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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거주구.
강태석이 처음 이곳에 도달했을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지상고 4000km 부근.
마치 예전 SF영화에 나오는 원통형의 우주콜로니처럼.
중력장에 의해 원형의 내부표면이 지면의 역할을 하는.
거기에 층층층층 크레페처럼 바닥을 쌓아올려 공간효율을 극대화한.
더그의 말처럼 차원좌표지정구였다면 안쪽이 텅텅 비어있었을 것이다.
타르늄금속 증식구역이었다면 반대로 자라나는 죽순처럼 꽉꽉 들어차있었을 것이고.
말하자면 이 거주구는 그 중간쯤의 밀도.
'하긴. 그러니 공격받은 거긴 하지.'
결국 <인간>이 이 안에 살고 있었으니 제대로 공격을 받은것.
뻥 뚫린, 무언가 베어문듯한 거대한 입구를 바라보던 강태석이 갑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저 안으로 걸어들어갈 겁니다. 배는 잠수시켜서 저쪽으로 보내고."
"... 설마설마했는데."
더그와 페리트란이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놀랍게도 이 금속의 거대한 원통은 이 은빛바다에 살짝 떠있는 형태.
믿기 힘든 강도에 비해 믿을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중량과 튜브형태의 구조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록 구멍난 틈으로 은빛 액체가 들어차 어느정도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바닥 아래에는 틈이 있는 상황.
그러니 오시리스는 잠수시켜 그쪽으로 보낸다.
아래 갑문을 모두 열고 천천히 은빛액체를 채워 가라앉히면 아래를 통해 저 건너편으로 보낼수 있을터.
당연히 이 안에 있으면 초인이고 나발이고 모두 짓눌리고 숨막혀 죽는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은빛액체의 압력과 부족한 호흡을 천천히 아래로 지나가는 동안 온전히 견뎌내야할테니까.
그러니 일단 배만 아래로 넘긴다.
그리고 자신들은 우그러지면 안될만한 물자들과 중요한 물건들은 모조리 엑소슈트에 짊어지고 반대쪽 구멍을 향한다.
운좋게도 고철선의 이전 기록에는 그들이 가던중 발견한 반대편 구멍의 위치도 있었다.
다만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고도 배를 구하지 못해 저 너머로 가지 못했을뿐.
구멍의 위치는 동쪽으로 대략 45km.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무인으로 어느정도 조종되는 배를 도착시켜 그곳에서 타고 다시 북쪽을 향해 떠난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한다.
시간내에 이 세계를 지나기 위해선.
"각 쉘터의 것들을 챙기면 될겁니다. 2시간 안에 모두 준비를 마치지요. 저도 준비할테니."
어차피 모든 물자와 병기들은 각 쉘터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상황.
이럴때는 편하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갑판위의 이들이 긴 숨을 내쉬고는 굳은 표정으로 흩어져 아래로 향했다.
**
"베티. 괜찮겠어?"
<맡겨주세요. >
지하, 엔진실에 있던 달리안의 말에 개조된 베티가 싱긋 웃었다.
어느정도 근거리는 무인으로 조종된다지만 혹시나 이상이 생겨 수동으로 운전해야할수도 있다.
베티는 그때를 위한 보험.
달리안에게 어느정도 권한과 반대편 입구의 좌표기록을 전해받았고.
기계라 은빛바다의 압력에도 어느정도 견딜수 있으며 호흡 또한 아무런 문제없다.
<곁에서 지켜드려야하는데 말이에요.>
"아하하. 괜찮아. 크탄이 지켜주겠지."
지금쯤 위에서 묵묵히 등짐들을 지고 갑판에 서있을 크탄을 떠올리며 웃는 달리안을 보며 베티가 마주웃었다.
속으로 기묘한 느낌을 받으면서.
'뭔가 코어부분이 간질간질한데... 크탄도 이러려나.'
도시, 카툰에서 괴인에게 자폭하고 주인에 의해 몸이 재생된후 생겨난 느낌.
이 변화가 무엇때문에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기묘하면서도 썩 불쾌하지 않은 그 기분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을 뿐.
하지만 고민도 잠시.
<잘 다녀오세요. 저쪽에서 뵙지요.>
베티가 달리안을 향해 짤막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한손을 들고 우아하게 상체를 꾸벅 숙였다.
**
쿠르르릉...
오시리스가 은빛바다를 지나 갑판부위를 베어물린 층들중 하나에 천천히 가져다대었다.
그들이 내릴 층의 높이는 대략 20m 정도.
멀리서 보았을때는 마치 크레페처럼 얇아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각 층마다의 위세도 장난이 아니다.
그저 이 궤도엘리베이터라는 구조물이 너무나 거대했기에 층층들이 얇고 갸냘파보였을 뿐.
그리고 갑판 근처, 자신의 전용객실에서 군파츠가 바디슈트를 벗은채 창밖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엑소 슈트가 활동하기에는 적당한 구조가 아닌것같은데."
온전한 혼잣말.
그때.
"엑소 슈트를 입으려고? 바디슈트가 아니라?"
"카트란?"
객실 입구에서 껌을 질겅거리며 묻는 강태석의 말에 멈칫한 군파츠가 이내 혀를 찼다.
"어쩔수 없지. 두개를 동시에 입을수는 없으니. 나는 둘다 다룰수 있으니 지금 당장은 더 유용한게 좋고."
군파츠가 자신의 옆에 우뚝선 바디슈트를 애증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의 목숨을 여러번 구해준 고마운 녀석.
이녀석을 입고 자신은 근거리 전투능력을 대폭 향상시켜 원거리와 근거리, 모두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며 싸울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
'이 녀석도... 나도 한계야.'
군파츠가 바디슈트의 표면을 매만졌다.
아까전 엑소 슈트에 장착된 디스트로이어를 도시에서 시범사격해보고 바로 알았다.
이제 바디슈트 정도로는 그 공격을 견디기 힘들다는것.
말하자면 바디슈트는 사치품.
엑소슈트는 오직 살상력에만 그 위력을 집중한 진짜 무기.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건 자신의 실력.
벽을 넘었다면 카트란이나 아너스빌처럼 이녀석을 입고 앞에서 싸울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은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녀석들과 똑같이 싸우고 싶다는 것은 과욕.
반면 엑소슈트를 입으면 여전히 자신은 나름 제법 잘 싸우는 실력자중 하나다.
비록 예전처럼 날뛰지는 못하고 여러 병사들중 하나라는 느낌으로 싸워야겠지만 말이다.
"..."
침묵을 지키는 군파츠를 보던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생각하던게 있어 오긴 했는데 저걸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물론 조금 아깝기도 하고 조금 도박성도 있긴 하지만...
"... 그래. 보니까 내가 빛진게 많지 너한테. 너도 나한테 빛진게 많지만."
이해할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강태석이 허리춤에서 미묘하게 검은 빛이 도는 황금색, 벨페른의 칼을 뽑아들었고.
그런 강태석의 행동에.
"칼은 왜 뽑아?"
중얼거린 군파츠가 이어 바디슈트로 성큼 다가오는 카트란의 행태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공격을 할리야 없다는건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말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니 본능적으로 일어선것.
"깜빡이좀 키고 들어와라 이 자식..."
"너. 이런 바디슈트같은 사치품들이 왜 비싸고 좋은지 알아?"
"...?"
바디슈트 앞에 칼을 들고 선 강태석의 말에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군파츠를 향해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원래 이런 것들은 숨겨진 옵션들이 많거든. 상상하기 힘든 것들도 되고."
"...?"
"말 그대로 엄청 재밌는 장난감이라 이거야."
터엉!
강태석이 벨페른의 칼로 텅 하고 바디슈트를 건드리자 두터운 흉부장갑이 덜컹 열리며 안에서 시퍼런 코어가 드러났다.
뻥 뚫린 동공, 그 사이에서 이글이글거리는 강렬한 플라즈마.
이를 바라보던 강태석이 군파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안쓸거랬으니까 운나쁘게 망가질수 있어도 상관없지?"
"아니 뭔 소리냐고 아까부터."
"일단 해보긴 하는데 벽 넘을지 말지는 몰라. 그리고 벽 넘으면 나 열심히 도와줘 좀."
"...??!!"
그와 동시에.
푸욱.
파자자자자자자자자작!
"!!!!!!!!!!!"
강태석이 벨페른의 칼을 꽃아넣은 코어가 시퍼런 스파크를 튀기며 객실 안을 온통 퍼런 광채와 열기로 들이채우기 시작했다.
**
콰지지지지지지직!
뭐야?
군파츠 쪽이다!
갑작스레 퍼져나온 시퍼런 빛에 갑판의 이들이 놀라 우당탕 달려오는게 느껴졌고.
그런 소음과 섬광속, 강태석이 덤덤히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현재 바디슈트 메인코어가 ???????에 침습을 받습니다.>
<이물질 감지... 가치평가중... 마력금속 아르카나 및 기타 사념 감지>
<포식장갑기능. 활동개시.>
동시에.
콰드드드드드드득!
콰득!
"!!!!!!!!!!!!!!!!!!!!"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코어에 뽑힌 칼을 뽑아 게걸스럽게 삼키기 시작하는 바디슈트의 모습에 군파츠가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단지 강철로 보이던 하부안면덮개파츠가 쩍 벌어져 흉흉하기 그지없는 시뻘건 색의 이빨이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난 네모난 이빨들이 그 어떤 충격에도 이 하나 나가지 않던 벨페른의 칼을 통째로 우걱우걱 으깨고 집어삼켜 넘긴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광경.
"야야야야야! 저거 뭐야!"
"말했잖아. 숨겨진 기능."
"저딴걸 입으라고 줬다고!"
군파츠가 기겁을 하며 버럭 소리쳤다.
좋은건 좋은거고 흉물스러운건 흉물스러운거다.
스스로 움직이며 먹을 것을 집어삼키는 병기라니?
심지어 그 모습이 흡사 짐승의 그것과 같이 게걸스럽고 난폭하다.
이제까지 저런것의 뱃속에 들어가 움직였다니?
거기다가 그쯤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칼 한자루를 집어삼킨 바디슈트.
이어 몸 전체에 일어나는 변화.
콰드드드득...
콰득...
콰드드드득...
울룩!
몸 전체의 금속들이 무슨 기포마냥 울룩불룩거리며 부풀어오르고 자라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풀어올랐던 파츠 각부위는 이내 훨씬 더 쭈그러들고 압축되어 매끈한 표면을 드러냈다.
마치 건담처럼 투박하던 표면이 우아하고 부드럽게.
3m에 달하던 커다란 덩치는 2m 수준으로, 훨씬 더 날렵하고 표홀하게.
이어 드러난건 얇디얇은, 마치 예술품과 같은 전신외장갑옷.
피복슈트와 비슷한, 몸에 딱 맞는 유려한 라인을 뽐내지만 각부위는 매끈하면서도 얇은 장갑들로 충실하게 둘러 쌓여있다.
"입어봐."
"..."
완전히 변화를 마치고 자신의 속내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바디슈트를 홀린듯 바라보던 군파츠는 강태석의 말에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듯 갑옷 안으로 한걸음 발을 옮겼다.
이어지는 변화.
철컥!
쿠드드드득!
우득!
단번에 장신의 군파츠를 집어삼키듯 전면부를 집어삼킨 바디슈트, 아니 포식장갑이 이제는 숫제 군파츠의 몸마냥 부드럽게 움직인다.
이어 전신 표면에 떠오르는 금빛의 회로들.
키이잉...
<... 이거 설명 뭐야? 강제진화촉진장치 가동?>
"말 그대로야. 네 전신 육체에 계속 과부하를 거는거지. 딱 안죽을 정도로."
재능있는 이들은 숨만 쉬어도 벽을 넘어간다.
하지만 애매한 재능이 있는 이들은, 혹은 재능이 부족한 이들은?
<되는 법>을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에 가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야한다.
안되는걸 되게하는 이 과정은 실로 가혹하고 복잡하기에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거나, 혹은 조금만 과하거나 부족해도 십중팔구 불구가 되거나 실패할수있는 리스크를 내포한다.
반대로 올바르고 검증된 방법으로 적확하게, 끊임없이 자극을 가해준다면?
벽을 넘을 확률을, 최소한의 리스크로 대폭 끌어올릴수 있다.
그게 스스로와 주인을 끊임없이 강하게 만드는 포식장갑의 두번째 기능.
"만약 벽 넘으려면 넘기전까지는 한동안 엄청 힘들거야. 못넘을수도 있고. 괜히 과부하때문에 위험할수도 있으니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해도..."
<카트란.>
"응?"
<안아줄까?>
"... 아냐. 사양하지."
쩌어어어억!
아직 배가 고픈듯 입을 쩌억 벌리는 전면 흉부장갑의 이빨들을 본 강태석이 잽싸게 군파츠의 포옹을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