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피.
볼츠.
생존자.
쿤츠.
... 그리고 모자라다면 우리들의 것들까지.
**
안전지대 밖, 도시폐허지대.
콰르르르르릉!
"와 진짜... 장난아니네."
"저거 못 따라잡겠죠?"
장갑차에 타고있던 이들이 저 멀리 질주해 저택을 짓밟고 있는 은빛의 배를 보며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거대한 녀석이 자신들이 탄 장갑차들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인다니.
심지어 자신들의 장갑차는 폐허사이를 피해다녀야하는데 저건 그냥 짓밟고 들이받으며 일직선으로 내달리면 되니 그 차이는 더욱 크다.
그리고 그런 수하들의 말을 듣던 분대장역의 사내가 힘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따라잡으면 어쩔거야 또. 화력은 비슷한데 방어력은 사기더만."
"그렇죠? 맞아도 슬쩍 패이기만 하고."
"화력도 보니까 안비슷했어요. 마지막에 보니까 레일건을 무슨 비처럼 쏟아붙던데."
투덜거리던 이들이 일단은 전투가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장비를 싣고 장갑차에 올라타 배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일단 이곳에서는 실패했어도 높으신 양반들이 어련히 잘 해결할 것이다.
실패하면 다같이 죽을텐데 뭔가 방법을 쓰겠지!
그리고 사실 더이상 저 위험한 곳에 휘말리지 않고 일단 배에 타고있고싶다.
일단 안전하게 타고있으면 쫓아낼수도 없을테니!
"자자. 돌아갑시다."
"후우. 먼데. 언제 돌아가나."
장갑차에 탄 이들이 허리를 툭툭 치며 출발할 준비를 하던 그때.
쿠르르르르르릉...
"...?"
땅에서 울려퍼지는 기묘한 진동에 서있던 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구덩이, 지하.
"안마라도 해줄까?"
키이이이이이잉...
수백명 한가운데,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강태석이 아니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니, 사실 대답해줄 새가 없었다.
기술스탯과 레벨이 늘어 이런 묘기를 부리고 있다고 하지만 칠채영창을 이렇게 결계 형태로 허공에 잡아두는건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는 일.
벨페른의 칼에 달린 마력소모감소효과가 없었으면 진즉에 마력이 바닥났을것같았다.
하지만 지금껏 버틴 보람은 있었다!
콰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앙!
위쪽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질주하는 소음과 함께 저택이 박살나고 무너지는 소리와 진동이 고스란히 지하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변, 굳은 짐승들의 장벽 너머에서 끼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키이이잉...
쿠어어어엉...
무언가에 억눌리는듯한 비명성을 내지르며 겁에 질린 호랑이처럼 굴기 시작하는 쿤츠들의 소리를 들으며 강태석이 숨을 내뱉었다.
'그래. 핵심은 저택벽면에 새겨져있던 고대밀어들이니까.'
새겨져있던 밀어들이 모조리 지워지며 쿤츠들을 밀어누르던 봉인이 풀렸고.
이어 이 거대한 원형의 탑이 피를 집어삼키며 아래의 존재를 한층씩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밀어의 힘이 사라진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뿜어져나오던 밀어의 힘 자체를 저택이 명령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두 집어삼킨 것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 저택을 통째로 박살내니 저택에 고여있던 주술의 힘이 다시 내려앉으며 쿤츠들을 짓누르기 시작한것.
이대로라면 쿤츠들은 슬금슬금 이곳에서 벗어나 주술의 힘이 닿지않는 지하로 도망치려 할터.
그러면 그때 안전하게 도망치면 된다.
저택에 의해 주박되지 않은 주술의 힘은 천천히 흩어지겠지만 그때쯤이면 자신들은 섬을 벗어났을 테니 상관없는 문제.
그때.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아주아주 거대한 진동이 그들이 서있던 원통형의 구조물을 모조리 후려쳤다.
벽면, 바닥, 위의 천장할것 없이 단번에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
이에 강태석의 뒤에 호위하듯 서있던 아니타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어깨를 탁탁 쳤다.
"신입! 아하하하! 다 끝났나봐! 뚜껑이라도 열리려나본데?"
주변도 모두 축제분위기.
우아아아아! 살았다!
나간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으하하하하하!
좁은 결계와 짐승들의 장벽속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아니야. 원형철문이 열린다고?'
강태석의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식은땀이 한층 더 커졌다.
철문이 열린다고?
저택을 박살냈는데 그게 될리가 없지 않은가.
철문을 열고 닫는 거대한 구동계는 일곱저택에 위치해있는데!
설령 구동계가 멀쩡하다고 해도 그게 지금 작동할 이유는 없다.
쿠르르르릉...
진동이 커질수록 뒤목을 훑는 불길함이 더욱 커진다.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쥔 벨페른의 칼 손잡이를 콰득 쥐어잡던 그때.
쿠아아아아아아아앙!
쿠아아아아앙!
허억!
짓눌려 낑낑거리던 쿤츠들이 갑자기 거대한 포효들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갑작스러웠던지 소리지르던 이들이 놀라 기겁하며 숨죽였을 지경.
하지만 쿤츠는 그들이 만들어낸 소음때문에 흥분해 목청을 높인게 아니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앙!
쿠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득!
터어어어엉!
고함성을 터트린 쿤츠들이 어딘가로 물밀듯이 내달리며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칠채영창의 결계와 쿤츠들의 뒤얽힌 짐승의 장벽때문에 그너머 시야가 보이지는 않지만 좁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흉성과 진동이 생생하게 안쪽의 생존자들에게 이를 알려준다.
"설마... 내려가는건가? 다시?"
어딘가로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온 통로뿐.
누군가가 내뱉은 희망적인 관측에 몇몇이 통로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그들이 초인적인 감각을 집중해 통로, 입구쪽에 집중한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투타타타타타...
소름끼치는 비명들이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흘러들어온다.
인간이 찢겨나가는 소리.
다급한 총성들.
이를 해일처럼 덮치는 쿤츠들의 포효까지.
그걸 들은 순간 강태석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를 깨닫고 눈을 감았다.
"... 문을 열긴 열었군."
그래. 문을 열었다.
다만 인간들을 위한 통로가 아닌.
처음 쿤츠들이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의 천장, 정상의 통로를.
이제는 지하뿐 아니라 지상도 지옥.
그리고... 이제 피는 충분하다.
누구의 것이건 간에.
이 도시 전체를 적실테니!
투타타타타타...
아아아아아아아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위에서 울려퍼지는 비명.
더 나아가 아래에서 다시 움직이며 올라오기 시작한 소름끼치는 굉음에 강태석이 이를 악물었다.
**
콰콰콰콰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도시외곽.
방심하고 있던 수천의 군대들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쿤츠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물론 투사되는 화력에 의해 쿤츠들도 육편조각이 되어 도시를 피로 적셨지만 그뿐.
화아아아악...
하늘에서 누가 보았다면 비명을 내질렀으리라.
중심부, 스물네개의 열린 통로를 통해 기어나와 도시를 자신들의 색으로 물들여가는 쿤츠들의 해일에!
원통에 있을때는 밀려서, 좁아서 올라오지 못했던 것뿐.
지상으로의 완전한 자유를 찾으니 그 수는 수만을 넘어 수십, 수백만!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 해안선.
"..."
어느새 배의 갑판으로 올라와 저멀리 벌어지는 광경들을 보고있던 고르그와 아타나엘, 그리고 다른 가주들이 눈을 감았다.
차마 눈뜨고 보기힘든 참상.
자신들도 이렇게까지 하고싶진 않았다.
1단계에 갈아넣을 녀석들은 상관도 없는 생존자 녀석들과 건방진 볼츠놈들이었지만.
2단계에 갈아넣어야했던건 엄연히 <자신들의 것>이었던 자신들의 군대였으니.
하지만 시간끌 때가 아니었으며.
자신들이 내린 결단은 그 결과를 착실히 눈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미친듯이, 거세게 하늘로 용오름처럼 뿜어오르기 시작하는 붉은 기운.
더 나아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주변, 재해의 방벽.
마치 풍선에 붉은 가스가 들어차 부풀어오르듯 검은 기운과 맞닥트려 생겨났던 장벽이 터질것처럼 밀려나며 출렁거린다!
이제 곧 있으면 장벽이 깨진다!
그리고 이는 곧 출발의 신호!
표정이 밝아진 가주들이 이내 찝찝한 얼굴로 저 너머 도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잘한 선택이겠지요?"
"... 가족들을 지킨 겁니다. 그리고 사실 저들에게도 우리 군대는 필요없을거고."
어느새 터져나오던 굉음이 그친 함교쪽을 바라보며 고르그가 덤덤히 말했다.
자신들에게나 군대가 필요했지 사실 칠국연합들에게 필요한건 군대가 아니었다.
힘자체는 그들이 넘치게 가지고 있을테니까.
그들에게 필요한건 다른 섬들에게 보여줄, 자신들이라는 상징성 그자체.
협력하는 이는 안전히 살려 자신들이 거둔다.
이를 보여준다면 사방에 흩뿌려진 자신같은 이들의 협력을 순조로이 얻을수 있을테니까.
자신들이 다른 섬들에서 건너온 이들의 증언을 듣고 비로소 온전히,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자. 들어갑시다. 이제 곧 출발할것 같으니."
고르그가 가주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몸을 돌렸다.
도시쪽도 끝났고 자신들이 탄 배쪽도 끝났다.
저 위, 함교 창가쪽에서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소녀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든 고르그가 자신들에게 배정된 선실로 향하려던 그때.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터져나오는 괴성.
이어 다급하게 몸을 돌리는 소녀의 모습에 함교실을 바라보던 고르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
지하.
쿠아아아아아앙!
우아아악...
여전히 짐승들의 장벽 안에 갇혀있던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위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비명성이 점점 더 먼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모조리 죽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
거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악!"
어느새 지척까지 올라온 <손톱>의 소리에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비명성을 내질렀다.
피, 피, 피.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린 순간 지하에 있던 녀석은 마치 걸신이 들린것마냥 게걸스레 이를 빨아들이며 미친듯이 지상으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층계를 찢어발기는 것은 두개의 거대한 손일까?
아니면 무언가?
확실한 것은 하나.
그것의 소리는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에서까지 터져나오고 있었다는 것.
직경 2km에 달하는 거대한 원통을 그득 메우며 말이다!
그리고 그 속.
쿵쿵쿵...
"너! 이거 지금 당장 풀어! 빠져나가야할거 아냐!"
"야 임마!"
거칠게 달려온 보르그가 말리는 아니타를 무시하고는 칼을 쥔채 무릎꿇은 강태석의 멱살을 잡을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아니, 실제로 당장이라도 후려칠 기세.
지상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으니 어떻게 해서라든 이곳을 헤쳐벗어나 빠져나가야한다!
실제로 안절부절하던 몇몇은 당장이라도 자신들을 둘러싼 짐승의 장벽을 공격해 찢어발기고 나갈 기세.
"이 새끼가... 선넘지 말랬지."
강태석의 코앞까지 머리통을 들이미는 보르그의 태도에 참다 못한 아니타가 손에 든 연검에 힘을 준 순간.
터업.
"... 엇?"
자신의 안면을 감싸는 손아귀에 보르그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모르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어진 확실한 다음단계.
콰드드드드드드득!
"커헉..."
".....!!!!!!!!!"
칼을 쥔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뻗어 단박에 보르그를 땅에 처박아버린 강태석의 모습에 옆에 서있던 아니타가 놀라 한발 물러섰다.
평범해보이는 체구.
자신조차도 보르그를 힘으로 이길수는 없다.
한데 한손으로 저 거대한 체구를 그대로 내리꽃아?
그런 아니타가 바라보는 강태석의 주변 전신을 서서히 둘러싸기 시작하는 어둠.
콰르르르릉...
콰르르르릉....
유리조각의 결계들이 만들어내는 빛으로는 도저히 감출수도 없는 짙은 어둠이 서서히 강태석의 전신을 감싼다.
아니타는 순간 저 지하, 무저갱 깊은 곳에서 어둠이 솟구쳐 그 전신을 휘감은줄 알았을 정도.
이윽고.
"크흐흐. 으하하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
칼을 쥐고 실성한듯 웃기 시작하는 강태석의 모습에 옆의 아니타가 흠칫하며 바라보았다.
**
좋게 가려해도.
도와주는 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