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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높이 1.5m 금속상자.
그 안으로 전신이 억눌려 잠겨있고 빼꼼 튀어나와있는건 목 위의 머리뿐.
어지간한 금속은 맨몸 맨손으로 뜯어내고 찢어발기는 검기사용자들을 위한 포박.
물론 저 금속상자역시 시간을 준다면 검기사용자는 무식하게 안에서부터 뜯어버릴수 있지만.
그런 낌새가 보이는순간 옆에 겨눈 엑소슈트의 디스트로이어로 바깥에 드러나있는 머리통을 드르륵 갈겨버리면 그만이다.
검기사용자에 대한 금속가격대비 가장 이상적인 포박.
그들조차 부수기 힘든 아르카나나 아르카둠같은 금속도 있지만 이건 고작 구속용으로, 그것도 통짜로 쓰기에는 너무 비싸고 귀하다.
'아주 잘배웠네 잘배웠어.'
금속상자에 포박되어있던 강태석이 길게 숨을 내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눈앞, 여인.
그 뒤의 2남 3녀.
그리고 서있는 수많은 엑소슈트들.
뭐 딱 봐도 외통수다.
일단 리틀월드의 제한시간이고 뭐고간에 눈앞에 집중해야하는 상황.
그런 강태석을 향해 거대한 닻을 든 사내가 툴툴거리며 내뱉었다.
"아니 그런데 이새끼는 왜 가진게 하나도 없어. 뭔가 당연히 귀한게 있을줄 알았는데."
사슬닻을 두른 사내의 말에 적검 여인과 소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두른 수상쩍은 어둠.
레벨대비 이해할수 없이 강력한 육체.
갑작스레 나타났다 스러지는 은빛물결들까지.
하나하나가 누가 봐도 귀하고 특별해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특별한 병기나 아티팩트를 두르고 있을줄 알았는데 이게 왠걸?
상자에 넣기전, 소녀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아주 그냥 싹다 벗겨서 탈탈 털었음에도 불구하고 맨몸뚱이.
가진게 하나없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반응에 강태석이 눈을 꿈뻑 감았다 떴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벨페른의 칼 가져왔으면 털렸겠는데.'
전마강갑은 몸안에, 칠채영창은 몸주변에.
여의의 나노머신은 왼손안에 있고 나머지는 스킬들.
말 그대로 털리고 싶어도 털릴수있는 것들이 없다.
이것때문은 아니었지만 오기전에 군파츠에게 벨페른의 칼을 주고온게 다행일 정도.
그런 이들의 사이, 강태석의 앞에 서있던 담배 여인이 버럭 소리쳤다.
"그게 뭐가 중요해. 우리가 드디어 역사적인 순간에 도달했다는 게 중요하지!"
버럭 소리친 여인이 이내 강태석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이렇게 적절한 관객까지 나타나고 말이야."
"..."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우리 계획을 알고 온거지? 너희 칠국 놈들이?"
이에 강태석이 침묵을 지키자 담배 여인이 연기를 후 뿜으며 웃었다.
"너희 놈들은 우리를 진짜 너무 무시해서 문제야. 대충 알았으면서 너같은 놈 하나만 보내? 방해하려면 더 보냈어야지. 작정하고."
그러며 웃은 여인이 뒤쪽, 자신들 수석기술자이자 테크니컬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준비는 끝났고 방해하려던 변수도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실행만이 남은 상황.
"보여주자고."
그런 여인의 말에 테크니컬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키이이이잉...
광장 한가운데 이중으로 설치되어있던 은폐막이 스러져감과 동시에.
쿠구구구구...
"... 이런."
"멋지지?"
포신길이 45m.
몸체 길이 68m.
광장 한가운데서 드러난 거대한 초중전차, <마울러>를 보며 여인이 히죽 웃었다.
**
어지간한 빌딩만큼 육중하고 두터운 포신.
그 주변으로 나있는 수많은 회로와 기계장치들.
그리고 그렇게 우뚝 서쪽을 겨누고 선 포신을 지탱하는 육중한 몸체와 지지대까지.
스타 좀 해봤다면 누구나 알법한 <그 탱크>의 <그 모드>를 더욱 육중하게 빚어낸듯한 중전차의 모습에 강태석이 혀를 내둘렀다.
이런걸 완성시켰다니.
마울러.
말 그대로 공성병기.
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는 공성병기라 하면 조금 어색하니 정식명칭은 대 거대구조물 파괴용 병기.
아까도 말했듯 엑소 슈트의 디스트로이어는 이런 성벽이나 고철선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파괴하기에 위력이 부족하지만.
눈 앞에 드러난 병기는 말 그대로 그런 거대한 구조물들을 정면으로 후려쳐서 <갈아 으깬다>.
유효사거리 120km.
현대적인 전차와는 궤가 다른 기술력에 궤가 다른 파괴력과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이 시대에서도 극히 유효한 전쟁병기.
이걸 여러대 세워두고 뻥뻥 퍼부으면 엑소슈트고 나발이고 그냥 모조리 갈려나가고 박살이 난다.
차원이 다른 위력, 차원이 다른 사거리.
그런 강태석의 얼굴과 마울러를 번갈아 흐뭇하게 감상하던 여인이 손을 한번더 따악 튕기자.
쿠르르르릉...
서쪽, 포신이 향하고 있던 방향의 성벽이 위아래로 열리며 강태석이 지나왔던 너른 금속의 벌판을 창문처럼 드러냈다.
위아래로 주욱 뻗은 금속의 바닥과 천장.
그 끝으로 아주 작게 보이는 지평선과 천장 사이의 틈새.
제대로 보이지야 않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운하>.
지나가려던 이들을 모조리 갈아버린 저주받은 관문.
동시에 자신들을 이 동쪽의 대지에 모조리 몰아두고 가둬버린 저주.
궤도엘리베이터의 귀한 것은 <서쪽>에 있을거라고 판단한 수많은 이들과 세력들이 끊임없이 서쪽의 대지를 지나 운하, 그 너머로 가려고 애썼지만.
바다로도, 육상으로도.
이 궤도엘리베이터의 튜브 내에서 서쪽으로 향한 세력들중 이제껏 돌아온 이들은 단 하나도 없다.
이제는 그저 자신들같은 몇몇 세력들만이 남아 이제는 아무도 넘보지 않는 그 경계의 황무지를 지킬뿐.
'그래. 생각해보니 운하 놈들이 아니라 옆 섹터 놈들일수도 있겠는데?'
저 너머, 운하방향을 바라보던 여인이 문득 든 생각에 사로잡힌 녀석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운하, 칠국연합에서 자신들 계획을 막기 위해 온 놈이라기에는 너무 조촐하다.
제법이긴 했지만 녀석들이 가진 세력의 볼륨에 비하면 하나는, 그것도 갓 비기너에 도달한 녀석은 지나치게 약소한 수준.
하지만 옆섹터에서 자신들을 훼방놓으려고 온 놈이라면 대충 말이 된다.
"하하. 어디려나. 저기 파르트? 아니면 레멜른 놈의 생존구역?"
넓게 펼쳐져 서쪽의 모든 시야를 담고있는 창 너머, 지평선과 천장 사이사이 자신들의 것처럼 우뚝 선 성들을 가리키며 여인이 웃었다.
이 근방의 성은 두개.
그리고 둘 모두 자신들과 반적대관계.
하지만 뭐가 되었건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시범사격은 필요했는데.
"좋아. 일단 레멜른 쪽부터 시작해볼까?"
"... 저기 뭐 잘못 집고 있는거같은데."
강태석이 뭐라고 하기도 전.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서쪽으로 길게 뻗은 포신이 살짝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4층, 레멜른 생존구역.
"위쪽 또 시끄럽네."
"하루이틀인가요."
의자 위, 어디선가 아련히 울려퍼지는 총성을 듣던 사내가 옆에 선 수하의 말에 하품을 내뱉었다.
하긴.
이 빌어먹을 땅에 비명소리와 총성이 안울려퍼지는 날이 있던가.
이번에는 제법 요란한게 국지전은 아닌듯 했지만 그렇다 쳐도 1주일에 한번씩은 있는 행사 수준의 일이다.
이어 사내의 관심사가 옮겨간 곳은 5층이 아닌, 4층.
그들이 살고있는 구역, 그중에서도 근방.
"그 놈들 구역 어떻게 우리가 못먹나? 이제 한바탕 뒤집을 때도 됐잖아."
"시카른 쪽이요? 그쪽은 좀... 엑소슈트는 우리가 더 많아도 그 다섯이 거슬리지 않습니까."
"하긴."
하루가 멀다하고 담배를 피워대는 그 년, 시카른을 떠올린 사내 레멜른이 입맛을 다셨다.
시카른과 그 다섯마리 개.
예전 도시가 망할때부터 애지중지 키우더니 이제는 주변 쉘터에서 당할 녀석들이 없는 수준으로 자라났다.
본격적으로 승부를 걸고 싶어도 그러다 자는 사이 머리통이 날아갈까봐 무서워 못건드리겠는 수준.
전쟁병기, 검기사용자 놈들은 전장도 전장이지만 무엇보다 암살이나 전투에서 그 위력이 빛나는 법이다.
"뭐 정면승부는 우리가 이기니까. 그냥 성이나 지키다가 기회를 엿보면 되겠지?"
이에 옆의 수하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려던 순간.
!!!!!!!!!!!!!!!!!!!!!!!
섬뜩무시한 기운이 훅 하고 쉘터 안의 둘을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성벽 안쪽, 생존구역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거대한 폭염과 섬광이 그 둘마저 삽시간에 휩쓸어버렸다.
**
콰아아앙...
"... 와우."
"..."
"으..."
아르릉...
창너머.
서쪽 오른켠, 레멜른의 성이 있던 자리에서 터져나오는 거대한 섬광을 보며 닻 사내와 적도여인, 소녀와 늑대귀소녀가 차례대로 침음을 토했다.
그들도 나름 이 망해버린 세상을 헤쳐나오며 잔뼈가 굵었다.
사람을 죽이고 탄환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볐으며 셀수도없는 괴물과 싸웠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처음 보는 광경.
콰르르르릉...
저 멀리.
한변이 400m, 높이는 100m에 달하는 거대한 금속의 상자가 포격 단 한번에 한쪽벽면이 모조리 뚫려 무너져내리며 그 안쪽이 화염과 고열로 그득찼다.
엑소슈트나 검기 정도로는 끄떡없기에 말 그대로 <성>이라고 불리우던 물건이었건만 단 일격에!
이 전장의 세계와 성속에서 살아가던 이들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지 않을수 없는 광경.
다만 그 와중에 희열에 가득찬 미소를 띄워올리는 자도 있었다.
여인, 시카른.
이 생존구역의 장이자 다섯 무인의 수장.
"드디어... 드디어 저 오만한 새끼들한테 한방 먹여줄수 있겠구나."
시카른이 레멜른의 성보다도 더욱 서쪽, 지평선 저너머를 바라보며 주먹을 우득우득 쥐었다.
인고의 시간이었다.
자신들도 모를 이유로 북쪽으로 흘러들던 자신들의 도시섬을 반쯤 날려버린 녀석들.
녀석들이 쏟아부은 단 5분간의 함포세례에 섬은 반쪽이 나고 생존자들은 70%가 죽어나갔다.
단순히 큰 덩어리가 <운하>를 막을수도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힘든 멸망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가족과 연인들을 그날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리고 우연히 표류끝에 도착한 이 땅을 전전한지 어언 2년반.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다.
이 마울러라면 충분.
녀석들의 군대도, 함대도, 그 어떤 세력도.
40km가 넘는 거리를 주파하기 전에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한줄 잿더미로 만들수 있다.
저너머, 녀석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운하와 기지, 철벽들까지도!
키이이이잉...
"준비해. 바로 퍼붓는다."
시범사격은 끝났다.
첫 일격으로 혹시 모를 빈틈을 노릴 바퀴벌레를 처리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녀석들 차례.
여인, 시카른의 말에 점잖게 서있던 테크니컬 사내가 고개를 꾸벅이고는 수평선, 저 너머로 포신을 정조준한 그때.
"아 생각났다."
"?"
"그거 어지간하면 쏘지 말지? 나도 좀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데."
"...????"
묶여있던 강태석의 말에 시카른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꺾여올랐다.
**
서쪽, 46km 부근.
운하.
"허허. 혼자 낚시 즐기기 좋은 날이네."
퐁당.
여인과 모든 함대가 떠난 자리.
물자들 사이에 남아있던 청년이 낚시의자에 앉아 낚시대를 유유자적 드리우며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