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21화 (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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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구체 근처.

콰아아앙!

"....!"

신음을 토할 새도 없이 미친 듯이 쇳덩이를 휘두르던 마르트가 지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뛰어든 소년과 여인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자랑하던 닻과 사슬은 모조리 박살 나고 1m짜리 금속 쪼가리만 남은 지 오래.

갑작스레 등장해 맨손, 두 주먹으로 무쌍처럼 기갑 병종들을 튕겨낸 둘 덕분에 마르트는 간신히 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려있던, 적검이 부러진 채 분전하던 민트라나 살기 위해 악착같이 싸우던 다른 생존자들도.

하지만 생명을 구해준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유는...

고오오오오.

"..."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온몸에 사악한 기운을 풀풀 흩날리고 있는 소년을, 마르트가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카티라는 저 작자는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벽을 넘지 못했었다.

한데 그 짧은 사이에 이루어진, 한계의 초월.

거기다 저 몸에서 풍기는,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은...

꾸득.

본능적으로 주먹을 움켜쥔 마르트의 손에서 난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돌아본 카티는 마르트를 비롯한 다른 검기 사용자들의 표정을 보고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해주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고 생각되었으니까. 이 기운도 서서히 날아갈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 거 아니오. 목숨을 구해준 사람한테. 실례했소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앙!

길쭉하지만 가냘픈 팔다리로, 그야말로 15m나 되는 거구의 병종들을 후려쳐 붕 돌려버리고 박살 내고 있는 숙녀를 본 마르트가 주먹을 쾅 치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수를 썼건 뭐가 그리 중요한가?

핵심은 저 둘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

그리고 당장 함께 힘을 합쳐 이 난관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

설령 악마와 손잡았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그보다 악마 그 자체라면 더욱 좋다.

그만큼 강할 테니.

"그래도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할 수도..."

마르트가 사방, 황무지를 훑어보며 중얼거리던 그때.

쿠르르르르릉...

!!!!!!!!!!!!!!!!!!!!!!!!!!!!!!!!!!!!!!!!

"!!!!!!!!!!!"

"!!!!!!!!"

황무지 너머의 도시 깊은 곳에서 웅혼한 진동과 함께 터져 나온, 카티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악한 기운의 폭풍에, 모여있던 이들의 표정이 굳다 못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

구체 밖.

쿠르르르르르르릉!

"아니 미치겠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피라미드에서 풀려난 수천 명의 이들, 그중 한 사내가 자욱한 녹색 운무 속에서 쿨럭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 연방에 패배하고 무너진 국가에서 난동 좀 부렸다고 잡혀와 냉동 참치 신세가 되었던 것 같은 기억이 엊그제.

한데 눈을 떠보니 온 사방이 난장판.

다행히도 미친 듯이 불을 뿜어대던 거대한 기계 거미들과 커다란 바퀴를 닮은 괴수들은 서로가 치고받은 끝에 대충 상쟁한 것 같지만, 그 다음이 문제.

콰직...

끄으으윽...

"야 씨.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몰라 인마. 으헉..."

쏴아아아아아...

기계 거미의 엄호가 없어진 무장병 하나를 피라미드 조각으로 찔러 죽인 사내가 갑자기 온 층계 전체에 감도는 등골 오싹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도시, 지하.

쿠구구구구...

거세게 진동하는 커다란 수정.

그 앞으로 쩍 벌어진 보랏빛 틈.

높이는 대략 100m 정도.

높아진 지하 공동의 아래위를 가득 채우고 벌어진 틈새 너머에서 질식할 것 같은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온 지하, 종유석과 석순 사이의 모든 공간을 그득 메웠다.

이미 기운이 터져 나온 순간 지하, 오랜 시간 숨만 붙어있던 이들은 모조리 숨이 멎어 시체가 된 지 오래.

그렇게 시체가 된 이들, 수십만의 혼은 자동으로 보랏빛 틈으로 빨려 들어가 연한 색이던 보랏빛 틈의 색깔을 <아주 약간> 더 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

<우웨에에엑... 우웨에에에에엑...>

바닥에 엎드린 군파츠가 포식 장갑 안에서 토악질을 해댔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

누구에게나 대거리를 해대던 포식 장갑이 마치 혼이 나가버린 것마냥 온 기능이 정지해 축 늘어져 있다.

지금 그나마 전신을 지탱하는 건 마찬가지로 정신이 나가버리기 직전, 간신히 엎드린 자세만을 유지하고 있는 군파츠의 몸뚱이.

<크헉... 아으으윽...>

파르르 꽁지를 들고 경배하듯 엎드린 수많은 바퀴 병종들의 사이, 눈물 콧물에 토악질로 범벅이 된 군파츠가 엎드린 채 고개를 가까스로 치켜들고 보랏빛 틈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너머의 존재가 <온전히> 존재감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저 존재는 지금 우주보다도 더 광대한 곳의 저 멀리서.

산맥을 수천, 수만 개는 세워놓은 것보다 더 두껍고 강성한 벽의 너머에서.

아주 가냘프디 가냘픈,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백만 조각으로 다진 것의 하나만도 못한 관심과 의지만을 표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이 정도.

한 줌의 가냘픈 숨결만이 넘어온 정도로 수십만의 생명이 단번에 멎어버리고.

끄그그극...

자신도 나름 강자라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쥐어짜지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저런 게 지금 넘어오려고 한다고?

저런 사악한 기운을 품고?

비록 지극히 일부만이 넘어오는 데 성공하겠지만 그렇게만 되어도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짐작이 어렵지는 않았다.

종막.

이곳이 자신들의 무덤이오.

여기까지가 자신들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끄으윽...>

꽈드드드득...

점점 더 조여 오는 가슴에 군파츠가 지하 바닥에 손 고랑을 파내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때.

저벅.

"믿을 수가 없군. <저것>보다 격이 높다고?"

<끄으윽...?>

적막과 죽음만이 내린 동굴 속.

온몸을 어둠으로 휘감은 채 멀쩡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 카트란을 바닥을 기던 군파츠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콰르르륵...

한 걸음씩, 천천히 수정을 향해 내딛던 강태석이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스르르륵...

왼손에서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흘러나온 여의는 지금 저 수정안의 존재에서 뿜어 나오는 격을 견디지 못해 은빛 모래처럼 부스러져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쩌저저적...

오른손,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결정화되어 뾰족한 가시를 세우려던 칠채영창들은 그대로 굳어 부스러진 채, 마치 오래된 소금 덩어리처럼 영롱한 빛을 잃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알레고리아, 영뇌수 모두 마찬가지.

파스스스...

알레고리아는 마치 죽어 시들어버린 꽃처럼 겹겹이, 얇게 세공되어있던 수천 장의 금속 칼날들이 열려 나와 말라빠진 국화처럼 축 늘어져 내렸다.

영뇌수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림자 안에서 뛰쳐나왔다가 그대로 번개의 형상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생명도, 권능도, 보구도.

모든 것이 제 형상을 잃고 민들레 씨처럼 흩어져 내린다.

지금 저 수정 너머로 등장한 압도적인 존재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것.

하지만 강태석의 몸을 휘감은 어둠은 달랐다.

두근...

두근두근...

고요하기 그지없는 박동.

심장 소리에 맞추어 담담하게 피부와 혈관을 감싸 안는 기물, 전마강갑은 대기가 뒤틀리는 지하 동공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사용자인 강태석을 보호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대기를 메우는 존재의 압력은 마치 심해의 그것처럼 거세졌지만, 무슨 일이 있냐는 것처럼 담담하게 바깥의 세상과 안을 구분해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

전마강갑이 뛰어난 기물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이 모든 상황에 저항하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으며, 미세한 진동이라도 생겨나야 한다.

이토록 미동도 없이 굳건할 수가 없다는 뜻.

이게 가능한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다.

이 갑옷, 혹은 갑옷의 근원 자체가 상대보다 격이 높은 경우.

그리고 그게 지금 강태석이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나아가고 있는 이유였다.

자신이 1격.

귀족들은 3격.

그리고 눈앞의 존재는?

추정컨데 28격에서 30격사이다.

쿠르르르릉...

광활한 우주를 넘어 신화와 초월의 영역에 도달해야만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수정이란 고대 유물에 잠식하여 이 세상의 한편 자락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데 이 갑옷이 그런 존재보다 격이 높다니.

"4티어란 말인가..."

4티어, 30격 이상.

그 기나긴 게임 플레이 속에서도, 흔적조차 접할 일이 거의 없었던.

상상에 가까운 존재들.

꾸득.

자신의 손을 감싼 어둠을 쥐었다 펴본 강태석은 이내 숨을 고르며 허리를 펴고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쿠구구구구구...

어느새 눈앞, 100m 앞까지 가까워진 거대한 보랏빛 틈과 그 너머의 수정이 보인다.

그런 틈과 수정 사이, 가장 가까이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허공에서 말라비틀어진 채 진작에 시체가 되어버린 한 사내.

그런 사내의 앞, 보랏빛 장막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한줄기 거대한 손톱.

꾸구구구국...

손톱이 어찌나 크고 뾰족하고 거대한지, 끝자락만으로도 100m에 달하는 틈을 가로막던 보랏빛 장막이 그득 차며 꾸욱 밀려날 지경이었다.

손톱 전체도 아닌, 손톱 끝부분만으로도 그 정도.

아마 지금 눈앞에 있는 수정의 틈새 정도로는 손가락이 삐져나오기는커녕, 손톱의 아주아주 일부 끝부분만 장막을 찢고 삐져나오는 정도에 그칠 터.

그것만 해도 수정은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며 차원의 틈새는 작게 찢겨나간 채 끝나고 말 것이지만...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손톱 끝에 찢겨나간 장막 너머로 새어 나올 수많은 화신 존재와 군세들.

그것만으로도 콜로니는 물론, 온 세상 전체가 찢겨 나가고 이 행성은 장막 너머 악신의 흡족한 미소 속에 잠겨 들게 되리라.

물론 자신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봐줄 수 없다.

저벅.

꾸구구구국...

!!!!!!!!!!!!!!!!!!!!!!!!!!!!!!!!

쿠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치 질긴 고무처럼 천천히, 쭈욱 늘어나고 있는 보랏빛 틈새의 장막과 손톱 앞에 서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소가 강태석을 향해 휘몰아치는 듯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는 순간 혼백이 산산이 조각나서 윤회마저 불가능해졌을 게 분명한.

네깟게 감히 어쩔 거냐며 조롱하는 거대한 존재의 웃음소리.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갑옷의 격이 높은 건 높은 거고.

현재 자신의 힘으로 눈앞의 존재를 막아서는 건 성냥개비로 해일을 막아서겠다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다 방법이 있어 온 것 아니겠는가?

터덕.

틈새를 지나친 강태석은 이미 침식되어 기존의 영롱한 빛을 잃어버린 수정의 표면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강태석이 정체불명의 룬어를 중얼거리자 공허 너머의 존재가 당황하며 노성을 터트리는 것이 느껴졌다.

더불어 밀어내던 손톱의 힘이 약해지는 것도, 찢겨 나갈 것 같던 장막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도.

그리고 그 속.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강태석은 수정에 손을 얹은 채 다시 한번 읊조렸다.

룬어의 의미는 간단했다.

그 먼 옛날.

<진> 인류가 지금의 인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융성한 영광을 자랑하던 시절.

인류 대황제가 한 손에 초능을 휘감은 칼을 휘두르며 공허 너머의 온갖 존재들을 쳐 죽이고 찢어발기며 외치던 말.

<찢어발겨주마. 버러지들아.>

이어 말한 두 번째 룬어.

<내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짧은 두 문구가 내뱉어진 순간.

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틈새 너머 단말마의 괴성과 함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공포에 질려 도망간 존재의 여파로 박살 난 보랏빛 틈새의 파편들이 산산이 흩어져 공동 사이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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