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23화 (12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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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아쥬하.

혹은 그의 시체.

껍데기만 남아 현세를 방랑하고 있는 그는, 마치 수정과 같다.

스쳐 지나간 존재의 사념과 기운이 이미 죽은 론의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는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체를 움직이기 부족함이 있다.

지금 론을 일으켜 세운 건 여전히 남아있는, 강렬한 열망과 결핍.

쿠르르릉...

"아아... 아아아..."

무너져 내리는 도시들을 보며 론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토록 오랜 기간 노력을 들여 세워 올린 공든 탑들이 단번에 무너져 내린다.

범죄자 녀석들이라고 해도 한때는 무너진 국가 위, 혼란스러운 세상을 뒤흔들며 날뛰던, 말하자면 한가락 하던 녀석들.

연방이었기에 잡범 취급하며 모조리 잡아넣은 것이지 단번에 열어젖히면 말더듬이 사내의 개인 병력으로도 감당이 안 되었기에 차례차례, 재소자 위험등급 레벨이 낮은 피라미드들부터 열어젖히며 조금씩 조금씩 제압하고 지하로 실어 날랐다.

혹여 바깥에서 누군가 쳐들어올까, 숨어 조심조심하며.

지하실에 숨어 캔 통조림을 따먹는 느낌으로 빌어먹을 피라미드와 황무지만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오직 나날이 늘어가는 지상의 건물들과 도시의 재물들만 흐뭇하게 바라보며!

한데 눈떠보니 모든 것이 허망하게 스러지고 있다.

지상의 도시도, 꿈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모든 준비도.

심지어 그 꿈을 좇을 수 있게 해 주었던 보물인 수정도!

"이... 이 도적놈아!!!! 그... 그 그그그 건... 내 거다! 그건 내 거야! 천국... 내 천국을 위한 도구라고!"

쿠르르르릉!

어느새 도시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서서히 그 크기가 쪼르르 작아져 짤랑 사내의 품 안에 들어간 수정을 보며 론이 질투심에 불타는 눈으로 소리쳤다.

자신은 훨씬 더 오래 수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작아질 수 있다는 걸 몰랐는데!

마치 상대가 자신보다 더욱더 수정을 다루는 데 능숙해 보이는 느낌.

절뚝...

그렇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론의 외침에.

"..."

수정을 품에 챙기고 모든 일을 끝마친 채 떠나려던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와 자신 사이의 허공에 뜬 상태창.

띠링!

<축하합니다! <퀘스트 : 비경 아래 파일런의 회수>를 완수하셨습니다.>

<????의 존재를 패퇴시키고 그 아래 수많은 군세들을 공허로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직접 처리한 것은 아니나 그 공로를 인정하여 일부를 경험치로 전환합니다.>

<레벨13 달성!>

<추가 스탯 4가 지급됩니다.>

<전마강갑이 집어삼킨 스킬들 중 하나가 아닌, 전마강갑의 고유 스킬 중 하나가 해금됩니다.>

<추가적으로 비경을 구축했던 자 : 론 아쥬하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언제 사소한 힌트가 제공될지 모르기에 떠오르는 정보의 확인은 습관이자 필수.

바쁜 와중에도 거의 반사적으로 창을 클릭한 강태석의 눈앞으로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사내의 정보가 간략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띠링!

<론 아쥬하>

> 3급 범죄자. 생전 레벨 36 > 6 > 16. 현재 사념 감염 상태. 무력 레벨2. (완전 사망까지 남은 시간 : 105초....)

> 107년 전 연방 대통합 당시 무너진 구국중 하나 <아스칼론>의 변방 구형 도시인 ‘차른’의 권세가 아쥬하 가문의 셋째.

> 아쥬하 가는 해당 도시에서는 제법 권세 높았던 가문. 엘리트로서 도시를 이끌고 더욱 번영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투철했지만, ‘차른’은 아스칼론의 패배와 함께 무정부 상태로 변모.

> 혼란이 빠진 도시 속에서 이를 기회라고 생각한 론 아쥬하는 평소 자신보다 세력이 강하던 몇몇 가문들의 후계자들을 급습하여 살해한 뒤 그들의 가솔 및 세력과 물자를 흡수, 도시 재건1 정당을 주창하며 군벌을 형성.

> 이후 주변 생존자들을 약탈하고 흡수한 가솔들의 여식을 범하며 세력을 확장해가던 중 들이닥친 연방의 현대식 군대에 패배, 체포된 후 주동자로서 733년의 독방형에 처함.

> 이어 지하 속에서 절망과 함께 울부짖다 60년 후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축과 냉동 계획이 설립됨에 따라 완공 후 이송되어 에테르 냉동.

> 냉동보관 시기 : 1997-2027년(궤도 엘리베이터 붕괴 시기). 이후 에테르 냉동으로 인한 레벨30의 감소(36 > 6)를 3년간의 수련으로 16까지 회복.

"..."

모든 것을 다 읽어 내린 강태석은 픽 코웃음을 쳤다.

결국은 범죄자 놈 아닌가?

그리고 뭐 그리 도시에 집착하는지.

쿠구구구궁...!

이제는 거의 1km 수준으로 내려앉은 하늘.

이어 거세어지는 진동.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상 속, 곧 있으면 스러질 상대를 바라보던 강태석은 손안에 들려있던 대검을 바라보았다.

아니, 대검이라기보다는 거의 고철.

거듭된 전투.

거기에 일시적이지만 나노머신들조차 흩어질 정도의 광폭한 기세에 휘말려 이제는 거의 망가져버린 녀석.

삽 정도로는 쓸 수 있으려나?

떨그렁.

"이거라도 줄 테니까 여기서 다시 지어보던가."

그렇게 몸을 무겁게 할 쇳덩어리와 함께 한마디를 남긴 채.

터어어어어어어어어엉!

"아아아아... 크아 아아... 크아아아아아악!"

저 멀리 구체 밖으로 질주해 사라져 버린 강태석을 향해 무너지는 세계 속, 홀로 남은 사내 론이 괴성을 내질렀다.

**

구체 밖, 5층 심부.

쿠구구구구구구구!

밖으로 나와 모인 이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허공에 뜬 은빛 구조물들 사이, 이제는 크기조차 줄어들고 있는 입구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사옥선마저 통과할 정도로 커다랗던 구체는 어느새 크기 3m 수준으로 확 줄어든 상태.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르릉!

콰르르르르릉!

우왓! 피해!

쿠구구구궁!

구체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허공에 떠 있던 은빛의 커다란 블록들이, 지탱하던 힘을 잃으며 쿵쿵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 너머 이 공간과 구체, 그리고 구체를 고정하던 은빛 블록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좌표가 고정되어있는 상태였으니, 하나가 무너지자 다른 것들도 차례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균형이 무너지고 구체가 작아지는 속도도 더욱더 빨라졌다.

쿠구구구구구구!!

점점 더 크기가 줄어들어 이제 엑소 슈트는커녕, 덩치가 큰 마르트같은 사내는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줄어든 구체를 보며 아래 서있던 카티와 군파츠, 아니타와 시카른등이 주먹을 꽈득 움켜쥔 그때.

후우우우웅!

터어어엉!

"후우... 아오! 이 자식이 걱정되게!"

터어어억!

탕탕!

다가와 어깨를 팡팡 내려치는 군파츠의 손길에 순간 튕겨 나갈 뻔한 강태석은 간신히 자세를 다잡고는 주변이 들을 바라보았다.

감격의 해후를 나누며 맥주라도 한잔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모두 끝난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시작.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 움직여야지. 다시 5층으로 가면 되나?"

와중에 표정이 밝은 걸 보니 목적을 완수한 것 같다.

자신을 보고는 한결 안심하며 되묻는 카티의 질문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5층은 정말 너무 척박하다.

시설도, 자원도, 심지어 물자와 공간조차도 아무것도 없는 대지. 다른 세력들이 자리 잡지 않은 이유가 있다.

기반을 세울 물건을 얻었으니 이제는 제대로 되는 곳에 가서 터를 잡을 상황.

"6층으로 갑니다. 지금 이곳 전체가 혼란스러운 틈에."

6층.

그 단어에 멈칫하는 시카른과 마르트들을 흘긋 본 카티가 주먹을 한번 매만졌다.

저토록 긴장하는 걸 보니 만만한 장소는 아닌 모양.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합류.

"6층이 목표라도 일단 여기서 나가긴 해야겠군. 아까 들어온 곳으로 가면 되나?"

콰아아아아앙!

콰아앙!

여전히 혼란스러운 녹색 운무 너머를 바라보며 카티가 미간을 찌푸렸다.

괴물 녀석들이 없어지긴 했지만 5층 심부, 이곳의 상황은 여전히 개판.

녀석들이 없어지며 잠시 숨을 고른 소수의 위층 침략자들과 난리 통속에서 풀려난 어마어마한 숫자의 범죄자들이 그 속을 헤매며 살벌한 소음들을 뿜어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가는 길에 충돌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

그리고 그런 카티의 말에.

"아뇨. 이번에는 그렇게 갈 필요가 없지요."

"?"

의아해하는 카티와 사람들의 시선 속.

쿠구구구구...

강태석이 자신들의 위에 뜬, 구체 안에서 챙겨 온 사옥선을 바라보았다.

**

5층, 표부.

투타타타타타타타!

"하아... 후우.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엄폐물 속에서 엑소 슈트와 생존자 분대를 이끌며 미친 듯 총탄을 쏘아 갈기던 아린이 긴 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그야말로 난전.

적절한 명령체계를 가지고 흩어지긴 했지만 5층의 상황 자체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6층에서 내려와 5층, 바닥이고 천장이고 가릴 것 없이 표부 심부 모조리 들쑤시고 다니는 침략자들.

그렇게 녀석들이 활개 치며 뚫어놓은 입구와 빈틈 사이로 빠져나와 미친 듯이 난리를 쳐대는 정체불명의 개미 떼 같은 녀석들.

6층 놈들은 기갑 중병기를 기반으로 한 무장이 너무나 튼실해서 부담스럽고.

5층 심부 놈들은 무장은 없지만 하나하나 실력이 만만찮고 사나운데, 무엇보다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이런 놈들이 5층 표부를 전부 메운 채 난리를 치고 있으니 개판일 수밖에.

물론 녀석들끼리의 충돌도 생겨나고 있기에 피해는 조금 줄어드는 감도 있었지만...

철컥.

"아무래도 여기서 살기는 그른 것 같은데."

"그렇지 페리트란?"

옆으로 걸어 나온 페리트란의 말에 아린이 맞장구를 쳤다.

아무리 봐도 사람 살기는 힘든 환경.

이건 카트란이 뭘 들고나온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싶었다.

하여간 지금 중요한 건 들어간 이들이 나올 때까지 일단 제 역할을 하며 살아남는 것.

키이이이이이잉...

어깨 위로 둥둥 뜬 두 개의 유물, 그중 하나에 정신을 집중시킨 아린이 저 너머, 녹아내린 외벽들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기계 거미 보행전차를 겨누려던 그 순간.

쿠구구궁...

쿠궁!

"?"

"??"

갑자기 그들 머리 위, 천장에서 들려온 소리에 아린과 페리트란의 고개가 휙 위로 올라갔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하고 심상찮은 소리.

그리고 그 둘의 의문이 미처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천장을 뚫고 콰직 튀어나온, 커다랗고 네모난 금속 큐브의 대가리 부분의 등장에 아린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유물을 들어 쏠 뻔했다.

**

"아아... 아아아아... 저거... 저거 사옥선이 얼마나... 비싼... 건데...!"

"어차피 구멍 숭숭 났잖아. 나중에 날 잡아서 수리해. 도와줄 테니까."

물론 자신을 카루트라 소개한 말더듬이 사내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이 써먹기 위해.

터어어어어어엉!

터어엉!

뻥 뚫린 구멍, 그 너머 서서히 역전되는 중력을 느끼며 사옥선에서 5층 표부로 뛰어내린 강태석은 차례대로 뛰어내리는 생존자들과 밀고 들어오는 사옥선을 보다가 주변을 후욱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토끼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린과 그 옆의 생존자들.

그리고 사방으로는 여전히 활개 치고 있는 메탈 스파이더들과 풀려난 연방 소속 범죄자들이 보인다.

5층 심부나 표부나 개판인 건 마찬가지.

오히려 녹색의 운무가 이곳엔 없는 탓에 그 난장판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잘 들어온다.

카티의 말에 따르면 일단 이곳에 흩어진 생존자들을 모아 6층, 그 입구로 가야 하는 상황.

쿠르르릉...

서서히 밀고 비집고 들어오며 5층 표부로 내려오는 사옥선 아래서 강태석이 곰곰이 턱을 매만지던 그때.

터어엉!

텅텅!

"야. 너. 후우. 콜록... 이리 와봐."

"?"

무너져 내리는 천장 파편들 아래,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정체불명의 패거리들과 다가오는 한 사내의 외침에 강태석의 시선이 빙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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