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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13화 (113/221)

113

뒤쪽의 사내를 불쾌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사내, 론은 바깥의 점멸하는 불꽃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에.

갑작스레 찾아온 거대한 진동.

주변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 녹색의 운무.

이어 드러나는, 깨져나간 피라미드와 그 속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깨어난 수만 명의 생존자들.

정신을 차리고 냉동상태에서 빠져나와 피라미드 밖에 선 그들이 마주한 것은... 기약 없이 뻗어있는 금속의 감옥이었다.

둥근 원통형의 공간.

안쪽에서는 뚫을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있는 거라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갇혀있던 피라미드들뿐인 삭막한 격리 대지.

탈출했다는 즐거움과 희망도 잠시뿐.

이 광대한 대지를 모두 둘러본 이들은 순식간에 깨닫게 된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즐길 것도 없는 이 장소에 기약 없이 갇혀버렸다는 걸.

어찌 보면 의식이 없었던 냉동 보존장 치보 다도 더한 감옥.

아니, 지옥!

이어 절망과 분노, 굶주림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들은...

"..."

꾸득.

그때를 떠올리자 절로 불쾌해진 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도 깨달았지만 그때 더욱 선명히 알게 되었다.

주리고 규칙 없는 이들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그렇기에 자신은 그날의 사건 이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공간 안에 이 도시를 세웠다.

자격 있는 이들에게 안식을 제공하기 위해.

자격 없는 이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

"계약을 잊지 않았겠지. 네가 <만든> 병사들로 이 도시를 보호해라. 내가 계획에 집중할 수 있게."

"그... 그럼요. 저... 저놈들도 제가 다... 처리하지요."

!!!

!!!!

바깥, 여전히 점멸하고 있는 황무지를 바라보던 말더듬이 사내가 시크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콰콰콰콰콰콰쾅!

<아니 씨! 저거 뭔데!>

투타타타타타타타타!

은폐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니다.

처음 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영뇌수.

이로 인해 은신 장막 아래서 풀려나 사방으로 흩어진 이들.

그 와중에도 정확히 행해지는 사격을 모조리 몸으로 버텨내고 있는 상대를 보며 바이저를 쓴 군파츠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의 오징어 다리를 질끈 씹었다.

투타타타타타타!

모래폭풍 사이, 어지간한 금속도 구멍을 숭숭 뚫어버리는 레일건의 사격 수백수천 발을 선자리에서 모조리 튕겨내는 상대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겉에 걸치고 있던 넝마는 모조리 분쇄되어 흩어진 지 오래.

그 아래로 보이는 건... 마치 어디 우주의 전투병처럼 온몸을 두터운 장갑으로 둘러싼 인간.

키는 장갑 포함 2.5m가량.

군청색의 장갑, 등에 멘 수상하고 커다란 백팩 형태의 구조물.

거기에 육중한 투구까지.

무슨 놈의 투구가 빈틈은커녕 바이저 같은 반투명 구조조차 없다.

즉 완전한 통짜 쇠 같은 구조로 저래서야 저놈도 앞이 보일지가 궁금할 지경.

하지만 그런 군파츠의 걱정(?)을 훌륭하게 해소시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장갑 인간은 충실하게 사방에 흩어진 그들을 위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촤르르륵...

손끝을 따라 잘게 조각나기 시작하는 피부의 장갑.

가로세로 1cm.

마치 플라스틱 조각이 갈라지듯 가로세로로 바둑판처럼 금이 죽죽 간 장갑 표면의 돌기가 오돌토돌 일어났다.

그렇게 장갑 표면이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을 때 즈음 다시 휘둘러지는 장갑 인간의 양손.

이어 뿌려지는 수백 조각의 파편들.

후우우우웅!

<피해!>

군파츠가 자신의 휘하 생존자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키이이잉...

작게 빛나기 시작한 파편들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며 사방을 다시 한번 쓸어버리려던 순간.

후우우우우우우웅!

콰르르르르륵!

뻗어 나온 두 줄기 섬광이 폭발하려는 조각들의 위를 해일처럼 뒤덮었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연검.

시커멓게 빛나는 번개의 그물 줄기.

푸른 채찍과 검은 그물이 그렇게 빛나는 파편들을 휩쓸어냄과 동시에.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철컹!

"이익..."

거칠게 튕겨나가는 자신의 연검을 간신히 부여잡은 아니타가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막긴 했지만 어찌나 그 위력이 강렬한지 검기마저 뒤흔들린다.

애초에 벽을 넘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바빴을 지경.

"저거 뭐예요?"

이에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번개를 쥐며 인상을 쓰던 강태석이 덤덤히 내뱉었다.

"기갑화보병."

인간에 거의 탱크에 가까운 중장비를 씌운 무장병들.

원래 저런 수준의 병기들은 연방 시절에는 다 무인으로 작동했었다.

하지만 무인병기들은 기계 군대의 침공 시절 모조리 빼앗겨버렸으니 고육지책으로 탄생한 것이 저것.

소형 무인 기갑 병기들의 장갑과 무기를 떼어내고 시냅스 회로화를 거쳐 인간이 쓸 수 있게 개조한 뒤 사람이 직접 이를 착용하고 싸운다.

그게 바로 기갑화보병.

즉 저건 말이 보병이지 방어력이나 공격력은 거의 소형 기갑 병기에 가까운 녀석들이다.

애초에 기갑 병기에 달려있던걸 떼어내어 붙인 거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강태석은 더욱 희망이 생긴 상태였다.

이 감옥과도 같은 공간, 기갑 병기 같은 게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저런 게 운용 가능하다는 건 자신이 찾아온 목적이 이 안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이제 저걸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

키이이이이잉...

조금 과하긴 하지만 단번에 처리하기엔 이게 낫다.

왼손, 피어오르기 시작한 반지의 붉은빛을 보던 강태석이 그대로 알레고리아를 상대에게 집어던지려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앙!

콰아아아아앙!

콰직!

콰드드드득!

콰득!

"... 오."

<아이씨! 이거 또 지혼자 미쳐서 난리네!>

흙먼지 너머.

거의 짐승처럼 달려들어 상대를 후 드려 패고 뜯어내기 시작한 포식 장갑을 보며 강태석이 휘파람을 불었다.

**

콰아아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짐승처럼 장갑 인간을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탄 포식 장갑의 양손이 거칠게 내려쳐질 때마다 육중하던 장갑이 쾅쾅 소리를 내며 파여나가고 우그러들었다. 어느새 장갑 보병이 재생되기 시작한 양손을 휘둘러 자신조차 휘말릴 각오를 하고 사방을 폭발로 휘감았음에도 무의미.

콰아아아아아아앙!

자신의 갑각이 폭발에 우그러지고 튕겨 나갈 정도로 흔들림에도 포식 장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갑 인간을 콰득 움켜잡은 채 거칠게 내려찍고 뜯어냈다.

마치 한 마리 맹수가 먹잇감의 껍질을 벗기고 뽑아내듯!

키이잉...

이어 장갑 보병의 작동이 멈추고 완전히 뜯겨나간 전면 장갑 사이, 에너지를 공급하는 코어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즈음.

콰지지지직!

콰직!

<우아아아! 진짜 싫어 이거!>

"저거... 사람 먹는 건 아니죠?"

전면 장갑의 주둥이를 쩌억 벌려 그야말로 게걸스럽게 처박고 무언가를 와구와구 먹어대기 시작하는 포식 장갑을 바라보며 말하는 아니타의 질문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포식 장갑 저놈은 생물은 별로 관심 없어한다.

중요한 건 자신의 재질을 업그레이드하고 회복시킬 각종 금속들과 에너지 소재, 코어, 병기 등등.

아니나 다를까.

휙!

털썩!

먹는데 거추장스러웠던지 손을 쑤욱 집어넣어 뭔가를 내던진 포식 장갑의 옆, 한 사내가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굴며 게거품을 토했다.

몸과 대머리, 군데군데 끊어진 신경 전선을 박고 있는 저자가 기갑 보병의 탑승자.

하지만...

스윽.

"... 그냥 기갑장비에 탄게 아니었군."

"?"

"전신이 개조됐어."

내리자마자 게거품을 물며 죽어가는 상대를 보며 다가온 강태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갑화보병이라고 해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막대한 충격을 견딜만한 체력도 있어야 하고 무인병기들이나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광각 센서들이나 기능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신경 개조를 견딜 수 있는 적합성도 지녀야 한다.

이게 안되면 그냥 탱크에 어린애를 태워놓은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한데 지금 눈앞에서 죽어가는 상대는 다르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인체를 아예 탱크를 몰기 위한 부품으로 개조해버린 것.

당연하지만 이래서는 기갑장비가 파괴되는 순간 함께 죽으며 설령 장비가 멀쩡하더라도 수명이 오래갈 수가 없다.

즉 비인간적인 행위.

하지만 원래 이런 것들은 종종 압도적인 이득을 수반하는 법.

그러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불법개조를 통해 이번에 상대가 얻었을 장점은...

"도망칠 준비 하자."

"...!'

철컹!

철컹철컹!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모래폭풍 너머.

넝마를 걸친 채 다가오는 수십구의 기갑 화보병들을 보며 강태석이 짧게 내뱉었다.

**

철컹...

철커덩...

저 너머를 통해 걸어오는 상대를 보며 강태석의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불법개조를 통해 얻은, 적합대상 필요라는 한계의 극복.

이를 통해 양산 가능해진 기갑화보병.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해도 대략 50기.

반면 자신들이 지닌 전력은?

현재 이곳, 부상자를 제외한 60명가량의 레일건 사용자.

저 밖에 있을 일천 명가량의 레일건 사용자.

현재 이곳 세명과 바깥의 다섯, 총 여덟 명의 선검기 사용자.

그리고 아래의 엑소 슈트 부대들.

검기 사용자는 보통 기갑화보병 대상 정도로는 우위를 점하니 못 싸워 볼만한 건 아니다.

엑소 슈트도 모이면 압도적 충격량과 사거리로 느린 기갑화보병 정도는 고철로 만들 수 있고.

문제는 다들 멀리 있다는 것.

거기에 지금 다가오는 녀석들이 눈앞 도시의 전력이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즉 일단은 후퇴.

하지만 그냥 도망간다는 건 아니다.

"눈앞에 다가오는 녀석들은 일단 내가 시간 끌어볼 테니까. 아니타랑 군파츠 둘은 각자 반반씩 데리고 도시로 흩어져서 흔들어."

"안 빠진다고? 최소한 구체 밖에 있는 녀석들이라도 불러오던가!"

이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고 안 들어온 녀석들이 위험할 때 부른다고 오겠는가.

올 수도 있지만 괜히 시간 끌리면 적 병력 충원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차라리 충돌한 지금, 빠르게 도시를 흔들고 소수 병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게 나은 상황.

"적당히 흔들다 빠져서 구체 밖으로 합류해. 그사이 도시로 들어가서 볼일 보고 나갈 테니까."

이어 말을 마친 강태석이 손끝, 아까 마력을 그러모으다 풀어낸 알레고리아에 다시금 붉은빛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붉은빛이 장미처럼 화려하게 모래폭풍 사이에서 피어난 그때.

휘리리링...

알레고리아가 저 너머, 수십구의 기갑화보병을 향해 던져짐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모래폭풍마저 갈아 마시는 섬뜩한 붉은 광채가 황무지 한가운데서 폭발했다.

**

콰아아아앙!

피어나는 붉은빛.

튕겨나가는 기갑화보병들.

막대한 충격량이었지만 그 짧은 새에 원진을 형성해 똘똘 뭉친 오십의 기갑화보병들은 그 두터운 장갑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금속의 칼날들을 굳건히 버텨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심지로부터 1km, 도시 외곽 작은 빌딩.

"알... 알... 알레고리아... 저... 저게 왜 여기에?"

멀리서 바라보던 말더듬이 사내가 황무지에 꽃 피어난 붉은 장미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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