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공업단지 전체, 금속의 대지가 무언가의 탄생을 예고하듯 짧게 떨어울렸으며.
쿠르르르릉...
아니, 공업단지뿐만 아니라 어쩌면 도시 전체가.
이를 듣고있던 강태석의 눈 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벤트 발생 : 망국의 왕>
<기계장치의 신과 계약을 맺은 왕이 잃어버린 심장을 되찾고 육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일어섭니다.>
뭔 말인지 정확히 이해는 안가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모든 이벤트는 말도 안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
"달리안. 아직 멀었어?"
고개를 돌려 강태석이 뒤쪽으로 크게 소리치자 저 멀리서 작업을 진행하던 달리안이 고개를 빼꼼 들며 대답했다.
"음? 두시간은 더 걸릴거같은데요. 이거 급한거였어요?"
"..."
"아니 하도 여유있게 앉아있길래."
"..."
두시간.
적지 않은 시간이다.
"움직여야할거같은데... 일단 너희도 가자."
"어? 어어어어? 뭔 소리야? 어디로?"
벌떡 일어나 앞장서는 강태석의 말에 청년과 십수명의 남녀들, 추종자들 모두가 당황했다.
**
도시 바깥.
쿠르르르릉...
"허억.... 후우."
길이 5m, 그 길이만큼이나 두터운 기갑창을 방패삼아 푸른 섬광을 막아낸 소년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간신히 막아내긴 했지만 묵직한 충격.
그런 소년의 앞.
저벅.
어느새 푸른 구체 안에서 걸어나와 두 소녀 사이로 선 금발의 소년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녹아내린 오른팔.
너무나 나약했기에 스스로가 쏘아보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아주 천천히 재생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꾸물꾸물...
"... 역시 육신을 완성시켜야해."
타탁!
터어어어어어엉!
뒤쪽, 자신을 놔두고 땅을 박차 도망치는 상대를 흘긋 보던 금발 소년이 이내 무시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릉!
쿠릉!
은빛 바다를 가르고 있던 상대가 사라지자 주변을 그득 채우던 로봇벌레들이 무너지며 빈자리를 채우려고 했지만 금발 소년이 손을 들어올리자 마치 길을 비켜주듯 넘실거리며 소년에게 하늘의 광경을 비춘다.
노을지는 붉은 하늘.
이를 보며 소년이 눈을 감으며 기억을 회상했다.
분명 나라가 무너지며 자신은 죽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돌아온 의식.
제단 지하에 있던 자신에게 실험체라는 녀석들은 인간을 잡아와 그 육신을 제물로 바쳤고.
이와 제단 위의 푸른 빛, 핵융합엔진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자신은 서서히 자라나며 소생해갔다.
비록 중간에 난입한 <그놈> 덕분에 엔진은 빼앗기고 제물도 끊겨 미완성의 육체로 나와야했지만 말이다.
일단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육신을 완성시키기 위한 더 많은 제물.
그리고 <심장>이 되어줄 핵융합엔진.
"자 가자 얘들아."
금발 소년이 손을 움직인 순간.
쿠르르르릉!
꾸물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 은빛의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공업단지, 중앙.
"너너너... 미쳤어? 이러면 전쟁이야!"
전투강갑 3단계.
전신무장 흰갑옷에 손에는 길다란 영창.
마치 중세시대 기사같은 형태로 중무장한채 홀로 걷는 강태석의 거침없는 발길에 되려 옆에 있는 남녀들이 당황했다.
녀석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았기에.
공업단지 중앙, 핵융합단지.
그런 이들의 말에 얼굴마저 중갑으로 가리고 있던 강태석이 웃었다.
"왜. 나혼자 돌발행동 하는건데 좀 어때서."
페리트란 쉘터는 움직이지 않는다.
당장 페리트란이 움직이고 싶어도 쉘터내부 인원들 자체가 흔들리고 있을테니.
개인적으로 도와줄수 있는 아린이나 군터도 움직이지 않는다.
현재 대치상태에서 위협적인 무장병력이 움직이면 연합도 과민반응할테니.
다만 홀로간다.
그리고 홀로가도 상관없다.
현재 온 세상, 온 시대가 자신의 편이니.
어어? 저거 뭐야?
저거 적마인 아냐?
철커덕.
철컥.
공업단지 한가운데를 향해 관통해 걸을 때마다 사방에 모여있던 쉘터, 혹은 피난민들이 놀라 튀어나온다.
누군가는 손에 무장을 한채, 누군가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누군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사방의 시선이 휘몰아치며 사람들이 모여드니 어느덧 주변에 모인 이들만 해도 수백, 수천.
그런 이들의 시선속, 강태석이 계속해서 중앙으로 걸어가던 그때.
저벅.
"적마인. 선을 넘는구나. 너를 건드리지 못할거라 생각한거면 오산이야."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우르르 무장한 개인 수하들과 등장한 장년 사내, 칼슨이 길을 막아서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녀석이 무섭던건 페리트란네 쉘터와 그를 지지하던 군파츠 등의 힘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의 민심이 온통 녀석들에게 쏠려있는 것도 컸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녀석은 그야말로 홀홀단신.
군파츠 등도 떨어져나갔고 페리트란네 쉘터도 내분으로 흔들리고 있으며 피난민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현재 온공업단지에서 녀석은 홀로 끈떨어진 연 신세.
키이잉...
대놓고 겨눠지는 수십개의 붉은 레이져포인트들이 강태석의 전신위, 하얀 갑옷을 겨눈다.
그주변에 있던,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있던 십수명 남녀들과 추종자들까지 모조리.
"아빠..."
"닥쳐라.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이. 이런 시기에 적 아가리에 들어가? 네가 제정신이야?"
겁에 질린 청년을 향해 칼슨이 사납게 외쳤다.
온갖 무장세력들을 거느리고 스스로의 무력에도 자신있는 쉘터장들도 지금 적마인의 반경 30m 안에는 홀로 들어가지 않는다.
센티널과의 싸움에도 보여준 실력이라면 그정도는 충분히 녀석의 살상범위 안이니까.
한데 철부지들과 추종자들만 우르르 데리고 녀석에게 겁도 없이 찾아가다니.
지금 저 녀석들이 제법 거리를 두고있다고 하지만 저 손에 들린 창한번 휘둘러지면 모조리 토막나 바닥에 시체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약한 모습 보일수없다. 지금 그러면 다 끝이야.'
주머니, 작은 휴대용 기기를 만지작거리던 칼슨이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인질극에 넘어가면 끝이다.
자식이 녀석의 손에 잡혀있더라도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줘야한다.
어차피 녀석도 목숨이 아까우면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터.
"이따위 인질극으로 네가 원하는걸 얻을순 없다. 돌아가서 네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란 말이다."
"인질극?"
이에 멈칫한 강태석이 뒤를 돌아보고는 웃었다.
"오해같은데. 나 그런거 관심없어. 얘들 그냥 나 따라온것 뿐이라고."
"...?"
"뭐해. 너희 아빠 곁으로 가렴. 어서."
손을 내젓는 강태석의 행동에 멈칫하던 남녀들이 이내 우르르 칼슨과 무장병들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조차 지금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런 강태석의 행동에 되려 칼슨의 눈매나 더욱 좁아졌다.
손에 쥔 패를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그런 칼슨을 보던 강태석이 이내 주변을 주욱 둘러보았다.
공업단지 내부, 모인 수천에 가까운 이들의 시선.
사방에 있던 이들이 모두가 호기심, 혹은 흥미와 의심을 담아 자신이 선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건 취미 없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은 강태석이 사방을 향해 쩌렁쩌렁 소리쳤다.
"다들 잘 들읍시다. 얼마나 정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이곳을 떠날때가 되었습니다."
쿠르르릉...
마력을 담은 한마디가 자신을 주목하는 이들을 향해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요란하진 않지만 묵직하고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은 즉각 터져나왔다.
뭔 소리야...
여길 왜떠나.
설마 진짜 배타고 떠날 생각이었나?
비웃음, 이해안감, 호기심, 조소.
모든 것들이 뒤섞여 강태석의 귓가에 들려왔고.
이 적나라한 반응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라도 이런 이유없는 헛소리를 하면 믿지 않는다.
하지만 강태석은 지금 자신을 믿으라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이제 짓쳐들어올 현실을 직시하라고 할뿐.
<경고. 동북쪽에서 위기가 감지됩니다... 즉시 준비하십시오.>
<경고. 남쪽에서 위기가 감지됩니다... 즉시 준비하십시오.>
<경고. 지하에서 위기가 감지됩니다... 즉시 준비하십시오.>
쉴새없이 강태석의 주변에서 떠오르고 명멸하는 상태창.
그속에 선 강태석이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다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봅시다. 이제 왜 우리가 떠나야할지 알수 있을테니."
그런 강태석의 말에 칼슨은 물론, 주변에 선 모든 이들이 눈매를 좁힌 순간.
파아아아아아앙!
파아앙!
파아아아아앙!
공업단지 사방.
폐허빌딩들 위에서 각양각색의 신호탄들이 하늘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혼잡한 상황속에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던, 각 쉘터들의 척후병들.
그리고 피어오르는 신호탄들은 형태는 각양각색이지만 색깔은 모두 하나.
적색.
1급 위기.
이를 본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
캡슐 내부.
"빨리. 빨리 날라! 우리 몫은 확실히 챙겨둬야한다고!"
"으하하. 이게 진짜 어느정도야."
아까전 강태석과 군파츠가 서있던 중앙큐브에서 쉴새없이 물자를 나르던 이들이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천장을 제외한 다섯면.
그중 세면이 그야말로 물자의 천지였다.
먹을것, 마실것, 무기, 축전팩, 탄약.
마치 보물창고를 발견한 느낌.
쉘터소속이던 그들은 탐욕스럽게 배낭으로 자신의 것들을 쓸어담았다.
놀랍지도 않다.
이미 캡슐 내부를 개미굴처럼 파고들어간 이들이 모두 자신들과 똑같이 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피난민이고 쉘터민들이고 가리지않고 말이다.
다만 찝찝한것은 하나.
"이건 흉물스럽게 왜 여기다 둔거야."
물자를 챙기던 사내 하나가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한쪽면을 바라보았다.
다섯중 셋은 물자.
나머지 둘중 한면은 시커멓게 변해 치직거리고 있는 회로로 가득했고 한면은 보기만 해도 흉측한 모기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툭툭.
사내가 발치의 시체를 신경쓰인다는듯 툭툭 걷어차던 그때.
우우웅...
우우우우웅...
"어어? 이거 뭐야?"
기묘한 소리들과 함께 갑자기 들썩들썩거리기 시작한 시체에 사내가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이윽고.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악! 우아아아아아악!'
시체 아래.
마치 검은 구름처럼 피어나와 사방을 휩쓸기 시작한 작은 모기떼에 사내가 기겁을 하며 비명성을 내질렀다.
**
지상.
아아아아아아악!
우아아아악!
타타타타타타타탕!
타타타탕!
찰나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지상, 공업단지 전체는 이미 아비규환으로 그득 들러쌓인 상태였다.
사방팔방에서 짓쳐들어오는 기계병기들에 의해.
지상에서 솟구쳐온 어마어마한 모기떼들에 의해.
전쟁과 재앙, 죽음과 기근.
마치 인간이 두려워하던 모든 것들이 삽시간에 공업단지의 전체를 휘감은듯하다.
아아악!
싸워! 다들 싸워어어어어!
투타타타타!
모여있던 수천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칼과 총을 들고 분투하던 그 속에서.
"아아... 아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이미 호위하던 무장병들도 모두 사방에서 덮쳐오는 죽음과 싸우기 바쁜 상태.
믿을수 없다는듯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칼슨을 씁쓸하게 보던 강태석은 그대로 장년 사내를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중앙, 핵융합엔진이 있는 곳을 향해.
자신을 따르는 이와 함께.
터어어어어어엉...
터어어어엉...
홀로 걷던 하늘에서 두개의 육중한 무언가가 떨어져내려 양쪽에 섰다.
왼쪽에는 중무장한 센티널이.
오른쪽에는 조금 작지만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뿜어내는 크기 3m의 바디슈트가.
그중 왼쪽에 선 센티널로부터 떨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난... 네 말이 거짓말이길 바랬어.>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걸."
키이잉..
함께 걷기 시작한 강태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전, 자신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아린에게 남긴 한마디.
<준비해. 곧 있으면 떠나고싶지 않아도 떠나야할테니까.>
자신도 얼마나 바랬던가.
최대한 이 상황이 오지않기를.
올걸 알아도 미뤄지고 미뤄지기를.
하지만 예정된 사건은 찾아왔고 이제는 움직여야한다.
그리고...
"오 군파츠. 의리있네."
<시끄러. 아직 속인거 생각하면 열불나니까.>
"속인게 아니라니까. 우리가 아직 안친했던거지."
오른쪽, 바디슈트 안에서 들려오는 군파츠의 목소리에 대답한 강태석이 어느덧 눈앞에 다가온 목적지에 숨을 들이마셨다.
뻥뚫린 지하, 아래.
5m 정도 아래, 푹 파인 지하 1층 공간에 사방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플랫폼과 가운데의 핵융합엔진이 보인다.
이제 저걸 들고가면 그만.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림없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가자."
이에 옆에 있던 센티널과 바디슈트, 아린과 군파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쿵쿵 앞으로 나서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그때.
"멈춰... 멈춰!"
찰그락.
그들의 뒤쪽.
스마트폰같이 생긴 작은 통신기기를 하늘로 치켜들고 버럭 소리치는 칼슨의 외침에 강태석과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