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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정확히 말하면 론 아쥬하.
연방의 통합작명법 이전, 어떤 국가에서 살아가던 자신의 성과 이름.
"..."
과거, 자신의 짧은 한편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있던 사내는 이내 웃으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하를 가득 메운 수십만의 육체.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는 외부인.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네가 조건만 맞는다면 굳이 이런 꼴이 되지 않아도 되니까."
<이런 꼴?>
"그래. 죗값을 치러야 하는 자들이지."
론이 차가운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의 세계.
그 속에서 자신은 어떻게든 남은 이들을 그러모아 방도를 찾아보고자 애썼다.
하지만 실로 무의미한 노력.
폭력, 강간, 광기, 식인.
차원과 현세를 연결하던 에테르의 영향이었을까.
순식간에 대학살극이 벌어진 곳에서 버둥거리며 내달리던 론은 피라미드들의 사이,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인 구체를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넘어간 구체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당황하고 있는 아벨의 말더듬이 사내와 마주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의 희망이 될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황무지뿐이던 세계, 그 대지의 한가운데.
이 도시를 세우는 걸 돕고.
더 나아가 자신이 꿈꿀 수 있게 도와준 자신들의 새로운 신을.
"외부에서 처음 온 기념으로 소개하지. <파일런>을."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꿀렁.
마치 거짓말처럼 높이 5m 정도밖에 안되던 지하공간이 순식간에 수십 미터 높이로 번지듯 늘어났고.
쿠르르르릉...
그 사이로 어느새 등장한, 높이 30m가량의 커다란 보랏빛 수정에 군파츠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
황무지 외곽.
콰르르릉...!
갑작스레 대지가 진동하고 꿀렁이는 파문이 도시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 나와 순식간에 황무지 전체를 휩쓸었다.
찰나의 순간.
마치 깊은 곳에서 밀려난 파문이 이 이질적인 세계를 한번 스치듯 밀어내는 느낌.
그리고 그 속에서.
"..!?"
콰아아아아앙!
퍼부어지는 검기 세례를 막아내던 강태석이 그 짧고 순간적인 변화에 눈썹을 꺾었다.
찰나지만 분명 느껴지는 심상찮은 변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준비하고 있는 패가 서서히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걸.
군파츠나 아니타가 안에서 분전하여 이를 저지해준다면 좋겠지만...
콰드드드드득!
대검을 뿌리듯 휘둘러 달려들던 기갑화보병 하나를 후려친 강태석이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타와 군파츠는 유능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감당 못할 전력은 아니다.
도시 중간부터 죽 살피고 있었을 테니 그에 맞는 전력을 배치해놓고 방어하고 있을 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쩌면 몰라도 단기간에 해결될 상황은 아니다.
즉 이 자리를 자신이 해결하고 지원하러 가야 한다는 것.
'무리라도 해야 하나.'
남은 검기 사용자, 열하나.
기갑화보병은 육십둘.
숫자가 너무 많기에 오히려 단번에 덤벼들진 못하고 있지만 순차적으로 투입되니 계속해서 체력과 마력이 깎여나간다.
어둠 샘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
여전히 압도적인 그 전력에 강태석이 숨을 들이쉬며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촤르르르르륵...!
익숙한 소리가 강태석의 뒤쪽에서 풀려나옴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황무지를 질주해 날아든 무언가가 강렬한 기세를 품고 강태석을 향해 달려들던 사이보그 검기 사용자 하나를 그대로 후려쳤다.
낡고 군데군데 파이긴 했지만 여전히 육중한 질량감을 자랑하는 닻.
이어 날아드는 수십 발의 초록빛 탄환들, 그리고 수천발의 레일건 세례.
투타타타타타타타타!
콰르르르르르륵!
평범한 레일건 세례가 아니다.
개인용 화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육중한 탄자들이 어마어마한 운동에너지를 품고 그대로 황무지 전체를 뒤덮으며 그 안에 선 기갑화보병과 사이보그 검사들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엑소 슈트의 디스트로이어.
터어어어어어엉!
그로 인해 생겨난 빈틈을 통해 순식간에 포위망 밖으로 몸을 날린 강태석이 그제야 전체적인 상황을 조망할 수 있었다.
구체밖에 있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시카른네와 검기 사용자들.
그리고 그 옆으로 선, 일백 가량의 엑소 슈트와 각종 사슬과 보조 병기로 무장한 섹터원들.
더 나아가... 이를 보고 잔뜩 표정이 일그러진 저너머의 말더듬이 사내.
"이... 이이이... 버러지... 들이...!'
콰콰콰콰콰쾅!
콰아아아앙!
투콰콰콰콰콰콰콰콰콱!
그런 말더듬이 사내의 분노와 관계없이 황무지는 순식간에 더 맹렬하고 사나운 격전지로 변했다.
온갖 화망을 퍼붓는 엑소 슈트와 이를 뚫어내고 화력을 퍼부으려는 기갑화보병.
어떻게든 달려들어 이를 쓸어버리려고 하는 사이보그 검사들과 이를 앞에서 막아서는 시카른들, 그리고 섹터원들로 인해.
그리고 그런 광경을 살피던 강태석의 곁으로.
터턱.
"잘 쉬다 들어왔어?"
"비꼬는 거야?"
"아니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 너도 참 특이하다."
어느새 옆으로 내려앉아 별종 보듯 훑은 시카른을 향해 강태석이 피를 툭툭 털어내며 물었다.
"갑자기 왜 들어왔데? 마음이라도 바뀌었어?"
그런 강태석의 말에.
"..."
침묵을 지키는 시카른을 보던 강태석이 이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와주려고 들어온 게 아니었구먼."
보아하니 바깥도 난리가 난듯한 모양.
후우.
숨을 한숨 내쉰 강태석이 황무지 저너머,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완전히 구분 짓는 은빛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
5층, 표부.
어느 기업이 사용하던 사무 구역.
이곳으로 동료들과 함께 파견 나온 조르트는 사실상 별문제 없이 자신의 일을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었다.
든든한 27대의 엑소 슈트.
그리고 온갖 기갑 투창과 에너지 소드로 무장한 일백의 무장병들.
모두가 그 멸망하는 도시로부터 배를 타고 살아남으며 지금까지 강해져 온 역전의 용사들.
그에 반해 맡은 임무는 단순한 시간 끌기, 게릴라와 요격.
복잡한 지형지물과 증강된 화력을 이용하면 어지간한 적이 와도 무사히 물리치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저런 게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쿵쿵 쿵쿵!
"우아아아아악! 미치겠네! 저게 뭔데!"
복잡한 구조의 5층 플로어, 우주선 같은 구조를 내달리던 조르트가 엑소 슈트를 입은 채 쿵쾅쿵쾅 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토록 든든하던 엑소 슈트.
그리고 자신을 지켜줄 것 같던 복잡한 구조물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이토록 답답할 수가 없다.
"끄윽... 왜 이리 느려 진짜. 길은 또 왜 이리 복잡하고!"
쾅!
정신없이 내달리던 조르트가 열 받은 표정으로 걸리적거리는 기둥을 엑소 슈트로 쾅 걷어찬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아아아아아아악!"
자신이 걷어차며 터져 나온 깡통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굉음.
더불어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 위를 꿰뚫고 지나간 섬광에 조르트가 반사적으로 엑소 슈트에서 뛰어내려 나뒹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슈트부, 자신의 머리 위 5cm로는 모조리 녹아내린 지 오래.
만약 조금만 더 아래였다면...
오싹.
"..."
섬뜩한 표정으로 벌벌 떨던 조르트가 이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식간에 내부구조를 모조리 관통해버리며 생겨난 구멍, 그 너머의 광경이 선명하게 조르트의 눈에 들어온다.
녹아내린 절단면, 수백 미터를 일직선으로 뻥 뚫린 기괴한 통로.
그리고 그 너머로 자리 잡은, 크기 15m가량의 거미를 닮은 기계식 보행 전차.
키이이이잉...
여덟 개의 다리 위, 육중한 몸체.
디스트로이어의 공격조차 간지럽다는 듯 퉁겨내던 장갑 위로 자리 잡은 거대한 포신이 다시 한번 시퍼런 화염으로 휘감긴다.
"하하. 염병 진짜."
이미 통로 주변은 모조리 눌어붙은 동료들의 시선으로 가득한 지 오래.
천천히 자신을 향해 밝아지는 푸른빛을 보며 내뱉은 조르트의 욕설을 마지막으로.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터져 나온 섬광과 굉음에 의해 5층 표부가 다시 한번 죽음으로 물들었다.
**
도시, 지하.
"..."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사내, 론이 이내 다시 눈을 떴다.
이미 론의 육체는 보랏빛의 기운으로 휘감긴 지 오래.
터터터터터텅!
"소용... 없다."
기묘한 갑옷을 입은 여인의 사격 세례를 몸으로 버텨내며 론이 웃었다.
자신은 저 거대한 수정의 대리인.
이 세계에 도착하여 저 기물, <파일런>에 접촉한 순간 론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제는 저 기물의 뜻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적어도 수정이 자신을 보호하는 이상 자신은 무적에 가깝다.
이차원에서 흘러나오는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가 자신을 휘감고 막아서니까!
그 말더듬이 놈은 자신이 가장 처음 수정과 접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찌나 안타까워하던지.
만약 자신이 한발 늦었다면 그놈은 진즉 자신은 치워버리고 수정을 들고 날라버렸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
'뭐 상관없다. 쓸모만 있으면 그만이지.'
후욱.
숨을 들이켠 론이 보랏빛 눈동자를 감으며 감각에 집중했다.
눈을 감으니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구체 안의 이 세계, 더 나아가 구체 밖의 상황이.
온 세상은 이미 혼란.
안쪽도 격전으로 들어차 있고 바깥쪽은 그보다 더한 죽음이 사방을 들 어채 우고 있다.
위층에서 아래로 짓 쳐들어 오는 수십, 수백 대의 기갑중병기들과 침략세력들.
그에 고통스레 울부짖으며 짓밟히고 있는 수천, 수만의 생존자들.
몇몇 특출나 보이는 이들이 각자의 기량을 뽐내며 막아서고는 있지만 손가락으로 둑의 구멍을 틀어막으려는 꼴.
"가련하구나."
후우웅...
수정이 만들어낸 수십 미터 높이의 뒤틀린 지하공간.
그 사이에 보랏빛 기운을 휘감고 붕 뜬 론이 눈을 감은채 아련히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의 악의 순환은 끝나지가 않는다.
온 생명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
하지만 자신은 가능하다.
이 힘, 이 권능.
수정의 막대한 힘으로 5층을 가득 들 어채 우고 있는 죽음을 종결시키리.
그리고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천국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이들을 선택하리라.
잠시 후.
"수정이여. 내게 군대를 다오."
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우우우우우웅!
쿠구구구구구구!
수정을 감싸고 있던 보랏빛 기운이 순식간에 확장되며 지하공간에 있는 수십만들을 모조리 범위 안으로 집어삼켰다.
**
도시 밖, 황무지.
뻗어 나온 보랏빛 기운의 영역은 단순히 지하공간만 삼킨 게 아니었다.
부우우우웅!
쿠르릉...
"뭐야. 뭐야 이거."
짧은 진동.
이어지는 불쾌한 느낌.
마치 무언가가 순식간에 자신을 훑고 지나가고 핥으며 샅샅이 살피는 느낌.
이에 저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은 시카른의 옆, 강태석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파일런이었구나."
팩토리, 파일런, 혹은 하이브.
이 세계에서 거의 양산에 가까울 정도로 중장갑 병기들을 찍어낼 수 있는 수단들 중 하나.
자원만 있으면 무제한으로 쏟아져 나오는 병력들은 마법과도 같은 폭력을 세계에 선사한다.
인류 연방은 팩토리를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정체불명의 외계 종족들과 싸웠으며.
기계 병기들은 하이브를 통해 이를 뛰어넘는 생산력으로 그런 인류를 몰아붙이며 도시와 센트라를 불태워갔다.
그리고 파일런은 그런 이들보다도 한세대 이전, 고대 문명의 유산.
작동방식은 둘 중 하나.
자원.
혹은 제물.
"도시를 만든 재료가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콰르르르르릉!
콰지지지지직!
서서히 비틀리는 보랏빛 영역 속의 대기.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워프 되어가는 <무언가> 들을 보며 강태석이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