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01화 (101/221)

101

콰르르르르릉!

시퍼런 청색의 에너지폭풍이 평원처럼 펼쳐진 4층의 바닥과 천장 사이, 플로어 전체를 휩쓸며 내달렸다.

좀비처럼 숙주를 감염시켜 활동하던 균들의 영역도.

이미 마울러에 반쯤 박살나있던 레멜른의 성터도.

그리고... 그나마 굳건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여인 시카른의 성채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푸른 청염의 해일이 몰아닥친 순간 층과 층 사이의 외벽을 구성하고 있던 금속자재들이 모조리 녹아내렸다.

비록 플로어간 층계보다는 무른 재질이기는 해도 엄연히 비상대피구역으로 쓰일 정도로 단단한 외벽.

엑소슈트의 디스트로이어로는 뚫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벽이건만 단 한순간의 격돌에 벽면은 녹아내리지 못하고 아이스크림마냥 줄줄 녹아내리며 안쪽의 속살을 드러냈다.

이어 들이닥친, 여전히 기세가 죽지 않은 청염의 파도.

이제는 쇳물파편마저 머금은 해일이 그기세 그대로 안쪽에 덩그러니 떨어져있던 강태석의 금속상자와 내벽을 통째로 휩쓸었다.

이어지는 2차 파괴의 현장.

콰르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앙!

'쓰읍. 진짜.'

마치 폭풍에 내던져진 나무상자속에 갇힌 마냥.

온몸을 나노머신과 전마강갑으로 꽁꽁 감싼채 머리를 틀어박고 있던 강태석이 그너머로 전해져오는 막대한 열기와 강렬한 진동에 주먹을 우득 쥐었다.

하여간 난리도 아니다.

무슨 이런 곳에서 귀족, <강환> 사용자를 만난단 말인가.

그나마 가볍게 던져준게 이정도.

아직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게 그 증거다.

후르르르륵...

껍질을 감싸고있던 상자는 어느새 모조리 녹아버리고 자신의 몸을 지켜주던 전마강갑과 나노머신들이 끔찍한 열기에 의해 산산히 분해되 녹아내려가던 어느순간.

쿠르르릉....

완전히 휩쓸고 지나간 푸른 불꽃의 해일.

이어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는 온도.

이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강태석이 팔다리를 푼후 엎드린채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방은 그야말로 금속이 녹아내린 쇳물들이 고여 만들어진 아비규환의 지옥.

치이이익...

화르르르르륵...

쇳물과 증기, 시뻘건 아지랑이들로 인해 마치 어딘가 불지옥의 한군데 속으로 들어온듯 하다.

생명체라고는 단 하나도 살아남을수 없어보이는 광경.

하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서도 생명의 흔적이 느껴졌다.

일단 첫번째로는 살아남은 강태석 본인.

그리고 두번째로는... 부리나케 내벽 안쪽으로 도망쳤던 여인과 이를 따르던 생존자들.

물론 모두가 살아남지는 못했다.

"흐어어억... 커헉..."

"쿨럭... 크아..."

시뻘건 연기의 현장속.

여인, 시카른과 주변의 다섯 남녀가 벌겋게 익어버린 피부를 내려다보며, 마찬가지로 익어버린것같은 폐를 통해 고통스레 열기에 찬 신음성을 토해냈다.

안팎이 가릴것없이 모조리 구워지고 익혀진 느낌.

화덕속에 통째로 자신들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굴린 다음에 죽기직전에 간신히 끄집어내준, 그런 기분이었다.

그나마 <벽>을 넘어 육체가 강화되고 몸을 지킬 재간이 생긴 자신들이기에 이정도로 끝난 것.

"허윽... 흐어어어..."

간신히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본 이들은 이내 사방의 광경을 보며 끔찍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인간인지 아닌지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모조리 새카맣게 타버린 섹터의 인원들.

엑소슈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통쨰로 녹아내리고 얽어붙어 보기조차 끔찍한 플라스틱 조형물 꼴이 되어있었다.

그런 이들이 수백, 수천.

녹아내린 금속의 용광로같은 대지 속에 그렇게 눌어붙은 조각상 시체들이 끝도 없이 증기를 토해내며 스스로의 비극을 증명했다.

콰아아앙!

"끄으으으...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여인, 시카른이 익어버린 목구멍으로 괴성을 토해내며 발을 쾅쾅 굴렀다.

끔찍한 통증이 목과 발을 통해 밀려왔지만 그보다도 더욱 고통스런 감정이 온 머리와 마음을 지배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 망할 세상속에서도 이겨내고 살아남으며 지금까지 버텨오는데 성공했다.

한데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모조리 죽어버린다고?

뭔가 건드리면 안될걸 건드렸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건...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총을 든 소녀가 시카른을 대신하여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살아남은 여섯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한마디.

그토록 발버둥치며 살아왔는데 그 끝이 고작 이거란 말인가.

비록 살아남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 갈것같지 않았다.

자신들을 제외한, 또 다른 <살아남은 것>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캬아아아악...

쿠아아아아아아아악!

사방팔방.

아지랑이와 증기, 연기와 화염 너머로 끔찍한 괴성들이 터져나왔다.

이 근방, 성과 성사이에 자리잡으며 살아가고 있던 괴생명체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 인류가 성안에만 틀어박히게 만든 이 지역의 터줏대감들.

비록 강하고 특별하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은 개체들이 있다지만 녀석들 또한 삶의 터전을 잃은건 마찬가지일 터.

그리고 이렇게 깨져버린 균형에 공포와 분노, 광기를 담아 녀석들은 달려들 것이다.

그나마 폭심에서 떨어져 살아남은 자신같은 생존자들을 휩쓸어버리며!

그런 소녀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쿵쿵...

쿵쿵쿵쿵쿵쿵쿵!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수백미터를 훅 좁혀오며 쿵쾅쿵쾅 나타난 거대한 괴생명체가 연기와 증기를 헤치며 그들의 앞에 훅 등장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크기 6m, 인간형을 닮은 거체, 광택이 휘도는 검은빛 피부.

하지만 크기가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건 그 안에 담긴 역도.

콰아아아앙!

내질러지는 주먹은 검체로 육체가 강화된 이들 모두를 짓뭉개버리기에 충분한 수준.

반사적으로 모두가 움직였지만 따라주지 않는 지친 몸의 반응이 한발 늦으려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직!

순식간에 나타나 그 팔을 날려버린 누군가가 그대로 영롱한 칼을 쫘악 휘둘러 주먹을 뻗은 상대의 위쪽에 자리잡은 머리까지 날려버렸다.

등장한 이는 그들에게도 익숙한 얼굴.

"너...?"

"정신차려라. 뭐하는거야."

칠채영창을 빛어 만들어낸 칼로 순식간에 상급 괴수 하나를 처리한 강태석이 칼 끝의 검은 체액을 탈탈 털며 여인을 비롯한 여섯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버튼>만 누르려고 왔는데 졸지에 <핵폭발버튼>같은 것을 누른 상황에 휘말려 온 사방이 재앙덩어리가 된 상태.

하나를 처리했지만 이놈조차 약하지 않다.

심지어 이런 놈들이 사방팔방, 불바다 속에서 날뛰고 있는 상태.

'쯧.'

저릿한 손끝을 억누른 강태석이 힘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마주보았다.

마치 모든것을 잃어 삶의 목적마저 사라진듯한 기운.

하지만 그래서야 곤란하다.

"정신차려. 남은 다섯이라도 살려야할것 아냐. 네 뒤에 녀석들 안보여?"

"... ...."

이에 눈동자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 여인을 본 강태석이 손안의 칼을 휘돌리며 물었다.

"통제실. 어디있어?"

"통제실?"

"보안 제일 삼엄한 곳."

이에 대답한건 여인이 아닌, 닻을 든 사내였다.

"거기 아냐? 안열리던데 한군데 있었잖아. 지하에."

비밀이 많아보이던 이 성에서도 가장 깊고 삼엄한 곳.

그런 사내의 말에 주변이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

쿠르르릉...

원래는 제법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어야할 목적지.

하지만 화염에 성을 구성하던 모든 금속들이 통째로 녹아내리고 무너진 탓에 그들의 목적지는 조금 떨어진, 성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온 사방을 그득 메운 열기와 펄펄 끓는 용액바다들만 없었어도 코앞이라고 여겼을만한 거리.

"... 이런 상황에서도 멀쩡하네."

녹아내린 금속의 용암사이, 파묻힌 상태에서도 제법 멀쩡한 외양을 유지하고 있는 가로세로높이 5m 가량의 금속상자 구조물을 보며 테크니컬 사내가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주변 모든 것들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음에도 철문을 비롯해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그렇기에 더 문제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오자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거 안열려. 그렇다고 강제로 뜯어낼 방법도 없고."

시커멓게 그슬린 피부의 재를 툭툭 털어내던 닻 사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자신들도 이걸 열어보려고도 했고 벽을 뚫어보려고도 했다.

이 생존구역이라는 곳, 안열린 유일한 장소라는게 거슬리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모든 수단이 안 먹혔다.

검기는 물론, 엑소슈트의 디스트로이어나 어떤 해킹코드도 무소용.

'지금 보니... 대충 알겠어. 이거 천장이나 바닥이랑 재질이 같은거다.'

닻 사내가 이 화염폭풍속에서도 멀쩡한 이 거대한 플로어의 천장과 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성과 다르게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천장과 바닥들은 재질 자체가 다르다.

아마 눈 앞의 상자 또한 같은 성분일 터.

그렇다면 자신들은 무슨 수를 써도 이걸 강제로 뜯어낼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띠딕.

띠디디디딕.

띠디디딕.

<코드 확인... 접속권한 검토중....>

<접속권한 확인. <시민장> 코드가 인증되었습니다.>

<통제실 진입 및 일부 투표권한을 얻습니다.>

치이이익....

"???????"

"!!!!!"

뭔가 버튼을 띠디딕 누르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철문에 뒤에 서있던 이들의 눈썹이 치꺾였다.

저게 열렸다고?

이 근방, 수많은 이들이 자신들은 예전 시장이니 권세가니 하며 나불거렸지만 저걸 열었던 자들이 없다.

심지어 이 근방 성에서 성주, 혹은 왕처럼 군림하는 이들도!

5층, 6층, 그 너머 더 높은 구역에서도 이걸 열었다는 소문이 들린적이 없는데 열렸다고?

"너 뭐하는 놈이야."

뒤쪽, 어느새 기운을 차린 시카른의 물음에 강태석이 숨을 후 내쉬었다.

지금 그게 중요하겠는가.

핵심은 하나다.

빨리 자신이 온 목적을 수행하는 것.

강태석이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으로 한발 내딘 순간.

띠리리릭...

<현재 1131 생존구역의 시민장이 투표를 제안합니다.>

<긴급발동시퀀스 : 리틀월드>

<발동시키겠습니까? 남은 투표시간 300초...>

띠딕.

띠딕.

띠디디딕.

검은 공간에 청명한 문구가 떠오름과 동시에.

부우우우우웅...

온 사방, 온 구역에 자리잡은 생존구역들 전체가 기이한 공명에 휩싸였다.

**

6층, 9944 구역.

<투표가 시작됩니다.>

<권한을 가진 이가 없을 경우 해당섹터의 투표권한은 무효처리됩니다.>

<남은 시간 265초...>

"이게 무슨 소리야."

키이이잉...

생존구역 사방, 성 전체의 구석구석에 떠오르는 푸른 홀로그램 문구들을 온몸을 수상쩍은 검기로 감싼 여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여인 주변, 성 전체에 살고 있던 수많은 생존자들도 마찬가지.

"어이. 이게 뭔소리야. 너 연방 시절 나름 천재 소리 들으면서 대접받았다며."

"..."

옆, 날카롭게 생긴 여인의 퉁명스런 말에 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자신도 이런건 본적이 없다.

긴급투표라니?

거기에...

"리틀월드라는건 또 뭔데. 저거 되면 우리 어떻게 되는건데."

쿠르르르릉...

기묘하게 떨어울리는 거대한 콜로니 전체를 두 여인이 바라보았다.

현재 모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모르겠다.

한데 답답하게도 이 끝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알수가 없으며 심지어 이에 간섭할 권한조차 없다.

그저 이 모든 과정속에서 불안해하며 기다릴뿐.

<남은 시간 243초...>

띠딕...

띠딕...

사방, 끊임없이 줄어드는 시간을 띄운 문구들을 두 여인이 불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