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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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키드드드득...

배 하부, 엔진부.

<믿을수가 없군. 내가... 내가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전신에 수십개의 쇠말뚝을 꽃은채 벽면에 쓰러진 크기 10m의 기계병기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덟개의 굴강한 팔, 자랑하던 수십개의 쇠말뚝과 망치.

단신으로 건물을 붕괴시키고 군대를 쪼개던 위용은 온데간데 없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쪼갠것은... 자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망치와 말뚝, 그리고 여덟개의 팔.

키이이잉...

고개를 들어올린 거구의 기계사내가 눈앞을 바라보았다.

보이는건 푸르게 빛나는 엔진.

그 옆에 선채 자신을 향해 손을 내뻗고 있는 갸녀린 여인.

뚜두두둑...

뚜둑...

여인의 손짓에 따라 그나마 작동하고 있는 두개의 팔이 커다란 쇠망치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겨눈다.

항거할수 없는 움직임.

마치 머리아래, 전신 신경계가 저 여인의 손아귀 안에 들어간 느낌이다.

<그야말로 개죽음이군. 이럴거면 지하에서 단련이나 더하고 있을것을.>

그게 거구병기, <로아니로>의 유언.

잠시후.

콰지지지지직!

휘둘러진 거대한 쇠망치에 머리가 박살난 기계병기가 그대로 전원이 나가며 벽면에 널부러졌다.

남은건 푸른빛 사이, 덤덤히 서있던 여인과 멍하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주변이들.

잠시후.

털썩.

"하악... 허어어억..."

<어어어? 괜찮아?>

"괜찮나 그대."

크앙...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군파츠와 아너스빌, 그리고 크란이 다급히 쓰러진 여인, 달리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며.

"테크니컬이라는게... 이정도였어?"

키이잉...

바디슈트를 입고 다가온 군파츠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인, 달리안을 받쳐들며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곳이라기에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곳으로 왔다.

아너스빌이나 크란도 마찬가지.

한데 이게 왠걸.

막상 저놈이 쳐들어오고나니 할게 없었다.

한껏 긴장하며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작업중이던 달리안이 손을 주욱 내뻗으니 그대로 상황 끝.

보기만 해도 흉흉하던 여덟개의 팔과 쇠망치, 쇠말뚝들이 착실히 꺾여가며 스스로의 몸을 박살내고 으스러트렸다.

'이것도 뻇기는거 아냐?'

바디슈트를 입고 있던 군파츠가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기계손을 내려다보던 그때.

타타타타탁...

입구쪽, 복도에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페리트란, 카티 베이트, 그외의 무장병들.

그중 가장 앞에 서있던 페리트란은 전신이 으스러진 기계병기 사내를 보자마자 곧바로 중얼거렸다.

"로아니로..."

모를수가 없다.

이놈이 당시 자신이 있던 중앙경찰청을 무너트렸던 놈이니.

그런 페리트란의 옆에서 소년, 카티 베이트가 턱을 매만졌다.

"<베티>랑 <노바티라>에 <로아니로>. 세놈을 처치했으니 남은 한녀석이 대장, <그펠> 녀석이군. 녀석이 아마 여기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네."

카티의 말에 옆에 섰던 페리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도시를 무너트렸던, 특무단이라 칭해지는 놈들은 넷.

그펠, 노바티라, 베티, 로아니로.

각자 시청, 무기고, 지하플랜트, 중앙경찰청을 무너트린 녀석들.

넷중 가장 강하고 교활한건 아무래도 그펠이고.

이 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 핵융합엔진부이기에 뛰어내려오면서도 녀석이 있을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데 결과는 의외.

"카트란 그친구가 있는곳에 <그펠> 녀석이 있나보군요."

"까다로운 녀석인데. 지원가야겠어."

결단은 빨랐다.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몸을 날리려던 카티와 페리트란들은 이내 그자리에서 멈춰서야만 했다.

어둠너머, 통로에서 익숙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

쿵쿵...

쿵쿵쿵쿵...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카티와 페리트란들이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녀석, 카트란이 이곳으로 오고있다는 의미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타난 특무단 녀석을 해치웠다는 의미이기 때문.

하지만 점차 가까워지며 어둠속에서 드러나는 상대의 모습을 본순간 카티와 페리트란의 표정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잠시후.

"카트란. 설마... 그놈이 네가 해치운 놈인가?"

"그렇습니다."

커다란 머리를 지고 엔진부에 나타난 카트란의 말에 카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옆의 페리트란도 마찬가지.

이유는 하나.

"... <그펠>이 아니잖아."

콰득.

청홍쌍갑을 낀 카티의 양주먹이 거친 쇳소리를 토한 순간.

치이이이익...

<아아. 들리려나 모르겠군.>

증오스럽고 잊을수 없는 목소리가 선내방송, 그들의 귓가로 울려퍼졌다.

**

선내, 최상층 최후미.

<공중정원>.

쿠릉쿠릉...

쿠르르르릉...

특수하게 제작된 반경 30m 정도의 방 안.

반투명한 외벽에 의해 질주하고있는 오시리스 뒤쪽의 광경이 훤히 보였다.

끊임없이 쫓아오는 은빛 물결과 반투명한 벽면을 타고오르는 수백 수천의 기계병기들을 안쪽에서 바라보는것은 나름 장관.

물론 인간에게는 별로겠지만 방안, 특별한 이들을 위해 제작된 중앙의자에 앉아 창밖 후미를 바라보던 누군가에게는 예외였다.

<새로 태어난 녀석은 제법 쓸만했는데 말이야.>

콰드득.

모두 꺼져버린 네개의 불빛을 바라보던, 정장과 중절모를 잘 차려입은 2m의 장신사내가 손에 들려있던 신호기를 우득 쥐어 박살내고는 등뒤로 휙 던져버린뒤 의자를 빙글 돌려 방안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 보이는건 화려하게 장식된 방과 조각품들.

그리고... 그안에 피투성이가 된채 무릎꿇은 백수십명의 남녀들.

그런 이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장신의 기계사내가 자신의 옆에 묵묵히 선 한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희들을 이해할수 있게되고 가장 좋았던게 뭔지 알아? 사람이 먼저다... 라는 말이야. 암. 사람이 먼저지.>

기계사내, <그펠>이 즐겁다는듯 웃었다.

엔진, 구동계, 갑판, 객실.

모두 이 거대한 <배>의 핵심장치들.

하지만 결국 인간들에게 중요한건 <사람>이다.

이 거대하고 비효율적인 쇳덩어리도 결국 그안의 사람들을 안전하게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

그렇다면 굳이 배를 노릴 필요는 없지않은가.

인간들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지만 때로는 이해할수 없을 정도로 사람에 약하고는 하니까.

'아직 그 기준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펠이 까딱까딱 턱을 매만졌다.

지하에 박혀있는동안 여러 책도 읽어보고 영화도 보며 공부해봤지만 사실 아직 자신은 그 기준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가족? 친구? 연인?

하지만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때로는 가족조차 헌신짝처럼 버리며 때로는 아무 관계없는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이해할수없는 것 투성이.

그렇지만 그펠은 생각을 줄였다.

이해안가는건 나중에 천천히 공부하면 된다.

당장 그펠이 잘 알고있는건... 누가 누구에게 소중한지 모르겠으면 그저 충분히 많이 잡아두면 된다는것.

이 수백명들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 아니겠는가.

<안그래 칼슨? 전시장 나으리.>

"..."

<인간은 과거를 반복하나봐. 그때도 네덕분에 참 쉽게 도시를 무너트릴수 있었지. 다시 봐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알아?>

그 말에 옆에 서있던 사내, 칼슨이 주먹을 꾹 쥐었고.

... 무슨 소리지?

도시를 무너트릴수 있었다고?

피투성이가 된채 무릎꿇고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서로를 보며 웅성였다.

전시장, 칼슨 덕분에 도시를 쉽게 무너트릴수 있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런 이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그펠이 칼슨을 보며 웃었다.

<뭐야. 저녀석들 몰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으하하. 하긴 생각해보니 저녀석들이 알면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을수 있을리가 없지. 그래 지금에라도 좀 말해줄까? 어차피 너는 지금 안전하니까.>

웃던 그펠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던 그때.

타타타타탁.

방송을 듣고 공중정원을 향하는 통로로 나타난 강태석과 카티등을 본 그펠이 의자에 앉은채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아 잠깐. 다들 거기서 멈춰. 이게 뭔지 알아?>

띠익...

띠이익...

보기만 해도 불길해보이는 스위치.

이에 멈춰선 카티등을 보며 그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래. 이걸 누르면 이방부터 시작해서 배 각부의 폭탄들이 터지게 되어있지. 기억나지? 너희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을때 나도 좀 바쁘게 움직였지.>

그펠의 말에 카티와 페리트란들의 이마에 힘줄이 파직 솟았다.

어찌 모르겠는가.

가시철창, 전갈꼬리, 쇠망치.

하나같이 위협적인 무기들.

하지만 인간이 개발한 근현대사 최고의 무기는 화약이라는걸 다시한번 증명한 녀석.

그펠.

녀석이 설치한 기계폭탄에 의해 그날 수천명이 죽고 도시의 방어기반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그런 이들을 향해 이어지는 라펠의 말.

<배가 멈출지 안멈출지는 나도 몰라. 대체 무슨 수로 저 폐허더미에서 이런걸 만든건지 제법 잘만들었더라고. 하지만 이 배가 커다란 관짝이 될거라는것 정도는 내가 보증하지.>

여유로이 웃는 그펠의 말을 증명하듯 그들이 선 군데군데에서 붉은 빛을 깜빡이는 작은 기계거미들이 치키덕 소리를 내며 그들을 응시했고.

이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멈춰선 이들을 보며 그펠이 웃었다.

안타깝고 가련한 것들.

그렇기에 자신은 인간을 이해하게 된것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이 우스운 꼬라지를 즐기지 못한채 마냥 학살만을 즐기던 과거 기계시절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러운가.

인생, 아니 기생? 절반을 손해본 느낌.

녀석들은 이렇게 망설이다 차례대로 죽어갈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내린다.

과거, 옆의 녀석처럼 말이다.

<그래.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해야지. 내가 과거 어떻게 너희 도시를 쉽사리 무너트렸는지 말이야. 내가 지금부터 할 제안의 핵심이기도 하고.>

쿠르르르릉...

내달리는 배, 의자의 팔걸이를 기특하다는듯 쓰다듬은 그펠이 칼슨을 보며 웃었다.

<그때, 시청에 침입한 날 이녀석과 거래를 했지. 나를 돕는다면 네가 선정하는 일백은 살려주겠다고.>

학살의 날.

일백대 도시전체.

숫자상으로 비교할 필요조차 없건만... 그날 <시장>인 이녀석은 전자를 택했다.

그게 그날의 진실.

<아이야. 알고 있니? 네 아버지는 너를 살리기 위해 도시 전체를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그펠의 말에 나름 멀쩡한 꼴로 인질들 사이에 무릎꿇고있던 청년과 여인이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침묵을 지키는 자신의 아버지, 칼슨을 바라보았다.

**

"무슨.. 말도 안되는..."

더듬거리며 일어난 청년이 질척거리는 피를 몸에 묻힌채 절뚝거리며 다가오려고 했다.

"아버지. 거짓말이죠? 그날... 우리가 살아난건..."

순간.

퍼어어억!

"컥..."

<씁. 더럽게. 내가 반경 30m 내로 다가오지 말랬지?>

피를 질척이며 다가오는 청년을 길쭉하게 늘어난 다리로 단번에 걷어차 데굴데굴 뒤로 보내버린 그펠이 불신과 분노를 담아 칼슨을 바라보는 인질들을 보며 히죽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칼슨이 아닌, 뒤쪽에 선 강태석과 카티들을 향해.

<이번 제안도 똑같아. 이대로 조용히 배를 돌려라. 그러면 지금 이방에 있는 너희들은 모두 살려주지. 봐서 알겠지만... 나는 약속을 제법 잘지킨다고?>

도시 하나 대신 배 하나를 제물로.

그게 그펠의 요구사항.

쿠르르릉...

떨리는 진동, 침묵만이 가득한 방안에서 그펠만이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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