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53화 (53/221)

53

어둠속에서 조용히 등장한 사내.

저벅.

겉보기에 평범해보이지만 묘하게 머리속의 신경을 거슬리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이런걸 육감, 혹은 본능이라고 하던가.

'쓸데없는 것까지 인간화가 되었네.'

속으로 중얼거린 베티를 향해 등장한 중년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원상태로 돌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숙녀답지 못한 모습을 보였네요.>

끼릭.

몸과 머리가 반대편을 향한 형태는 숫제 기괴했다.

그것도 인간을 닮은 미인이라면 더욱.

몸마저 180도 돌려 바라보는 방향과 몸의 방향을 일치시킨 베티는 손가락 사이의 철창을 휘리릭 돌리며 부딫쳤다.

이 굵은 케이블을 끊어내려면 자신이라고 해도 10초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그것도 신경을 잔뜩 거슬리는 녀석을 뒤에 놓고 10초나 넋빼놓고 있을수는 없는 상황.

결국 답은 정해져있다.

<너무 원망하지 말아요.>

혼자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다.

말은 간단히, 행동은 빠르게.

촤아아아아악!

준비동작도 없이 쏘아보내진 베티의 철창이 강렬하게 상대를 향해 쏘아졌다.

목표는 머리.

원래대로라면 달리안의 명령이 있기에 생명을 위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콰드드드드득...

<어쩐지. 이럴거같더라니.>

중년사내의 뒤쪽, 어둠속에서 슥 뻗어져나와 철창을 잡은 두꺼운 기계손을 보며 베티가 한숨을 쉬었다.

이어 드러나는건 키만 5m에 달하는 육중한 거체.

거기서 끝도 아니었다.

쿵...

쿠웅...

하나, 둘, 셋...

이어 일곱.

어둠속에서 드러난 각양각색의 기계병기들이 중년사내를 호위하듯 감쌌다.

공통점이 있다면 다른 테이머로 위임받은 이들이 부리는 녀석들보다 훨씬 더 인간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

마치 베티나 크탄처럼 말이다.

쿠웅...

일곱의 기계인형들에게 둘러쌓인 중년사내가 베티를 보며 여유로이 웃었다.

"제가 모은 녀석들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일곱입니다. 당신도 여기에 들어올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드리지요."

<아하하. 저는 나이많은 변태중년에겐 관심이 없어서. 여덟번째 첩따위도 사양이랍니다.>

언제나 자신은 첫번째.

짧게 내뱉은 베티가 남은 세개의 철창을 세워 움켜쥠과 동시에.

촤아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득!

쇠사슬처럼 뻗어진 기계손과 달려드는 기계인형들 사이, 케이블로 가득찬 지하공간이 육중한 쇳소리와 충돌음들로 그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

콰아아앙!

키르르르륵...

미친...!

머리가 박살나며 꼬리와 네개의 집게손을 축 늘어트리는 스캔피드.

그 위에 칠채영창을 찍고 우뚝선 강태석을 향해 주변의 믿기 힘들다는듯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수십줄기의 빛줄기도.

피피피피피핑!

퍼어어어어어어억!

빠르게 몸을 튕겨낸덕에 대부분의 빛줄기는 강태석을 빗겨갔지만 그중 한개는 기어이 강태석의 어깨죽지를 후려쳤다.

이어 순식간에 퉁겨나가는 몸뚱이, 휘청거리는 상체.

터어어엉...

터엉...

간신히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아 컨베이어벨트 뒤에 몸을 숨긴 강태석이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허공으로 푸 숨을 내뱉었다.

일렁이며 흩어지는 어둠 사이로 시퍼렇게 든 피멍과 격통이 치솟아오른다.

한대 맞았는데도 이모양.

'역시... 기갑투창이나 레일건은 무리다.'

피해! 피해서 돌아가!

개인화기는 쏘지마라! 어차피 안먹힌다!

사방에서 소리치며 우르르 몰려드는 녀석들의 음성을 들으며 강태석이 혀를 찼다.

전마강갑은 과연 뛰어난 아이템이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위력을 가진 녀석에 맞았음에도 몸이 꿰뚫리지 않고 피멍 수준에 그쳤으니까.

하지만 그게 한계.

단 한대 맞았음에도 오른팔부분이 전투불능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전마강갑은 더욱 훌륭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아직 이를 다 끌어올릴만한 레벨이 아니었다.

몸뚱이로 버텨낼수있는건 개인화기나 에너지소드 정도.

"아직 멀었나."

치직...

손안의 스파크를 끌어올리던 강태석이 이내 황금순록의 왕관을 쓰는걸 포기하고 칠채영창을 부여잡았다.

더는 한계.

이제까지 전력이 꺼지지 않은걸 보면 베티도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빠져나가거나 했겠지.

이제 자신도 빠져나가야할 시간.

키이이이잉...

칠채영창에 기운을 끌어모아 검폭을 준비하던 강태석이 못내 아쉽다는 눈으로 왼손, 치직거리는 전류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황금순록의 왕관.

분명 훌륭한 스킬이다.

지금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고등급.

하지만 되려 그점이 발목을 잡았다.

너무나 과한 마력사용량.

자신의 마력통이 양동이라면 황금순록의 왕관은 숫제 포크레인으로 물을 퍼다쓰는 격.

즉 저장량에 비해 수도꼭지가 너무 크다.

망국의 왕, 라프텔 녀석은 몸안에 마력이 넘쳐났으니 펑펑 써대도 상관없었지만 자신은 단 한번 발동만으로 모든 마력이 소진되고 퍼져버릴터.

아군이 엄호하고 있다면 모를까 적진에서 이걸 쓰는건 자살행위다.

마음을 비운 강태석이 칠채영창의 기운을 단번에 터트리고 틈을 만든뒤 빠져나가려던 그때.

치직...

앗... 알겠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통신에 주변이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더불어 멈춰선뒤 자리를 지키기 시작하는 녀석들.

이에 기운을 모으던 강태석이 미간을 좁혔다.

명백히 이질적인 상황.

이윽고.

쿠웅...

쿠우우웅...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멈춰선 이들 사이로 거구의 기계인형들이 걸어나왔다.

더불어 이에 호위를 받고있는 한명의 중년사내도.

하지만 강태석에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저기요. 혹시 이분 동료신가요?"

"..."

중년사내옆, 커다란 기계인형의 어깨위에 축 늘어져 얹혀진 베티를 본 강태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잠시후.

"... 인생 쉬운게 없네."

양손을 들어올린 강태석이 컨베이어벨트 뒤에서 일어서며 긴 숨을 푹 내쉬었다.

**

중앙플랜트 뒤, 광장.

'아. 이건 또 올드한 방식이네.'

높이 10m가량, 드높게 솟은 철십자 끝에 사슬로 칭칭 매달린 강태석이 발아래 모인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수백, 수천명의 이들.

어찌나 흥분했는지 손에 들린 개인화기를 타타타탕 하늘로 쏘아올리며 쌍욕을 내뱉고 있다.

그야말로 광란 그자체.

하긴 자신들 터전을 뒤집어놓은 녀석이 잡혔는데 안 저러는게 더 신기하다.

그런 강태석의 뒤편으로 우뚝선건 아까전부터 거슬리던 높이 100m의 철탑.

옆에는 마찬가지 꼴이 된 베티가 있었으며 자신의 발 아래는...

"동료애가 대단하시군요. 고작 기계병기 따위한테."

"동료애도 동료앤데... 그 상황에서 방법이 있어야지."

두개의 십자가를 양팔로 지고 선 5m크기 기계인형의 어깨위,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싱글벙글 웃고있는 중년사내를 보며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대로.

동료애도 동료앤데 우르르 기계인형들을 끌고 온 녀석을 본순간 느꼈다.

이대로 도망가면 벌집 되겠다고.

아무리 자신이라도 여러구의 기계인형들과 싸우며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지는 레일건을 피할 자신은 없었다.

일단은 항복이 최선이었던 상황.

"그나저나 궁금한게 있는데. 이제부터 뭐하려고?"

강태석이 아래, 수천에 가까운 인파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자신하나 잡았다는걸 보여주려고 저 인원을 끌어모았다는건 말이 안된다.

강태석이 보기에 저기 모인 이들은 이 플랜트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 거의 대부분에 가까웠으니까.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

이에 중년사내가 싱긋 웃었다.

"오늘은 정말 유의미하고 기쁜 날입니다.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저들을 모았지요. 당신은 연설이 끝나고 제물이 되겠지만... 그전엔 관람객 자격을 드릴테니 잘 지켜보세요."

말을 마친 중년 사내는 강태석에게 몸을 빙글 돌린후 발아래, 모인 수천명들을 향해 손에 들린 확성기를 잡았다.

<여러분. 그간 저를 믿고 따라와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 모두는, 아니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한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진 확성기의 음성에 아래 소리치던 이들이 일시에 조용해진다.

지켜본다는듯, 궁금하다는듯.

그런 이들을 만족스럽다는듯 바라본 중년 사내가 한걸음 뒤로가 기계인형의 뒤에 우뚝서있던 철탑에 손을 올린 순간.

키이이이이이이이잉...

금속철탑의 표면에 그려져있던 수백줄기의 선들이 드러나며 선명한 붉은 빛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배, 오시리스.

"이놈들 왜 갑자기 다 빠진거지."

"중앙플랜트 쪽에서 난리나서 후퇴한거 아니야 아빠?"

키이이잉...

어느새 센티널과 한바탕 난리통을 끝마치고 갑판 위로 돌아온 아린의 대답에 카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에 화들짝 놀라 빠질 놈들이었다면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사방에서 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부가 빠지는것 정도라면 몰라도 모두 돌아가다니.

이는 분명 녀석들의 윗선에서 뭔가 명령이 내려온것.

'뭐때문에?'

카티가 가늘게 눈을 뜨고 높게 솟은 중앙플랜트를 바라보던 그때.

키이이이이잉...

쿠르르르릉!

뒤쪽에 솟아있던 금속의 탑에 들어오는 시뻘건 불빛.

동시에 쿠릉거리며 허공에 생겨나는 먹구름에 카티를 비롯한 주변이들이 멈칫하며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

콰르르르릉!

금속의 탑을 타고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빛들을 보며 중년 사내, 아니 시장 오토른이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완성되었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도시가 멸망한지 3년.

그직후 1년간 자신은 폐허더미를 돌고 돌며 희망없는 미래를 보내고 있었다.

테크니컬이라는 특이한 힘이 있었지만 그정도로는 목숨부지만 가능할 정도로 세상은 사나웠으니까.

하지만 2년전, 어느날 홀린듯 이끌려 향했던 폐허속에서 숨겨져있던 붉은 구체를 발견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뇌>라는 기술의 습득.

무기고와 중앙플랜트에 대한 정보.

한정된 재료를 통한 기갑투창과 레일건의 제작 및 운용법까지.

자신의 세상이 뒤바뀌는건 한순간이었다.

기계병기들을 하나둘씩 노예로 부리고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세력을 불려 무기고를 탈취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앙플랜트까지 손에 넣었다.

여기까지가 1년.

도시가 무너진지 2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승리이자 쾌거.

하지만 붉은 구체에서 얻은 가장 귀중한 정보는 그게 아니었다.

막대한 에너지와 재료의 보고, 중앙플랜트.

그곳을 점거한뒤 만들수 있었던 것은...

콰르르르르르르릉!

콰콰콰쾅!

금속벽면, 수백개의 회로를 타고 올라간 시뻘건 빛들이 그 탑의 정상에 그러모인다.

막대한 에너지에 의한 강렬한 스파크, 시뻘건 열기.

이어 탑의 상공, 수백미터 위에 생겨나는 지름 10m 가량의 강렬한 에너지구체.

콰르르르르르르릉!

대자연마저 뒤트는 강렬한 열기.

상공에 작은 먹구름이 휘모여들며 천둥번개가 몰아친다.

이를 지상에서 올려다보던 오토른이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광자포>가! 우리 섬의 자주국방을 실현해줄 위대한 문명이!>

포톤 캐논.

멸절병기.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토른의 말에 탑아래 모여있던 수천명의 인파 모두가 광기가득한 함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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