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강태석 입장에서는 딱히 선택할 것도 없는 상황.
정중한 권유.
물론 말만 정중하지 협박이나 다름없다.
이자리에서 다 뒤집을거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흘긋.
옆, 요상한 분위기에 얼어붙은 소녀와 아래, 자신의 입에 물고있던 회복제를 번갈아 흘긋 바라본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멋진 아이디어네. 같이 하지뭐."
"동의해줘서 고맙군."
작게 웃은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묵직하고 짧게.
"목표는 간단해. 일곱 가문들의 주인과 식솔들을 사로잡는다. 녀석들의 사병들이 빠져나가있는 동안."
"와. 너무너무 간단해보인다."
짝짝짝짝.
쪽쪽쪽쪽.
입의 치료제를 쪽쪽 빨며 박수를 짝짝 치는 강태석의 말에 주변이들이 입술이 씰룩거렸다.
**
일곱 가문의 무력집단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번째, 일곱가문이 공동으로 통제권을 가지는 도시밖의 사병집단.
두번째, 각자가 받아들여 자일공방에 잔류시키고 있는 직속생존자들.
세번째, 그리고 도시가 멸망하기 전부터 함께했던, 말 그대로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각자 가문들의 가솔과 직계무력부대.
아무래도 일곱 가문을 상징하는건 세번째, 직계무력부대들이었지만 가장 거슬리는건 첫번째였다.
중화기와 레일건으로 중무장하고 엄격하게 운용되는 군대.
얼마전 무기고의 일부를 탈취하는데 성공한것도 저들.
심지어 이를 통해 고급무기와 병참, 두가지를 모두 쥐게된 이후 공동의 관리하에 운영되는 사병집단의 무력은 크게 증가했다.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 세번째와 아무래도 자신들보다 수준떨어지는 두번째에 비하면 크게 부담스러운 이들.
그리고 사내가 말하는 계획은 이랬다.
"오늘밤 사병집단들이 완전히 이 안전지대 근방을 떠날거야. 목표는 중앙플랜트쪽."
이에 술렁인 이들을 향해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녀석들의 병력이 조금씩,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외곽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는것들은 확인했어. 아마 우리가 눈치채기도 전 다 끝내버릴 생각이겠지."
모인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무기고마저 손에 넣은 녀석들이 중앙플랜트의 일부까지 손에 넣으면 균형추는 그야말로 확 기울어진다.
그들의 군대가 개선장군마냥 위풍당당하게 돌아왔을때는 모든게 끝장날터.
녀석들이 자신들 몰래 움직이고 있는것 자체가 그 명확한 증거다.
콰아앙!
"이 쥐새끼같은 놈들이! 겉으로 잘지내자더니 뒤로 칼꼽을 준비를 해!"
쩌저적...
주먹질 한방에 대리석바닥을 박살내버린 사내의 고성이 모인이들의 귓가로 쩌렁쩌렁 울려퍼졌고.
그 분기서린 외침을 듣던 중앙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믿을수 없는 놈들이었지.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해. 녀석들이 우릴 경계하고 있다는거고... 오늘 밤은 도시전체가 텅 빈다는 거니까. 심지어 오늘밤 3층 메인홀에서 축제를 연다더군. 엄청난 물자까지 풀어가면서."
사내의 말에 모인 이들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 말대로.
사실 자신들이 가장 거슬려하는건 첫번째, 잘 무장된 군대였다.
각 가문끼리 견제하느라 성장이 지지부진했던 두번째와 믿지 않는 이는 들이지도 않는 세번째와 달리 첫번째, 각 가문 공동의 이해가 일치해 만들어진 사병집단은 그 어떤 견제나 방해도 없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무력이 증가해왔으니까.
한데 그놈들이 이곳을 완전히 떠나있는다?
거기에 3층에서 물자까지 풀어가며 안전지대 안, 다른 생존자들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들이겠다는건 결정적이다..
이건...
해볼만하겠는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해볼만하지. 그리고 해야한다. 아래쪽에 무슨 수를 썼을지 몰라. 우리가 아차하는동안 녀석들은 끊임없이 손을 써왔어.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이에 강태석의 옆, 여인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되면 해야한다.
그리고 이정도면 해볼만하다.
그런 이들을 향해 건네진 사내 옆, 소년의 말.
"시작은 기습입니다. 단번에 자일공방쪽을 쓸어내며 달릴거에요. 그리고 그곳에서 일곱가문으로 연결된 비밀통로를 통해 각 팀들이 침투해서 단번에 사로잡고 끝내는 겁니다. 선두는 <구련장>들이 맡을 거에요."
지하비밀통로.
그게 일곱가문이 직속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자일공방에 자리잡은 이유.
이어진 구련장이라는 단어에 자리잡고 있는 이들의 모든 시선이 사이사이, 몇몇에게로 모아졌다.
**
"잘해보자고. 나쁜일 하는것도 아니니까. 아 참고로 너는 나랑 갈거야."
회의 이후 대륙 박물관 전체는 초긴장상태.
모든 이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무기를 갈고닦고 상태를 점검하며 심기일전에 들어갔다.
그중 여인의 개인공간, 제법 고급진 의자에 앉아 회복바를 씹던 강태석이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여인을 보며 물었다.
"너도 그 구련장중 하난가?"
"그렇지. 나도 칼좀 쓰는 편이라고. 난 오등정도 하지. 딱딱 나눠지는건 아니긴 하지만."
구련장.
나름 난다긴다하는 녀석들이 한데 모였으니 갈등이 없을리가 없다.
일이 생길때마다 투닥거리고 한판 붙으며 서열정리하다보니 생겨난게 구련장.
나름 실력자라고 자부하는 자일공방의 녀석들도 개무시하는 볼츠의 수많은 이들속에서도 압도적 실력을 지닌 아홉.
그런 여인을 향해 옆에 걸터앉아있던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피츠도 그중 하나야?"
"피츠? 피츠가 누구지?"
"아까 오는 길에 봤던 남자 있잖아."
도시 북쪽에서 모르면 간첩이라던 사내.
그런 소녀의 말에 여인이 피식 웃었다.
"아니. 그녀석은 신입이야. 한참 멀었지. 턱걸이로 들어왔다고."
"우와."
소녀가 감탄성을 내뱉었다.
피츠란 사내만 해도 도시밖에서는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런 피츠가 여기서는 말단 취급받다니?
거기에 눈앞의 여인은 이런 곳에서도 손꼽힌다고?
하지만 그런 소녀의 표정과 달리 시큰둥한 표정으로 질겅거리는 강태석의 태도의 여인이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장례식 가는줄 알겠네. 표정좀 풀어. 이긴다니까. 전력분석도 다 끝났다고. 너는 내가 <특별히> 껴준거라니까. 이 파티에."
이에 강태석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게 아니다.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려서 그렇지.
심지어 더 쓸데없이 사이즈가 크기까지 한.
'거기다 느낌이 안좋아.'
"느낌이 안좋기라도 해?"
소녀의 말에 이에 멈칫한 강태석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터엉...
무언가를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가 그들이 자리잡은 공간 전체로 울려퍼졌다.
집합의 시간.
"후우. 좋아. 가자."
웃고 있었지만 일단 시작하니 표정이 달라진다.
감았다 뜬 눈에서 서슬퍼런 눈동자를 끄집어내며 일어서는 여인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강태석이 칼을 들고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
**
9층, 입구쪽.
"아니 어떤 겁대가리없는 새끼가 우릴..."
바닥에 쓰러져있던 일곱을 회수해 돌려보낸 세 사내가 그들이 쓰러져있던 자리를 보며 까득 이를 갈았다.
누가 감히 고르그 가문의 비호를 받는 자신들을 건드렸단 말인가.
아까전 비웃던 다른가문 직속녀석들의 표정이 생생한 상황.
심지어 놈들은 그 주변을 몇차례나 왔다갔다 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발견할 때까지 깨우지도, 알리지도 않았다!
"포른 그새끼들 아냐? 엄청 크게 비웃더만."
"지랄. 포른이랑 고르그 사이 안좋은게 우리같은 하청들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서로 공격해도 돈도 안되는데."
"안그러면 말이 안되잖아. 아니면 설마..."
말을 흐린 한명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중앙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후우웅...
어둠이 서린곳.
대륙박물관으로 향하는 입구.
"..."
"...."
셋이 침묵을 지키며 이를 바라보던 그때 한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그새끼들도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가 먼저 건드렸을리도 없고."
"하긴. 그리고 이제 차이가 명백한데."
사내의 말에 다른 이가 실실거렸다.
그놈들이 도시를 무법지대마냥 날뛰고 다니던 것도 옛말.
이제 녀석들은 그저 현재에 안주해 이곳, 지하에서 썩어가는 망령들일 뿐이다.
게다가 고고한척 하는데 솔직히 결국 가문들에게 개밥 받아먹는건 똑같은 신세 아닌가?
오히려 그런 녀석들을 물자 몇푼으로 이 지하에 처박아버린 일곱가문, 그들 주인의 수완이 대단해보일 지경.
"두고보자고. 조만간 여기도 우리가 쓰게 될거같으니까."
사내가 작게 웃으며 어둠속, 대륙박물관 쪽을 바라보던 그때.
저벅.
촤르르륵!
"!!!!!!!!!!!"
작은 발소리와 함께 깊은 곳에서 질주해오는 섬뜩한 마찰음에 셋이 대경실색을 했다.
이 익숙한 소리는...
"나찰검!"
하지만 이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촤아아아아악...
"끄헉..."
"아직 기억하네. 오랜만인데."
단번에 목젖이 베인 셋이 목젖을 부여잡으며 어둠너머, 수십미터 길이의 쇠연검을 회수하며 걸어나오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나찰검.
한때 대살육귀로 유명했던 계집.
거기에 그 뒤로 보이는건...
저벅.
저벅저벅.
어둠속에서 걸어나오는 수십, 아니 백수십의 그림자들.
목에서 피를 흘리던 사내가 이를 보며 간신히 눈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허리춤의 신호탄에 손을 가져가려했다.
자신들은 당했지만 다른 동료들은 개죽음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은 그야말로 비상사태!
하지만...
퍼퍼퍽!
"가지."
세개의 쇠구슬을 손으로 내던져 조용히 상대를 처리한 사내가 그대로 시체를 지나치며 뒤로 말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
최대한 빠르고 신속한 처리.
그렇게 중앙에서 나온 이들이 그들의 입장에선 왼쪽, 자일 공방쪽으로 방향을 꺾은 직후.
타타타타탕...
콰드드득!
우아아아아아아악!
그야말로 처절한 살육음들이 자일공방 안쪽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자일 공방.
도시내외 VIP들의 주문을 받아 특수한 물건들을 제작하던 장소.
말이 공방이지 연구와 외주까지 겸한, 작은 강소기업에 가까운 이들이었으며 그들이 만들어두었다가 미처 발송하지 못하고 이 넓은층 구석구석에 숨겨놓아야했던 각종 고객들의 의뢰물품들은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들의 보물찾기의 주된 타겟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각종 제조설비들과 연구시설들로 가득하던 이곳은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하고 있었다.
이곳에 상주하던 이들의 피로 인해!
타타타타탕...
으헉!
"아 저 병신."
촤아아아아악.
연검을 휘둘러 십수미터 밖, 숨어있던 적을 엄폐물째 토막내버린 여인이 옆에 당해버린 누군가를 보며 혀를 찼다.
배가 부르다고 게으름을 피우니 저런 놈들에게 당하지.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여인의 눈동자는 차갑게 사방을 훑고있는 상태였다.
이 레일건이라는 것의 화력이 정말 만만치 않다.
방금전 꿰뚫린 녀석도 피하지방 금속액 주입시술로 어지간한 개인화기는 장난처럼 튕겨내는 놈인데 전신에 구멍이 숭숭 나며 죽어버린게 그 증거.
물론 그건 그거고 당한놈이 한심한건 맞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빛나보이는 상대도 있었고.
콰쾅!
콰드드득!
으아아악!
칼, 화기, 육체, 방패.
각기 다른 수단들을 활용하며 어둠속, 거의 학살에 가깝게 사방의 적들을 유린하고 있는 여덟명의 남녀들.
자일공방의 상대도, 볼츠의 대부분 이들도 상당한 실력자들이건만 그들은 그중에서도 유독 빛난다!
그들로 인해 공방의 전선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단번에 앞을 향하는 길들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
아 그리고 하나 더.
쩌엉...
"히익... 히이익!"
놀라 고개를 숙이는 소녀의 앞, 레일건의 황금빛 파괴직선을 칼 한자루로 쪼개버리는 사내를 보며 여인이 작게 감탄성을 토했다.
상대의 총구를 보고 경로를 읽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걸 칼로 쪼개버리는건 또 다른 신기.
심지어 레일건의 위력이 벽을 두부처럼 숭숭 뚫어버릴 정도라는걸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내가 사람 잘봤다니까. 더 열심히 싸울 생각은 없어? 너정도면 엄청날텐데. 오늘 공로 세우면 신입이라고 푸대접할 놈은 아무도 없다고."
쪼르르륵...
그 와중에도 입에서 문 회복제를 떼지 않고 쭉쭉 빨던 강태석이 아쉽다는듯 말하는 여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내킨다고 열심히 날뛴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은 소녀 지키느라 바쁜 상황.
쩌어억...
날아드는 총알을 다시한번 갈라낸 강태석이 서서히 손안에 모이기 시작하는, 아주 작은 영롱한 무지개빛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좋아! 통로 확보했다! 다들 앞으로 모여!
"좋아. 우리도 가자고."
구련장의 하나인 여인이 강태석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