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11화 (111/221)

111

5층, 표부.

비상 대피 구역.

"..."

20m가량 높이의 천장을 바라보던 테크니컬 사내, 온은 자신의 주변으로 선 네 명 가량의 무장병과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명목은 현재 여전히 혼란스러운 섹터 내 혹시 모를 갈등에 대비한 이방인 신입의 호위.

하지만 실제는...

'인질이겠지.'

온이 숨을 푸 내쉬었다.

다섯 중 자신을 제외한 넷은 검기 사용자군.

남겨두고 가기엔 부담스러우니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고 데려간 것.

쓸만한 전력일 테니 그들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동료가 죽으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이들에게 의탁해야 할 테니 그 또한 이들에겐 좋을 것이고.

털썩.

아예 힘을 빼며 간이의자에 기댄 온이 눈앞의 소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린이라고 했나요? 협력할 테니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온이 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따르던 시카른의 세력과 성채가 모조리 녹아버린 이상 자신과 동료들에겐 딱히 선택권이 없다.

기회를 볼 때 보더라도 당분간은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상황.

그렇기에 분란 없이 협력한다.

그리고 그런 온의 태도에 숨을 길게 들이마신 아린이 털썩 온의 앞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두 개의 유물을 뒤로 슬쩍 밀어낸 채.

"위층 상황을 알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이 본 우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아린이 덤덤하게 말했다.

오로지 절망뿐이던 세계 속, 미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어른이 되지 않으려고 했던 소녀는 점점 사라져간다.

희망이 보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는 할 일을 해나가야만 할 때.

그런 아린의 말에 멈칫한 온이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생존자들.

그 사이에서 철컥거리며 정비되고 있는 엑소슈트와 수많은 탄약들.

어지간한 대지 하나는 그대로 갈아 버릴 수 있는 세력들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다 죽습니다. 6층은 기본적으로 기갑 병력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는 곳이에요."

온이 덤덤하게 말했다.

보병이 탱크를 잡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우위는 후자에 있다.

엑소슈트와 기갑 병력의 관계도 마찬가지.

기갑 병력은 기갑 병력을 준비해서 상대하는 게 전술의 기본.

지금 이들의 전력으로 올라가면 어느 정도 버틸 수야 있겠지만 이내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모조리 녹아내리고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 위쪽에서도 내려올 거에요. 난리가 났으니 살피러 오겠죠."

11 권세.

<플래그>가 무너져내리는 와중에도 굳건히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해 내려온.

자신들 같은, 뭣도 없는 4층으로 도망쳤어야 했던 패잔병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들이.

그리고 그런 온의 말에.

"...!"

아린과 뒤쪽에 서서 듣고 있던 무장병들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

5층, 심부.

쿠르르릉...

"저건 또 뭐야."

피라미드를 지나쳐나온 이들이 강태석의 앞으로 보이는 육중한 건축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 변이 50-100m 정도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 구조물들.

빌딩만 한 은빛 금속 구조물들 십수 개가 층과 층 사이에 두둥실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허공에 둥둥 뜬 블록마냥 말이다.

그 기이한 현상을 지켜보는 이들의 앞, 강태석이 숨을 후 내쉬었다.

저 건축물들의 정체는 관문.

그 예전, 연방의 차원장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된 연구 결과물들 중 하나.

그리고 그사이.

치지지지직...

치지직...

"우린 저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일단 주변을 좀 살펴본 다음에."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은빛 건축물 사이.

강태석이 파지직 거리며 기이한 스파크를 뿜어내고 있는 직경 30m의 회색 구체를 가리켰다.

**

사방으로 흩어져 이루어진 짧은 정찰.

이내 결과는 나왔다.

"내가 갔던 방향 쪽에 피라미드 2개가 깨져있었어. 그 안은 텅 비어있었고."

터벅.

피라미드 사이, 깨진 두꺼운 유리 파편 조각 하나를 들고 와 말하는 군파츠의 말.

그런 군파츠의 말이 없어도 이미 모여있던 이들의 표정은 나름 심각한 상태였다.

다른 이들이 발견한 것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던 이들.

그들이 발견한 건 추락의 충격, 혹은 다른 이유로 깨져있던 피라미드들의 흔적.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해도 총 열세 개.

하나당 삼만 명씩만 잡아도 거의 사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이며.

심지어 이 광활한 5층 심부, 정찰되지 않은 범위에 몇 개나 더 깨진 피라미드들이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 더 큰 문제는...

"생존자 혹시 본 사람 있어?"

"..."

"... ...."

군파츠의 말에 모여있던 이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현재 이곳에 모인 총원, 1,078명.

그들 중 그 누구도 이곳에서 생존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시체조차도.

깨져버린 피라미드, 녹색 연기가 모조리 스러지고 공허하게 남은 구조물 속에 분명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론가 움직인 흔적들은 있었건만 말이다.

몸과 정신이 멀쩡하지 않았을 그들이 이곳, 5층 심부를 벗어날 수 있었을 리도 없으니 답은 하나뿐이다.

그들 모두가 어딘가로 사라진 것.

저곳.

기이한 구조물들이 둥둥 떠다니며 만들어내고 있는 기이한 구체 속으로 말이다.

"..."

"... ..."

팔짱을 끼고 있는 강태석의 주변, 모인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도 어느 정도 타산이 맞고 하던 것이어야 하는 법이다.

이 기이한 공간.

모든 것을 집어삼킨 수상한 구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것도 필요할지 아닐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얻기 위해?

"거기. 카트란이라 했소?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저 안에 뭐가 있기에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지."

4층에서 함께 살아 올라온 생존자들의 대표, 검기 사용자 중년 사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강태석에게 고정되었다.

이 순간이 중요하다.

움직여야 할법한 이유가 있다면 들어갈 것이고 아니면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것은 스스로의 판단뿐이니까.

그런 이들의 말에.

"모릅니다."

"... !"

기가 막힌다는 듯 변해가는 주변 이들의 얼굴에 강태석이 작게 숨을 픽 내쉬었다.

자신도 시원시원하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진짜 모르는 걸 어쩌는가.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인게임 내, 이 숨겨진 5층 심부의 관문 너머에는 반드시 위쪽으로 향하는 에픽 문명의 일부가 숨겨져 있다.

연방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감춰 두려 했던 고대역사, 혹은 찾아낸 환상문물 중 무언가가.

그걸 얻는다면 지금 모인 세력을 기반으로 확장을 도모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잠입, 분산, 혹은 최악의 경우 포기라는 여러 가지 수중 하나로 우회해 돌아가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러게. 이게 필요한 건 이들이 아니라 나일 수도.'

강태석은 서서히 자신이 예전, <플레이어>로서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얻어낸 여러 가지, 생겨난 여유.

처음, 맨몸뚱이에 절박하던 때와는 다르며.

사실 자신은 이제 <혼자> 돌아다녀도 무사히 방주까지 도달할 자신이 있다.

혼자라는 건 때론 압도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어떨 때는 장점이기도 하니까.

들키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사건·사고와 격동하는 세상에 휘말리지 않고 어딘가 구석에서 성장을, 어딘가 다른 곳에선 방랑을.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멸망 100% 전엔 방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욕심.

<그래도 웬만하면 최대한 많이 살려서 가고 싶다.>

더 나아가 하나 더.

어지간하면 인게임 타임-라인은 흔들지 않기로 한 과거의 다짐.

그렇지만 그런 다짐 속에서도 드문드문 피어나오는 깊은 곳의 욕망.

최대한 끝내주게.

마치 왕처럼, 신처럼.

예전, 어떤 세계에서 과거의 자신이 해냈던 모습처럼.

"..."

그때 그 당시를 떠올리자 또다시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꿈틀거리는 검은 유혹을 억누른 강태석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다 같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랑 같이 갈 선발대를 꾸리지요. 어지간하면 이선에서 끝내고 상황 봐서 따로 합류하는 거로."

먼저 구체 안으로 들어갈 선발대.

그리고 이곳에 남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할 후발대.

이에 대한 선택은 자유.

그리고 그런 강태석의 말에.

"..."

"... ...."

강태석과 그 뒤, 허공에 뜬 은빛 구체를 바라보는 생존자들의 얼굴이 고심으로 물들었다.

**

5층 심부 돌입자, 거의 일천.

그들은 본디 오시리스에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던 각 세력 장들에 의해 차출된 정예.

그들의 심부 탐험 참여목적은 두 가지.

첫 번째, 적당히 협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두 번째, 안쪽에서 발견될 혹시 모를 귀한 것들에 대한 권리를 놓치지 않는 것.

사실 그간 그들에 대한 강태석과 페리트란, 카티 섹터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강대해지고 있었다.

첫째로 검기 사용자로 각성한 강태석과 아린등의 실질 무력을 도저히 각 세력들론 감당할 수 없었고.

더 나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그들은 강태석이 소유한 배 위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며칠간 사정이 크게 바뀌었다.

각 세력들은 엑소슈트를 보유해 검기 사용자들 마저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세력을 크게 확충했으며.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좁은 배 대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거대한 대지까지 손에 넣었다.

더는 눈치 보지 않고 적당히 자신들의 득실을 위해 활동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게 지금 눈앞의 결과물.

"너 진짜 등신 아냐? 저놈들 다 내버려 두고 간다고?"

키이이잉...

쿠구구구구구...

시퍼렇게 파지직거리는 정체불명의 구체.

그 주변에 뜬 은빛 구조물 위에 서서 핀잔을 주는 군파츠의 말에 강태석이 땅 아래를 바라보았다.

멀찍이 서서 위의 자신들을 올려보는 이들.

그 수는 거의 일천.

즉, 이곳에 들어왔던 이들의 거의 대부분.

그리고 지금 들어가기로 한 자신의 곁에 있는 건...

"..."

강태석이 함께 은빛 구조물 위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군파츠와 그녀를 따르는 섹터 정예 열일곱.

구련장 중 예전 인연이 있던 연검주인. 아니타.

그리고 각 섹터들에서 차출된 인원들.

그 수는 총 80.

그나마 자발적으로 기꺼이 나선 이들은 군파츠와 아니타 정도가 다였다.

나머지 인원들은 군파츠의 눈치 때문에, 혹은 각 섹터가 혹시 모를 보험으로 두셋씩 참여시킨 이들.

"이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지. 당장 대가리 잡아서 다 끌고 오자고. 그리고 저 은혜 모르는 놈들에 새로 들어온 자식들은 눈치도 없이 왜 저기 남아있는 거야. 잘 보이려고 해도 모자랄 판에."

구련장 중 아니타를 제외한 여덟, 그리고 시카른과 그녀를 따르는 넷을 가리키는 군파츠의 말에 강태석이 피식 웃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화가 나 있는 모습이 썩 인상적이었으니.

하지만 군파츠의 의견은 기각.

"우리끼리만 가자."

강태석이 덤덤히 제지하며 말했다.

모르는 구역으로는 많은 숫자가 간다고 의미 있는 건 아니다.

각 섹터들의 힘이 강해지고 외부의 적이 많아진 지금, 정치적 요소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저들을 끌고 들어갔다가 대부분 죽기라도 한다면 5층에 남아있는 다른 섹터들에게 큰 명분을 주게 된다.

재수 없으면 이탈해서 아예 저쪽으로 붙어버릴 수도 있고.

차라리 지금은 자신들만 선발대 형식으로 움직이는 게 베스트.

"가자."

"아후. 진짜."

크릉...

답답하다는 듯 가슴 갑각을 퉁퉁 치는 군파츠의 손길에 졸지에 자다 두들겨 맞은 셈이 된 가슴팍 포식 장갑의 주둥이가 작게 그르렁 소리를 내었고.

그걸 보며 작게 웃은 강태석이 앞장서 걸으려다 순간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하나 더.

'들어가기 전 이걸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중에서 지금... '

"...?"

허리춤의 연검을 차고는 강태석의 뒤를 따라올 준비를 하던 아니타가 수정을 만지작거리던 강태석과 눈을 마주치고는 눈을 빼꼼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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