰아아아앙!
결국 참지 못한 칼슨이 성질이 나서 자신 앞의 철제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
"직접 보니 진짜 웃기는군. 저걸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지?"
걸어온 십수명의 남녀들이 대지 위, 덩그러니 지어지고 있는 육중한 <배>를 보며 웃었다.
아니, 육상전차라 그런지 어찌보면 배같고 어찌보면 자동차같다.
고급유람선, 혹은 앞이 길쭉하게 뻗고 뒤는 둥근 고급세단을 닮은 외양.
외장은 마치 유선형의 동체를 깎아만든 것처럼 매끄럽게 이어져있었지만 앞부분에는 갑판부로 보이는 곳이 드러나있었고 아래로는 거대한 캐러필러가 유선형의 동체 밑으로 감춰져있었다.
고급자동차같기도 하고 공기저항을 최대한 덜받기 위해 설계된 초고속 자동차와도 비슷하다.
다만 본닛부위에 갑판이, 운전석 부분은 몸체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크기가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미완성되었음에도 그 유려함과 거대함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크기가 거대하기에 더욱 웃기다.
저건 그저 커다란 고철덩어리에 불과하기에.
"엔진이 없는데 어떻게 가려고. 돛이라도 달게?"
"아니 애초에 이제 여기만한 곳이 없을텐데 왜 떠나려는거야."
뒤쪽으로 우르르, 수십이 훌쩍 넘어보이는 추종자들을 끌고온 십수명의 남녀들이 배를 보며 함께 웃고 즐겼다.
그들 모두가 각 쉘터에서 요직을 맡고있는 이들의 자식들.
그리고 그들의 말또한 일가견이 있었다.
온 전선이 무너진 시대.
거의 최후방에 가깝던 그들의 도시가 무너지던 때쯤 이미 연방과 다른 곳에서도 심상찮은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곳에 가도 이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거라는 의미.
심지어 그곳이 나름 멀쩡해도 문제다.
용꼬리보단 뱀머리.
자신들이 거기가면 지금, 저기 애처로이 모여든 피난민들 신세꼴밖에 더되겠는가.
하물며 이곳에 빛이 들어오고 물자가 넘쳐나기 시작한 지금은 더욱 떠날 이유가 없다.
그리고...
"..."
하암.
하품을 하며 모여든 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것을 보던 강태석은 신경을 끄고 자신의 손에 들린 창에 집중했다.
칠채영창.
아름다운 빛을 우렁우렁 뿜어내는, 보석과도 같은 창이지만 그 정체는 마병.
아무리 인조라고 해도 다이아몬드를 통째로 써가면서까지 빛을 봉인해두었던게 그 증거다.
조금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녀석.
꽈득...
전투강갑 2단계까지 동원해가며 빛을 짓누르던 강태석이 그상태로 창을 한번 휘둘러볼까 하던 그때.
저벅.
"너구나."
"?"
"사실 여기 온건 너때문이다."
"?????"
갑자기 철판위를 저벅저벅 걸어와 말을 거는 청년을 강태석이 빤히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급발진?
그런 강태석의 의아한 표정이 맘에 안들었는지 입술을 씰룩인 청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가나본데. 네가 준 코드로 캡슐목록을 확인해보고 왔다."
"아."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는 표정을 짓는 강태석을 향해 청년이 사납게 내뱉었다.
"귀한건 모조리 털어갔더군. 몽땅 내놔. 그건 너희 것이 아니라 연합의 것이니까."
"몽땅?"
"그래. 몽땅. 일곱개 다."
"..."
'그건 좀 억울한데.'
일곱개가 아니라 넷.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
망연록은 유실.
긴급좌표지정기는 그안에 놔두고 왔지만 아마 회로에서 데이터 추출을 하는 법을 몰라 텅빈 케이스로 여기는듯했고.
마수란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피땀흘려 처리했거늘!
네개를 가져온건 사실이긴 하지만...
'줘도 나머지 세개까지 내놓으라고 하겠지?'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창을 비스듬히 다리사이에 세우고 턱을 기댈뻔했다.
사실 줘도 그만이다.
시간은 강태석의 편이기에.
예전 <노아>는 신에게 홍수가 터져나올것을 미리 예지받고 비웃음을 사면서까지 방주를 만들었다고 했던가?
자신도 마찬가지다.
신에게 점지받은건 아니지만 게임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안다.
차례차례 게임속 <마스터피스>, 즉 세피로트 타워의 여의나 핵융합엔진들을 그러모으게 되면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 다음 단계들이 진행되고.
그렇게 진행된 인과들은 마치 나비효과가 태풍을 불러오듯 이세계 구석구석, 해당지역에 거대한 멸망 혹은 죽음을 불러온다.
속칭 <이벤트>라고 하는것들.
<현재 멸망 진행... 79%>
띠릭.
눈앞에 떠오르는 창은 이 행성 전체의 종말을 가리키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벤트>가 발생하면 국지적인, 지표의 생명체들이 감당하기 힘든 무언가들이 휘몰아치며.
결국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 게이지가 100%로 차기전 생겨날 수많은 <이벤트>들을 뚫고 진짜 방주, 노아에 도달해야한다.
그 말은?
어떤 형태로건간에 <홍수>와 같은 형태의 재앙은 이 세계를 덮칠 것이고.
그때는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며 비웃던 이들은 허겁지겁 자신이 만든 배를 타기 바쁠거라는 의미.
다만 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정말 정신병자, 혹은 불온분자 취급을 받을거기에.
홍수가 날거라고 배를 만들며 떠들던 노아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가?
그저 자신은 묵묵히 배를 만들며 기다릴뿐.
마치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 <이벤트>는 어디서 시작되려는거지? 어떻게?'
"이 새끼야! 대답안해!"
소리치는 녀석을 무시하며 귀를 후벼판 강태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도시 저너머, 폐허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
웜즈씨, 내부.
스르르륵...
스르르르르르륵...
등과 허리에 거대한 창과 태도를 멘 소년이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사방을 그득 메우던 은빛 벌레들이 스르르륵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저 얕게 바닥을 메우고있던 수준이 아니다.
콰르르릉!
소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름모꼴의 공간 위로 수십미터, 어마어마한 양들의 은빛벌레들이 수직장벽을 이룬채 햇빛을 가릴 정도로 넘실거렸다.
마치 홍해를 가른 모세마냥 말이다.
그리고 그 막대한 압력을 감당해야하는건 오로지 소년의 몫.
"후욱..."
'죽겠군.'
갈라진 은빛 바다사이를 걷던 소년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압력에 식은 땀을 흘렸다.
깊은 해저의 수압이 전신을 짓누르는듯한 느낌.
이게 웜즈씨.
압력에 짓눌리는 순간 밀어내던 녀석들이 모조리 덮쳐든다.
그러면 그걸로 끝.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이 보았던 푸른 빛의 근원지가 코앞이다.
저벅.
쿠르르릉!
압력을 밀어낸 소년이 다시 한걸음 내딛은 순간.
파아아아악...
앞의 은빛벌레들이 촤르륵 흩어지며 녀석들이 가리고 있던 예의 그 푸른 빛이 은빛바다 수십미터아래, 햇빛이 잘 들지않는 갈라진 틈 사이를 그득 메웠다.
소년의 눈 앞에 드러난건... 무표정한 눈으로 쪼그리고 앉은 두명의 소녀.
그리고 그뒤, 직경 3m에 달하며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는 구체.
하지만 중요한건 그 안의 <무언가>.
오싹.
알과 같은 구체 안.
넘실거리는 푸른 액체 안에 잠들어있던 소년이 눈을 뜸과 동시에 거대한 태도를 허리춤에서 뽑아든 소년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다만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런 소년의 머리속으로 울려퍼진, 냉소섞인 즐거운 한마디.
<넌... 그놈이랑 달리 운이 없구나. 타이밍이 안좋아.>
"!!!!"
그와 동시에.
!!!!!!!!!!!!!!!!!!!!!!!!!!!!!!!!!!!!!!
구체밖을 향해 천천히 내뻗어진 손.
이어 천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을 동반하며 터져나온 푸른 섬광이 그대로 알의 밖에 선 소년을 휩쓸었다.
**
쿠르르르릉...
"...?"
어딘가, 아주 멀리서 터져나온듯한 폭음에 강태석이 눈매를 좁혔다.
이어 떠오르는 창 .
<이벤트 발생>
<망국의 왕>
그걸 본 순간.
"후우. 흐아아아. 하하하하."
"...??"
"너나 나나. 진짜 재수가 없구나. 크흐."
벙찌는 청년, 그 앞으로 벌떡 일어선 강태석이.
쿠구구구구...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는 금속의 대지 전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