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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석이 써놓은 칠판의 보기를 본 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보기 중 앞의 것들은 그냥 말이 안 된다고.
애초에 앞의 세 개는 그냥 저 거대한 구조물에 대한 도전 그 자체.
그리고 한눈에 봐도 위압적인 저런 것을 이 배에 탄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네 번째도 마찬가지.
딱 봐도 귀중한 전략적 위치의 구조물을 아무 어중이떠중이나 지나게 해줄 것 같지가 않다.
자신들을 칠국의 이들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이미 저번 섬들에서 충분히 맛본 상태.
결국 남은 선택은 한 가지.
저 거대한 구조물, 자신들 세계로 난 입구로 들어가 궤도 엘리베이터의 세상을 뚫고 저쪽 벽면으로 나아가는 것.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건 있다.
저 안의... 상황.
"이 사람들.... 기록에 따르면 도망쳐 나왔다며? 1년이나 버티다가? 그리고 저 고철선 안에서 다 죽었다지."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지만 그뿐.
그들도 알고는 있었다.
딱히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걸.
그들은 저곳을 통과해야 한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들을 향해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고철선에서 물자를 챙길 만큼 챙겨서 출발합니다. 다 챙길 수는 없으니 무기와 귀한 것들 위주로요. 서둘러주세요."
오시리스는 육상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고철선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수리까지 남은 시간, 대략 여섯 시간 정도.
그동안 물자를 최대한 챙길 만큼 챙겨 고철선이 도착했었을, 그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왔을 궤도 엘리베이터의 무너진 구멍으로 가는 것이 목표.
그런 강태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여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다투어 바깥으로 향했다.
**
고철선, 기관실 지하.
"이건 못 가지고 가겠지?"
쿠르르르릉...
선명한 적색의 휘광을 뿜어내고 있는 기계를 가리키는 강태석의 말에 따라온 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달리안의 말에 강태석이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건 이 거대한 고철선을 움직이는, 은빛 바다의 기계 벌레들을 집어삼키며 에너지와 재료를 얻는 웨일-엔진.
사실 거대한 고철선의 크기에 비해 그들 눈앞에 있는 웨일 엔진의 크기는 크지 않았다.
대략 직경 20m 정도?
물론 작지 않지만 이 거대한 고철선을 홀로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라는 건 분명하다.
거기에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으며 배에 실을 수도 있는, 그야말로 탐나는 물건.
하지만 이 웨일 엔진이라는 건 단순히 기계 벌레들의 코어를 집어삼켜 에너지로 변환하는 작용을 하는 녀석일 뿐.
고철선 아래, 기계 벌레들을 우르르 삼키는 그라인더와 변환한 에너지를 출력으로 만들 커다란 구동부가 없다면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팔다리도 없이 심장만 떨렁 들고 다니는 셈.
그리고 상대적으로 작은 웨일 엔진과 다르게 이 커다란 고철선의 구동계와 그라인더는 도저히 자신들 배에 싣고 다닐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다.
"아쉽네. 그럼 올라가자고."
그러며 앞장서려는 카트란을 향해 엔진을 보고 서있던 달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트란. 나는 벽을 어떻게 넘는 거예요?"
그런 달리안의 말에.
"..."
멈칫하며 선 강태석이 계단 아래 달리안을 바라보았다.
벽을 어떻게 넘냐고?
사실 테크니컬이라는 직업은 벽을 넘는다는 개념이 애매하다.
말하자면 정보 연산처리능력과 관련된 문제.
기계 사냥꾼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 생명체로써의 한계를 넘고 육체를 재탄생시켜야 하듯.
화기 전문가가 감당하기 힘든, 이번에 아린이 얻은 <유물>과 같은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뇌구조와 마력 회로, 신경계를 필요로 했듯.
테크니컬 같은 직업 종류는 보통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스킬이나 설계도에 관련된 뇌구조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B라는, 도저히 인간의 뇌나 연산능력, 직감 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인간과는 또 다른 형태의 뇌신경계나 유기 조직, 연결구조를 지녀야 한다는 것.
이는 지성과는 또 다른 문제며 오히려 육감이나 초능의 영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화기 전문가나 테크니컬 같은 이들이 벽을 넘는 방법은 보통 셋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타고나서 그냥 숨만 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다음 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거나.
아니면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물건을 과부하에 가깝게 받아들여 도박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벽을 넘어서거나.
아린의 경우는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적절히 결합된 케이스.
하지만 달리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달리안의 경우는...
"처음부터 벽 같은 건 느껴지지 않지 않았어?"
강태석이 달리안을 직시했다.
그렇다.
달리안은 애초에 벽 같은 게 없었다.
그저 당장 다룰만한 <고급> 물건이 없을 뿐.
그런 강태석의 말에.
"... ...."
달리안이 눈을 감은채 예전 도시, 카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
시장, 오토른은 달리안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그토록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며, 말 그대로 광자포를 위해 <씨앗>에 목숨을 걸어가며 간신히 넘은 것 같았던 벽이 달리안에게는 애초에 존재조차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사실 오토른의 경우는 스스로가 씨앗에 거의 세뇌당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홀린 듯 뇌가 터질 수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간신히 광자포를 건축할 수 있을 정도의 뇌 역량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안은 달랐다.
애초에 <씨앗>의 학문 정도는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상태.
그렇기에 버프 기술의 학습도, 광자포 개념의 이해도 달리안에겐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저 이해할만한 것을 이해하고 배울만한 것을 배웠으며, 단지 거기서 그친 것은 <공부>할 만한 것들이 그 두 가지 뿐이었기 때문.
벽을 어떻게 넘는지 감이 안 잡히는 것도 간단하다.
애초에 벽이란 게 보이질 않는데 넘는 법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런 강태석의 말에.
"역시...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달리안을 보며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마음 편하게 먹어. 너 같은 경우는 지금 당장 뭘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쓸만한 기술이나 설계도가 들어오면 그때부터 시작인 거지."
달리안에서 지금 없는 건 단지 스스로가 이해하고 사용할 만한 설계도들 뿐.
인류의 문명은 홀로 누군가의 힘에 발전하지 않았다.
달리안, 혹은 그 이상의 천재와 테크니컬들이 모여 만들고 탄생시킨 역작들은 아무리 달리안이 벽을 넘은 상태라고 해도 혼자 상상하여 만들어낼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미 그걸 이해할만한 역량은 갖추었으니 그런 물건들을 얻으면 당장 배나 다른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다는 게 된다.
물론 이해와 제작, 혹은 사용은 또 별개의 영역이긴 하지만.
"구경하다 오고 싶으면 좀 구경하다 오고. 나는 올라갈 테니."
이에 달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태석은 그런 달리안을 내버려 두고 위로 올라갔다.
혼자 있긴 하지만 어차피 위 계단은 수리가 끝난 베티가 지키고 있으니 별일 없을터.
"난 간다."
<바쁜 몸이네요. 잘 올라가요.>
키이잉...
철창을 이리저리 흔드는 베티를 놔둔 채 강태석은 위로 올라갔고.
그런 강태석이 사라진 아래, 달리안이 적막한 기관실을 조용히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쿠르르릉...
"잘 있으렴."
웨일-엔진을 쓰다듬은 달리안이 이내 몸을 돌려 위로 향했다.
이 물건은 왠지 설계도가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차피 생산시설이 없다면 생산할 수도 없는 법.
광자포를 어느 정도 이해했고 시간만 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 기술을 배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중앙 플랜트의 생산력을 모조리 동원해도 재료 확보에 1년 가까이 걸린 것들을 배 위에서 뚝딱 만들어낼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설계도도 없지.'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 만져보긴 했지만 이제 미련을 떨굴 차례.
터엉...
터어어엉..
계단을 타고 위로 향하는 달리안에게 따라붙은 베티의 묵직한 발소리가 아래, 적막해진 기관실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꼬르륵..
웨일 엔진 외부, 내부 확인용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30cm 원형창.
코어와 분리된 채 잘 갈려 걸쭉한 액체가 된, 기계 벌레 용액이 임시 보관탱크 속에서 꾸륵 소리를 내며 거품을 토했다.
**
쿠구구구...
거대한 은빛의 배 오시리스는 물자를 어느 정도 옮겨 담고는 고철선을 떠나 북쪽으로, 더욱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USB의 기록 속에 남아있던 궤도 엘리베이터의 뚫려있는 구멍.
쿠르르릉...
제대로 고쳐진 오시리스의 구동부가 기분 좋은 진동으로 배를 휘감으며 은빛의 바다를 갈랐고.
그위 갑판에서 점점 더 가까워져 가는 거대한 검은색의 장벽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숨을 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전력 강화는 했다.'
벽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고철선에서 얻은 물건들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 동안 각 쉘터들은 그야말로 고철선 전체를 뜯어내다시피 하며 안의 물건들을 살폈다.
그중 대다수의 것들이 무기.
식음료 등의 일반적인 물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수준의 무기들이 컨테이너들마다 그득 쌓여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건 엑소-슈트.
강화된 금속 섬유 근육에 단단한 외장.
어찌 보면 군파츠의 바디슈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다.
개인용과 군용.
자율운영모드나 탐지 등의 여러 가지 기능적 측면에서야 바디슈트가 뛰어나겠지만.
양산성, 안정적인 전투력을 위한 유지보수, 기타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한다면 엑소슈트의 종합전투력을 따라올 수가 없다.
말하자면 바디슈트는 부자들을 위한 사치품에 가깝지만 엑소슈트는 철저하게 군대에서 사용될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것.
그중 가장 큰 차이는 엑소슈트의 양손에 탑재가 허용된 두정의 무기.
디스트로이어-EX.
레일건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지만.
결국 개인용 화기인 레일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위력을 지닌.
기존 레일건 대비 9배 질량을 지니는 탄자.
레일건의 작은 내장 축전팩과는 비할 수 없는 충전량을 자랑하는 두 개의 전용 축전팩.
3t에 달하는 육중한 전투중량.
맨몸 대비 수십 배의 탄자를 싣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강화 근력.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
아무리 초인이라고 해도 고작 인간 수준의 질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반동의 제약이 풀린다.
똑같은 화약병기라도 소총과 대포의 위력이 다르듯.
똑같은 레일건이라도 차원이 다른 위력이 나오는 것.
솔직히...
'저걸로 화망을 구성하면 검기 사용자도 갈린다.'
키이이잉...
지금쯤 오시리스 갑판 아래서 핵융합 엔진의 버프 필드를 통해 충전되고 있을 수천 대의 킬링 머신들을 떠올리며 강태석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검기라고 해도 무적의 기술은 아니다.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무게의 쇳덩어리를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상상할 수 없는 양을 퍼붓게 해주는 워머신.
어느 정도 싸울 수야 있겠지만 수십 대를, 그것도 전장에서 만난다면?
답이 없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쿠르르릉...
어느새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거대한 검은 장벽을 바라보며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강화된 전력을 손에 넣은 건 좋지만 앞으로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것들도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기에.
하지만 고민도 잠시.
'뭐. 언제는 안 그랬다고.'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도, 레벨이 강해졌을 때도 개인화기는 언제나 위협적이었다.
종류가 바뀌었을 뿐, 상황은 비슷한 것.
어차피 전쟁이 극심한 세계관들은 병기들이 상상 이상으로 발달해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염두에 두고 진행할 수밖에 없고.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차라리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라도 다양해졌으니 지금이 훨씬 낫다.
치직...
어둠을 손끝에 불러낸 강태석이 그 끝에 튀는 스파크를 바라보던 그때.
쿠르르르릉...
"어어? 저거 뭐야."
"도시 아냐?"
가까워진 금속 튜브.
웅성이기 시작하는 갑판 위 사람들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