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콰르르르릉!
몸속 깊은 곳에 있는 어두운 연못에서 검디검은 마력이 콸콸 쏟아져 나오며 강태석의 온몸을 그득 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그득 들이 채운 마력들은 전신, 발끝부터 손끝까지 온몸의 세포란 세포를 빈틈없이 꿀렁꿀렁 채우는 것도 모자라 강태석의 손안에 들린 대검 안쪽으로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뼈, 근육, 신경, 금속, 칼날.
강태석이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모든 곳으로.
동시에 마력을 머금은 근육과 칼날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꾸드드드득...
근육은 검은 강선의 힘을 받아 더욱더 강력한 수축을.
금속은 마력을 터질 것처럼 압축해 더욱더 작고 선명한 검기를.
키이이잉...
검사와 같은 세밀함은 없지만 검은 기운 특유의 압축력 덕분에 칼날 전체에 푸른빛을 넘어 이제는 검푸르다고 해야 할 정도의 짙은 색 검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후욱.
'드디어 이 정도는 쓸 수 있게 되었구나.'
모든 준비를 마친 강태석이 온몸을 웅크리고 칼날을 휘어잡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느려 보이는 세상 속, 미친 듯 달려드는 사이보그와 폭탄을 뿌려댈 준비를 하는 기갑화보병이 보인다.
스스로의 몸을 버려서라도, 그리고 아군이 휘말리더라도 강태석 본인을 처치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히 보이는 태도.
실제로 그럴 것이다.
저들은 꼭두각시.
이미 개조가 끝난 저들의 몸과 정신은 자신의 것들이 아닌, 누군가의 장난감일 뿐이니까.
스르륵...
살아있었을 때는 아름다웠을 것 같은 여인, 그 여인의 눈가로 흘러 맺혀있는 작은 물방울을 본 강태석이 서서히 온몸의 힘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저게 눈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 흘릴 일은 없을 것이다.
'<칠삭도>.'
한마디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린 강태석이 온몸을 용수철처럼 휘감은 검은 마력을 억누르던 의지를 온전히 놓아버린 순간.
쿠르르릉...
콰콰콰콰콰콰쾅!
어마어마한 역도와 함께 강태석의 몸 중심, 휘둘러진 칼을 통해 터져 나온 시퍼런 초승달 일곱 줄기가 단번에 사방을 사정없이 휩쓸었다.
**
쿠르르릉...!
"...?"
왠지 저 멀리서 천둥번개 치는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모래폭풍뿐이던 세상과 도시에 천둥번개가 칠리가.
자신의 상념을 단번에 일축한 아니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연검을 촤르륵 휘감은 채 도시 사방을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을 따르던 무장병들은 사방으로 정찰 겸 작전을 위해 흩어진 상태.
사실 적들을 마주쳤다면 흩어지는 것보다 마주 싸우는 것이 좋지만 각자가 흩어진 이유는...
"...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이렇게 텅 비어있을 수가 있지?"
빌딩들의 숲 한가운데, 도로 위에 우뚝 선 아니타가 사방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이 도시의 크기는 제법이나 컸다.
무슨 대도시 정도는 아니지만 인구 백만 정도는 충분히 수용할 정도랄까.
심지어 주택가가 아닌, 무슨 거대 상업 지구의 한 구역을 본떠온 것같이 커다란 빌딩들과 복합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실제 사이즈보다 그 화려함과 웅장함은 더욱 커 보였다.
한데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거주해야 할 사람도, 이 도시를 지었을 인부도.
심지어 무언가 휩쓸고 지나갔다면 존재해야 할 파괴의 흔적과 시체, 혈향, 굳은 피마저도.
이건 유령도시라고도 할 수 없다.
그나마 그건 사람들이 살았다 빠져나간 것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이건 애초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 자체가 없다.
마치...
"그냥 장난감 같잖아. 누가 만들고 싶어서 만들어놓은."
누군가의 인형 도시, 혹은 장난감 같은 텅 빈 조형물의 도시.
하지만 마냥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그 사이즈와 정밀함이 너무나 대단하다.
실제로 누군가를 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기에 그냥 장난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많은 노동력과 자재를 소모했을!
애초에 이 척박한 대지에서 무슨 재주로 이런 것들을 구해 이렇게까지 지었단 말인가.
"... ..."
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아앙!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아니타가 그대로 자신의 연검을 쫙 늘려 단번에 눈앞, 조그 매 보이는 10층짜리 건물의 밑동을 훅 휩쓸어버렸다.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길이가 쭉쭉 늘어나는 자신의 C--급 병기, <운철뱀>.
검기 사용자에 달한 지금 그 길이는 최대 100m, 파괴력은 작은 운석이 떨어지는 수준에 달한다.
본디 검기 사용자들의 광역 학살을 위한 무기였던 만큼 그 위력은 압도적.
쩌저저적...
가볍게 휘두른 일격에 빌딩 아래 축이 사선으로 절단 나며 그대로 길쭉한 선이 생겼고.
쿠르르르릉...!!
이어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한 건물이 그대로 비스듬히 내려앉으며 가로수가 잘 심어져 있던 도로 한복판에 거대한 흙먼지구름을 피워 올렸다.
수천 톤을 가볍게 넘을 금속과 파편 덩어리의 붕괴.
이로 인한 커다란 파편들의 폭죽과 충격파!
터터터텅!
터텅!
피해내지도 않고 전신에 검기를 휘두른 채 날아드는 돌덩이들을 온몸으로 버텨내던 아니타는 팔짱조차 풀지 않고 그대로 흙먼지 너머를 노려보았다.
왜 텅 빈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설령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이 도시를 만들어낸 녀석은 분명 존재할 것이며.
이 정도로 깔끔하게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녀석에게 이 도시는 제법 소중할 거라는 것을.
나타나지 않으면 나타날 때까지 모조리 부숴버리면 그만.
그리고 자신에겐 그럴만한 충분한 힘이 있다.
비록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말이다.
"카트란. 고마워."
키이이이잉...
후웅!
후우우웅!
작게 중얼거린 아니타가 다시금 연검에 시퍼렇게 검기를 두르고는 쫘아악 칼을 뽑아 올려 그 옆, 문명이 멀쩡하던 시절에는 수백억을 호가했을 빌딩을 비스듬히 내리찍어버리려던 그때.
콰콰콰콰콰쾅!
콰아아앙!
"그래. 이래야지."
시선이 분산되어 카트란이 편해져도 좋고.
직접 잡아 족쳐 뒤에 있을 주인 놈을 만나도 좋다.
하늘에서 수십 개 소형 미사일을 쏘아대며 땅으로 내리 꽂힌 정체불명의 존재들을 본 아니타가 목을 우득 풀며 사납게 칼을 한 바퀴 휘둘렀다.
**
쿠쿠쿠쿵...
쿠쿠쿵...
마천루, 115층.
아래를 내려다보는 도시의 주인, 론의 인상은 아까 전과는 사뭇 달랐다.
종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일그러진 상황.
쿠구궁...
쿠궁...
"이런 빌어먹을..."
도시 한켠, 싸움의 여파로 사정없이 박살 나고 무너지고 있는 빌딩들을 보며 론이 손톱을 딱딱 깨물며 이를 갈던 그때.
끼이이익...
집무실 뒤쪽, 입구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린 론이 고풍스러운 나무문을 열고 들어온 말더듬이 사내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책임지고 해결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 꼴이 뭐야! 공들여 만든 도시가 부서지고 있잖아!"
쿠르르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형 투사체와 검기 폭풍에 휘말려 폭삭 주저앉은 소형 건물을 본 사내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저걸 치우고 또다시 만들려면 <재료>가 또 얼마나 필요한데!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들어온 사내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차례대로, 온전히 피력했다.
"그... 그러게...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말고... 군대부터... 꾸리자고 하지 않았습... 니까... 이 도시를 만들 정도라면... 제법 강력한 군대... 를 꾸릴 수 있었을... 텐데."
말더듬이 사내가 론을 향해 최대한 한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게 하려 애쓰며 말했다.
자신의 말대로.
자신이 이 도시에 가져온 <개조병>들은 그저 알음알음 연구하던 녀석들을 모조리 끌어다 모아 온 녀석들이라 군대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자신들의 노하우가 어느 정도 집약되어있으니 나쁜 수준은 아니지만 완성도, 양산화도 되지 않았기에 양과 질이 모두 부족한 녀석들.
쓸만하긴 하지만 정식 군대에 비하면 차고 다니면 듬직한 수제 나이프와 최신식 자동소총 정도의 차이가 난다.
사내는 그런 군대를 만드는 게 가능했고, 그렇기에 협력하면서 일찍부터 군대를 준비하자고 했는데 지금 와서 저런 우는 소리라니.
그리고 그런 말더듬이 사내의 말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던 론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필요하지.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맞... 맞는... 말이긴 합니... 다만."
하여간 저놈의 도시사랑.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 말더듬이 사내는 잠시 렉이 걸린 듯 멈춰버린 론을 놓고는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보아하니 지금 론은 이 사태에 대처할 능력도, 판단력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도시에 생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오롯한 자신의 몫.
정면으로 보냈던 특수부대는 알레고리아를 가진 특이한 놈에게 전멸당했고.
흩어진 녀석의 두 기동대 중 한놈은 이미 도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난리를 피우는 상황.
모르긴 몰라도 다른 한놈마저 지금쯤 열심히 도시 구석구석을 들쑤시며 약점을 찾아대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이... 이렇게... 합시다... 론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저는... 지금 이 도시를... 망가트리는... 놈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걸로."
"...?"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말더듬이 사내의 제안에 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황무지, 한가운데.
키이이잉...
사방을 휩쓴 일곱 줄기 검은 삭풍에 모조리 작동을 정지한 기갑화보병들과 사이보그 그녀를 보며 강태석이 숨을 내쉬었다.
칠삭도.
검기, 즉 무협계 기준으로 1류에 들어서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사실 칠삭도 자체가 일곱 개의 특별한 영약을 차례대로 먹어 동실력 대비 말도 안 되는 내공을 갖춘, 적전 계승자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에겐 어둠 샘이 있었기에 그 특이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여긴 해결됐고... 저쪽도 얼추 잘하고 있는 것 같고..."
쿠구구궁...
쿠궁!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려하게 도시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난장을 보며 강태석이 목을 풀었다.
보니까 아니타도 원래 성격 끄집어내서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고 군파츠가 오히려 원래 성격에 맞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모양.
뭐가 되었건 중요한 건 둘 모두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제 역할을 해내야겠고.
"보자... 슬슬..."
강태석은 굳이 황무지를 지나쳐 도시 안으로 향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소모된 체력과 마력도 조금 충전해야 하거니와... 어차피 상대가 이제 제대로 자신을 찾아올 테니까.
더 이상 간 따위 보지 않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쿠구구구궁...
도시 외곽.
서있던 높이 15층짜리 은빛 빌딩 하나가 서서히 수직에서 수평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안쪽, 건물들처럼 격전의 여파에 휘말려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움직이며 자신의 <상태>를 바꾸는 것뿐.
건축물에서 컨테이너로.
구축물에서 이동식으로.
잠시 후.
쿠르르르르릉...!
"오랜만에 보네."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공중에 반쯤 붕 떠서 내달려오기 시작하는 기업 국가 아벨의 명물, <사옥선>을 보며 강태석이 손의 대검을 훙훙 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