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막아라!
콰아아아아앙!
지하플랜트.
사방에서 목숨걸고 기갑투창을 퍼부어대는 이들을 본 사내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숨어든 날파리들이 제법 많다.
"그냥 한번 갈기고 시작할걸 그랬나."
지상, 광자포를 일컫는 것.
하지만 이내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칼을 허공에 휘저었다.
으아아아악...
커헉...
허공에 칼을 휘저을때마다 기묘한 선들이 줄기줄기 뻗어나가며 사방에서 공격을 퍼붓던 모든 이들을 토막낸다.
엄폐물도, 무기도, 기계화된 육체도.
후두두둑...
털썩.
일순의 공격에 단번에 조용해진 지하플랜트속, 금속기기들 사이를 걸으며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광자포로 먼저 쓸어냈다면 절반은 줄이고 시작했을지 몰라도 플랜트 자체가 크게 망가질수도 있다.
손이 좀 가도 이렇게 하나하나 직접하는게 속은 편한 법.
그렇게 넓게 펼쳐진 기계장치들 사이를 지난 사내가 메인동력케이블들이 뻗어나오는 공간으로 향하려던 그때.
치지직...
"?"
자신의 앞을 막아선 누군가의 모습에 사내가 이채를 띄었다.
**
<아직 메인케이블을 끊어내려면 시간이 더 걸려요.>
시장, 오토른의 말을 떠올리며 길을 막아선 강태석이 손안에 들린 칠채영창을 붕 휘둘렀다.
사실 눈앞의 사내나 광자포나 답없는건 마찬가지.
하지만 둘중 하나라도 어떻게든 끊어내야 해볼만하다.
"거기 잠깐..."
하지만 강태석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
부우우웅!
쩌어어어어억!
무심하게 휘둘러지는 칼.
그와 동시에 허공에 시퍼런 선을 그리며 질주하는 흉험한 기운에 강태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말로 시간이라도 좀 끌어볼까 했는데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피하기에는 이미 지척.
강태석이 전마강갑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칠채영창을 앞세워 가로막은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콰드드득!
세상이 두동강나는듯한 충격과 함께 강태석의 몸이 뒤로 쩌억 튕겨나가며 금속의 벽면에 처박혔다.
"...!"
전신을 후려치는, 말도 안나오는 충격.
이에 벽면에 처박힌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이를 까득 악물었다.
기갑투창을 직격으로 받아냈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량.
가볍게 휘둘러 뽑아낸 검기였는데도 이정도다.
파르르르르....
그 와중에 낭창낭창 흔들리면서 충격을 이리저리 흩어내고 있는 손 안의 칠채영창을 본 강태석은 크게 숨을 들이마셔 애써 통증을 가라앉힌 뒤 구겨진 금속벽면에서 빠져나와 땅 위로 내려섰다.
쿵...
"음? 안죽었다고? 말이 안되는데?"
그제서야 호기심이 생기는듯 걸어가려던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벽면에 처박힌 강태석을 돌아본다.
그런 사내를 보며 숨을 고른 강태석은 애써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거기. 말로 좀 하자고. 대체 왜 다 죽이려고 하는거야. 너희도 여기 관리할 사람은 필요할거 아냐."
"아. 사자 그런거였나? 대화 좋지. 대화 좋긴 해."
턱을 매만지던 사내는 이내 뭔가 생각난듯 곰곰히 상념에 잠기다가 이윽고 강태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비슷한 생각이었어. 광자포랑 중앙플랜트라는게 어지간하면 자기방위에 자가수복기능이 있다고 해도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생존자들을 계속 살려두자는 입장이었지. 굳이 사람 죽이는걸 썩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
"그런데 그뒤에 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었는데."
사실 남이 수다떠는거 듣는건 썩 관심없다.
사연팔이도 그닥.
하지만 시간을 끌어야하니 말은 많이 끌어낼수록 좋다.
강태석의 맞장구에 서있던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군데는 관리맡긴 놈들이 그걸 가지고 협박을 했지. 자신들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아예 못쓰게 망가트려버릴거라고. 두군데는 자신들에게도 광자포를 사용할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했고."
"..."
"무시했더니 실제로 망가트리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쩔수 없이 손을 썼어. 엄청 바쁘던 와중이었는데 굳이 일부러 돌아와서 말이야. 덕분에 내 동료들이 여덟정도 죽었지. 하여간... 이정도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지?"
이에 강태석 역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해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알았기에.
녀석은 아예 결심을 내렸고 마음을 바꿀 생각도 없다.
몰살을 피할수는 없다는 뜻.
"너희도 지금 망가트리려고 하고 있잖아. 이정도 시간 줬으면 됐지? 끝내자."
후우우웅...
사내의 말과 동시에 칼에 아까보다 더욱 서슬퍼런 기운이 서렸다.
가볍게 휘둘렀던 때와 다르다.
중첩되고 중첩된 기운.
저게 휘둘러지면 전마강갑이나 칠채영창은 몰라도 자신은 확실히 토막난다.
애초에 사내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것도 마음먹은 순간 강태석을 지우고 시간안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
그런 사내의 말에.
"그래. 어쩔수 없네."
"너... 그거?"
꿀꺽.
허리춤에서 작은 푸른 병을 꺼내 마시는 강태석의 모습에 사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하는 표정.
동시에.
파지지지지지직...
푸른 액체를 마신 강태석의 몸 주변으로 시퍼런 광채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
블루 블러드.
단기간에 사용자에게 압도적인 마력을 선사해주는 신비의 액체.
이를 들이킨순간 블루블러드의 입자가 혈액과 폭발적으로 반응하며 마력으로 환원되어 모든 입자가 소진되기전까지 그야말로 끝도 없는 힘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적절한 레벨과 힘, 육체를 지닌 이들에게나 통용되는 말.
찻잔으로 폭포를 받아낼순 없다.
블랙블러드와 마찬가지.
수준이 낮은 이가 블루 블러드를 마시면 몸안에서 터져나오는 마력을 소비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몸이 터져 죽는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1초에 1000씩 마력이 들어오는데 10밖에 쓸수 없으니까.
이는 강태석 역시 마찬가지.
콰르르르르르릉!
콰지지지직!
강태석의 몸과 심장, 혈관을 중심으로 푸른 입자가 맹렬하게 반응하며 해일과 같은 마력을 쏟아낸다.
이렇게 쏟아져나온 마력은 강태석이 차마 다 감당할수 없는 양.
그렇기에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통제를 잃고 혈관과 육체를 벗어나며 폭풍처럼 사납게 사방을 휩쓸어야한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그렇게 질주하는 마력들에게 한줄기 길이 생겨났다.
자신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아니 어찌보면 더욱 넓은 뇌전의 길.
황금순록의 왕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자신을 후려치는 굵은 번개더미에 사내가 기겁을 하며 칼을 휘둘렀다.
검기를 칭칭 두른 칼로서야 간신히 잘라낼수 있는 굵은 뇌전의 채찍.
그런 것들이 수십갈래나 뻗어나와 반경 100m, 상대와 자신 사이를 모조리 후려친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앙!
금속의 벽, 기계장치, 천장과 바닥.
가리지 않고 모조리 찢어발기는 그 역도에 칼을 휘둘러 사방을 토막내던 사내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
보아하니 상대는 진심으로 자신을 상대해볼 마음을 가진것같았다.
그리고 이정도면 <자격>은 된다.
그렇다면 자신도 진심으로 해주는게 인지상정.
"제법이다만... 그정도로는 멀었다."
넘실거리는 번개의 바다를 보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저정도면 자신에게 타격을 입힐수 있다는걸 인정한다.
하지만 수준의 차이는 그런걸로 결정지어지는게 아니다.
휘몰아치는 번개폭풍속, 전신이 그을리는 와중에도 정신을 집중한 사내가 칼을 들어올린 순간.
쩌저저적...
쩌적...
칼에 맺혀있던 푸른 기운이 마치 수정처럼 얼어붙으며 유형화되기 시작했다.
샛노란 번개의 폭풍속, 그보다 더욱 찬연하게 빛나는 푸른 칼날.
사내가 금속의 칼 위로 푸른 수정을 완성시킴과 동시에.
쫘아아아아아아악!
사방에 넘실거리던 번개의 바다가 마치 칼날에 찢어발겨지는 캔버스처럼 쩍쩍 쪼개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
콰득!
기계인형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굵은 케이블을 모두 잘라낸 순간.
키이이이잉...
파지지직...
어딘가로 끊임없이 전력을 실어보내던 전선들이 힘없이 널부러지며 동력이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일단 금속의 탑에 들어가는 동력은 차단.
바깥쪽의 붉은 장막도 이제 걷힐 것이다.
쿠르르릉...
"수고했습니다."
완전히 퍼져버린 세대의 기계인형들을 보며 오토른이 중얼거렸다.
막대한 에너지를 실어나르던 케이블들을 아무 보호장비없이, 금속병기로 잘라내야했다.
아무리 기계병기라고 할지라도 회로와 전신이 다 타버리는게 당연.
그런 기계병기들로부터 고개를 돌린 오토른이 이제는 저너머, 굉음이 들려오고 있는 플랜트 지하를 바라보았다.
아까전 카트란이라는 사내가 사라진 자리.
콰르르르릉...
콰릉...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런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것 자체가 나름 선전하고 있다는 의미.
그이전에는 뭔가 쪼개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성밖에 안들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거운 기분을 떨치지 못한 오토른이 옆, 베티를 보며 물었다.
"어떨것 같습니까. 승산이 있나요?"
<음... 아마 없지 않을까요.>
베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보는 순간 알수 있었다.
아무리 카트란이라고 해도 넘을수 없는 벽의 격차가 있다는걸.
나름 시간을 끌고는 있다지만 그뿐.
결국 마지막 수단을 사용해야한다.
총력전.
그리고 이기건 지건 그 결과는 참담할터.
이곳과 주인의 배, 모두 합쳐그 절반 가까이가 죽거나 다칠 걸로 예상되었다.
여기까지 떠올린 순간.
<좀 더 세상을 보고 싶었는데.>
"...?"
작게 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본 베티는 옆의 오토른을 흘긋 본 후 자신의 코어부분, 상부장갑을 뜯어냈다.
콰지지직...
"무슨 짓입니까?!"
<당신은 할수 있을것 같아서요. 우리 주인은 안들어줬거든요.>
반짝이는 붉은빛 코어에 손을 올린 베티가 오토른을 보며 작게 웃었다.
**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앙!
왼손에 꿈틀거리는 뇌전을 휘감은 강태석이 그대로 상대를 향해 이를 내리쳤다.
이어 번쩍이는 섬광.
콰지지지직!
콰직!
콰지지직!
터져나온 막대한 에너지의 격류가 푸른 수정의 검을 든 사내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것을 휩쓸며 우그러트리고 터트린다.
황금순록의 왕관.
마력을 유무형의 기운으로 치환해주는 기예.
순수한 번개라기보다는 뇌속성을 띈 마력의 폭풍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기에 피할수있고 잘라낼수 있다.
쩌어어엉!
푸른 검기를 휘둘러 번개를 잘라내며 접근하는 상대를 본 강태석이 오른손의 영창을 우득 쥐었다.
혈관에 휘몰아치던 블루블러드의 푸른 입자도 서서히 바닥나고 있다.
마력이 떨어지며 번개줄기가 약해지고 상대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보인다.
상대도 상당히 타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싸울 여력은 있어보이는 상황.
절제된 검기, 자신을 차분히 노려보는 눈빛.
상대는 지금 자신의 상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끝나면 단번에 거리를 좁혀 자신의 목을 베어낼 터.
이에 강태석이 심호흡을 한후 마지막 힘을 쥐어짜 최대출력을 끌어내려던 그때.
쾅쾅쾅쾅!
콰아아앙!
쏴라!
갑작스레 금속벽면을 박살내며 뛰쳐나온 기계병기들 너머.
수많은 이들이 레일건과 기갑투창을 든채 가진바 화력을 모조리 쏟아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