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직경 4km, 길이 178km.
운하, 동쪽으로 7km.
그리고 더 먼 동쪽으로 185km.
그 거대한 금속구조물의 양쪽에서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튜브와 튜브를 연결하고 있는 그 연결면에서.
쿠드드드득...
키리리릭...
부서지는 것 같기도 하고 조립된게 풀리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소리.
그 요상한 소리들이 직경 4km의 금속튜브 외벽 전체를 타고 쉴새없이 울려퍼졌다.
이어 벌어진, 믿을수 없는 현상.
쿠구구구...
어어? 말도 안돼...
분리된다!
쿠콰콰콰콰콰콰!
거대한 튜브의 분리.
이어 바깥에서 틈새로 새어들어오기 시작한, 암흑을 몰아내는 햇빛.
이에 1층 근처의 수림에 살고있던 이들이 천장을 보고 놀라 소리치며 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
쿠구구구구...
1층부터 12층까지.
크레페처럼 열두개의 튜브가 층처럼 겹겹히 이루어진 콜로니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변화.
그렇기에 이를 눈치채지 못할 이는 없었다.
햇빛이라고는 하나 들지 못하는 어두운 공역의 끝부분을 통해 빛이 새어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4층, 간신히 목숨을 건진채 숨을 헐떡이고 있던 시카른 일행도 마찬가지.
쿠르르릉...
"대체 뭐야... 뭐야 이거."
통째로 분리되기 시작한 거대한 튜브를 보며 중얼거리는 시카른의 옆, 강태석이 노곤한 몸을 대지에 지탱해세우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성공했다.'
비상시퀀스.
이 거대한 탑, 거주구 모듈의 분리.
그리고 자신의 퀘스트, <리틀 월드>는 이를 실행시켜 새로운 기반으로 만드는 것.
한개의 거주구이자 <테라포밍용>으로 설계되어있던 이 거대한 모듈을 말이다.
원래는 어느 우주 공간의 한곳, 혹은 다른 행성과 차원너머에 내려앉아 스스로의 역할을 할수있게 된 물건.
당연히 극한의 척박함을 자랑하는 곳을 기준으로 설계된만큼 이것 하나만으로도 수백만을 먹여살릴수있는 역량이 있다.
물론 제대로 모든 기능이 작동한다는 전제조건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거야 차츰차츰 해결해나가면 되는 것이고.
이제 중요한건 하나.
이 거대하고도 작은 세계가 앞으로 자신들이 북쪽으로 향하는 발판이자 대지가 되어줄거라는 것.
쿠구구구구...
분리되어 서서히 북쪽으로 머리를 틀기 시작하는 거주구, 리틀월드를 보며 강태석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외부에 설치된 분사모듈은 우주공간에서의 무중력, 무저항상태를 기본으로 설계된 것이라 지상에서 충분한 출력을 내기엔 무리가 있지만 애초에 그건 방향전환정도만 해줘도 충분하다.
퀘스트, <리틀 월드>가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하에 자리잡은 셀수없는 숫자의 웨일엔진들 때문.
쿠르르릉...
하나하나가 거대한 고철선을 움직일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 어림잡아 수백, 수천개.
그 물건들이 4층 아래까지 그득 들어찬 은빛 금속바닷물들을 집어삼켜 에너지를 만들고 동시에 이 거대한 구조물에 추력을 부여한다.
천천히, 하지만 착실히 가속도를 붙여가며.
북쪽을 향해 장구하게.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그만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서서히 비틀려가는 튜브.
이에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서쪽 끝단의 운하부를 보며 강태석이 숨을 후 내쉬었다.
**
쿠르르릉...
"으하. 으하하하하하하! 대단하잖냐 이거."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관을 보며 청년이 박수를 짝짝 쳤다.
안에 탄 녀석들이야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보고있자니 그 광경이 모조리 한눈에 들어왔다.
직경 4km에 달하는, 산맥만한 크기의 거대한 금속튜브가 은빛바다에서 두둥실 몸을 돌리며 북쪽을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서서히 몸을 돌리고 있음에도 어찌나 그 크기가 거대한지 사방 그 육중한 은빛바다들이 마치 해일처럼 철썩이고 있을 정도.
순간.
쿠르르르릉....!
"... 쯧. 이놈들. 가만히 있진 못하고."
자신의 뒤쪽, 틀어막힌 거대한 금속튜브의 장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진동들에 청년이 인상을 쓰며 기를 튜브 전체에 불어넣었다.
저 육중한 물체의 유동이 뒤쪽, 저 너머의 녀석들에게까지 전달되었나보다.
한동안 얌전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요동치며 <벽>을 뚫으려고 하는것을 보면.
콰드드드드드득...
콰드드드득...
청년이 선 자리로부터 수백 수천줄기의 푸른 빛이 마치 세피로트의 나무처럼 줄기줄기 바닥을 타고 뻗어나가 요란스럽게 울리려는 직경 4km의 강제격리격벽 수백군데를 동시에 두들겼다.
이어 다시금 조용해지는 사방.
쿠르르릉...
"좋아. 후우."
아까전, 강환을 날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피곤해보이는 표정으로 격벽을 한번 바라본 청년은 고개를 돌려 아쉽다는듯 떠나가려는 모듈을 바라보았다.
이걸 이뤄낸 놈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수 있었다.
아까전 자신의 강환의 1, 2파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한동안 멈춰있던 이곳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녀석.
오랜만에 보는 빛나는 재능이다.
어쩌면 새로이 자신들과 같은 새로운 귀족의 반열에 오를수있는 녀석일수도.
전란일수록 재능은 빠르게 피어나고 자라나는 법이니 환경조차 지극히 좋다.
생각같아서는 따라가서 지켜보고 구경하고 싶은 터이지만...
"내가 이곳을 떠날수가 없구나."
쿠르르릉...
자신의 뒤쪽, 수천줄기의 푸른 빛줄기로 거대한 격벽을 강제로 붙잡아둔 청년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뽑아들었다.
아끼던 애병이며 한참의 세월을 자신과 함께 했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는 녀석.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개의 벽을 돌파한 자신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일반인들은 물론, 무인들에게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치를 지닌 무가지보가 되어줄 물건.
휘리링.
손에서 그 반지를 한번 매만진 청년은 오른손을 들어 이제는 서서히 비틀려 멀어져가는 튜브의 단면,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함께 가지 못하지만 이정도라면 오늘의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하리라.
잠시 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받아라. 내 이름 더럽히지 않게 잘쓰고."
내던진 순간 맹렬한 파공음을 토해내며 커브를 그리고 운석처럼 사라져가는 반지를 보던 청년은 이윽고 몸을 빙글 돌려 원래 자신이 있던 격벽을 향해 걸어갔다.
떠날 놈들은 떠날 놈들이고.
이제 자신은 원래 자신의 일에 집중해야하니까.
한데 그런 청년의 머리에 문득 든 생각.
'그런데... 잘 받겠지?'
쿠구구구구.....
마치 미사일이 날아가는 것마냥 사방을 떨어울리는 굉음을 귀로 듣던 청년이 슬쩍 찝찝하다는듯 뒤를 돌아보다 이내 고개를 휘휘 돌려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향했다.
**
<... 스탯이 분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스탯을 분배해주십시오.>
<... 스탯이 분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스탯을 분배해주십시오.>
"끄응..."
덜그럭거리는 미약한 진동.
끊임없이 눈꺼풀 너머로 깜박거리는 창과 들려오는 메세지음.
축 늘어진 상태로 천천히 정신을 차린 강태석의 왼쪽 옆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깼어?"
이에 강태석이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오른쪽 어깨에, 닻을 왼쪽 어깨에 걸쳐멘채 터덜터덜 걷고 있는 닻 사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제법 익숙한 1남 4녀의 모습 또한 보였고.
테크니컬, 수장, 수인소녀, 적검여인, 화기소녀.
온통 눌어붙고 녹아내린 폐허의 대지 사이를 걷고 있는 그들 일행의 모습이 들어오자 강태석은 그제서야 기억을 더듬어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릴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 서서히 떠나가는 금속의 배.
그리고 기진맥진한채 긴장을 풀려던 순간 유성처럼 날아들었던 <무언가>.
이윽고...
!!!!!!!!!!!!!!!!!!!!!!!!!!!!!!!
어이? 이봐? 괜찮아!
가슴팍을 후려친 맹렬한 타격음과 충격.
이어 주변의 놀란 목소리 속에서 자신은 그즉시 혼절.
지친 상태였던 데다 날아들던 무언가에는 살의마저 없었기에 방심하고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아니, 살의보다도 그 안에 담겨있던건... 노골적인 호기심과 호의.
'뭐였지?'
기절 직전의 상황이었기에 이동중인 지금은 주변에 그게 떨어져있지 않으리란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핀 강태석은 이내 자신의 왼쪽 손가락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을 확인하고서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왼쪽, 네번째 손가락.
그곳에 자리잡은 적색의 작은 반지.
이를 본 강태석을 향해 닻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신기하게 너 후려치자마자 네 손가락에 쏙 들어가서 끼더라고. 빼려고 해도 안빠지고."
"빼려고 해도?"
"... 큼. 커험."
헛기침을 하는 사내를 보던 강태석은 사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정신차렸으니 내려달라는 의미.
털썩.
이어 땅바닥에 내려앉은 강태석은 멈춰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전 섹터의 유일한 생존자들.
어느정도 열기가 식어 더욱 황량해진 주변 플로어의 대지와 폐허들을 바라보니 그 삭막함이 더욱 와닿았다.
"어디로 가려고 했지?"
"일단 위로 향하려고 했지. 여기는 뭐가 남아있는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점점 더 물이 차오르고 있기도 했고."
철벅.
사방, 은빛나노머신 벌레들이 마치 물결처럼 고이고 차들어가고 있는 사방을 가리키는 여인 시카른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 4층은 안그래도 척박하고 반지하마냥 괴생명체들이 우글거려 그닥 생존자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한데 그마저도 거대한 청염이 튜브를 따라 거진 수십키로를 단번에 휩쓸고 지나간데다 리틀 월드 시퀀스가 작동하며 본격적으로 웨일 엔진들이 은빛 바닷물을 빨아들여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추력이 붙고 부력과 균형이 잡히면 모조리 잠기지야 않겠지만 높이 50m에 달하는 층고 대부분이 잠길테니 사람 살곳이 못되는건 당연하다.
즉 이 대지는 이제 불타오르고 가라앉아 잠길 땅.
이제 5층으로 올라가야하며.
시카른과 다섯은 강태석을 데리고 그런 5층으로 올라갈수 있는 통로를 향하는 중이었다.
문제야 있었지만 말이다.
"저게 내가 알기로 이 근방에서 위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야. 근데 난리가 난것같은데."
4km 너머, 지상과 천장을 우뚝서 연결하고 있는 직경 300m 가량의 두터운 기둥을 바라보며 시카른이 중얼거렸다.
섹터와 크기는 비슷했지만 네모난 형태였던 섹터의 생존구역, 성과 달리 원형을 띄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통로처럼 보이는 곳.
그리고 그 주변, 자신들과 통로사이... 사방팔방 대지를 메우고 있는 온갖 종류의 괴물들.
캬아아아아악...
쿠아아아아아아아앙!
그야말로 살아남은 온갖 괴생명체들이 버둥거리고 서로를 물어뜯으며 아비규환의 현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녀석들이 향하고 있는곳 역시 통로.
하긴 녀석들도 이곳에 있다면 통째로 잠겨 스러질 것이라는걸 본능적으로 알았을테니 말이다.
비록 타르늄때문에 작동하지 않더라도 자체가 금속으로 이루어진 이 은빛 바다의 막대한 압력은 생명체가 견뎌낼만한 수준이 아니다.
"저길 통과해서 올라가야해. 아니, 그 이전에 눈 앞의 난장판부터."
캬아아악...
마치 지옥도를 잘 해부해 펼쳐놓은듯한 눈앞의 대지, 그너머의 탑을 바라보며 강태석이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