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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잉...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사옥선 아래, 어느새 구축된 진지 천막들 중 자신의 것으로 배정된 공간에 들어온 강태석이 잘 설치된 모포에 털썩 누워 회색 천으로 이루어진 천막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5층 심부속, 구체의 속부터 시작해서 5층 표부를 가로질러, 6층에 이르고 또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사옥선의 사병들과, 범죄자 녀석들, 심지어 괴물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마력은 카티의 근력처럼 자신의 경지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스탯이니 바닥나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하는 육체가 지치는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 나름 안전한 곳에 자리도 잡고 수정도 가동시켰으며 이 거대한 배, 리틀월드는 지금도 천천히 북쪽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당분간은 한숨 돌려도 될 터.
한숨 돌려야 하는 몸상태이기도 하고 말이다.
쿠르르릉...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몸 안으로 휘몰아치는 어둠과 은빛의 물결을 관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을 그득 메운 전마강갑과 여의가 꾸물거리며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있다.
걸을 때나, 누울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끊임없이.
"진행이 나쁘진 않아."
강태석이 서서히 회복되는 신체의 청량함을 즐기며 중얼거렸다.
어떻게보면 이제 페이즈 2가 끝났다.
배, 오시리스를 통해 멸망도시를 탈출함으로서 페이즈 1을 벗어났다.
무너져가는 세계, 디딜 곳도 없던 은빛의 망망대해에서 발판과 기반으로 삼을만 한 대지를 찾고 씨앗을 심어 페이즈 2를 만들었다.
솔직히 이제는 자신이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
서서히 조직의 규율을 잡고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카티와 페리트란.
군부와 귀족정, 행정조직 등을 세워 중심을 잡아야 할 거라고 여기는 군파츠와 아너스빌.
자신들의 병력을 강화하고 숫자를 늘려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더그나 각 섹터장들.
파일런과 스스로의 역량들을 통해 이곳을 문명화시켜나갈 달리안과 테크니컬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닦을 아린과 아니타등 검기 사용자들까지.
당분간은 몸을 쉬면서 여유를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파일런을 통한 업그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이들도 이곳에 자리 잡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동안 뭘 할지 고민해보던 강태석은 이윽고 천막 너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진동을.
우우우웅...
"그래. 저걸 둘러봐야지."
지금쯤 높은 나무들 사이로 낮게 떠 있을 사옥선을 떠올린 강태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누워있는다고 더 빨리 낫는 것도 아니다.
다만 쉬는 느낌만 좀 더 충실하게 받을 뿐이다.
차라리 이 시간에 뭐라도 준비해 놓는게 나을터.
그리고 무기 및 병기 제작의 명가인 아벨의 사옥선 안이라면, 보물 상자 뽑기와도 같이 대박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잠시후.
“어억... 억... 왜... 왜 이럽니까…”
옆 천막에 묶여 있던 말더듬이 사내를 어깨에 들쳐맨 강태석이 거침없이 사옥선쪽으로 향했다.
**
G구역. 수림 구석 절벽가 동굴.
찌이이이이익!
"우웩. 이거 도저히 먹을 맛이 안나네. 퉤퉤."
동굴 안, 크기 10m가 넘는 거대한 개미 한 마리의 더듬이를 뜯어 입으로 가져가 먹던 소녀가 웨엑 소리를 내며 인상을 와락 썼다.
도저히 사람이 먹을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소녀는 손에 들린, 몽둥이만 한 개미의 더듬이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동굴 안에 있던, 수십 명 가량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찌이이익...
우걱.
간신히 살아남아 동굴 안으로 대피한 이들이 인상을 쓰면서도 저마다 개미의 갑각을 뜯어내 우걱우걱 속살을 뜯어 삼켰다.
그들이 잡히기 전, 전란의 시대에서는 더한 것도 먹으며 발버둥 쳐봤다.
맛이 더럽게 없지만, 먹고 마실 것이있는 게 어디인가?
적어도 아래층처럼 쇠만 핥아먹다가 굶어 죽을 일은 면한 것이다.
우드득.
"그래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수는 없겠지 언니?"
"당연하지."
자신이 일으켜 세운 시체병사 입에 장난치듯 더듬이를 툭툭 너나 먹으라는 듯 찔러 보는 소녀의 말에 무표정하게 개미 다리 하나를 뜯어 먹던 여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살아남은 것과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맛있는 음식과 안락한 보금자리, 평온한 환경을 즐기고 싶어 한다.
이렇게 언제 무슨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환경의 축축한 동굴에서, 이런 범죄자 녀석들과 개미 다리를 뜯으면서가 아니라!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데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실제로 그놈들은 지금 등 따시고 배부르게 어딘가에서 구르고 있을 거 아냐!'
자신을 엿먹이고 도망친 놈.
그리고 그 휘하, 어딘가로 향해 숨었을 녀석들을 떠올리며 여인이 주먹을 꾸득 쥐었다 폈다.
허공에 둥둥 뜬 금속 상자에 물자로 보이는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 움직이던 녀석들, 놈들을 털어내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와그작.
영양 보충을 위해 남은 개미 껍질 안의 속살을 모조리 씹어 먹은 여인이, 입안에 씹혀 들어온 파편을 퉤 뱉으며 말했다.
"모으고, 살피자."
일단 모은다.
흩어진 주변 놈들을.
그리고 살핀다.
이 주변, 나아가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는 녀석들을.
한발 더 나아가 마지막.
"우리가 죽인 그 기계거미의 주인놈들, 어떻게 접선 못 하나? 5층 통해서 다른 곳으로."
"그건 내가 다녀오지."
"나도."
이럴 땐 합이 잘 맞는다.
자원해 내려가겠다는 몇몇 이들을 보며 여인이 히죽 웃었다.
**
사옥선, 하부.
키이이이잉...
강태석과 말더듬이 사내를 태운 철판이 두둥실 떠올라 위쪽, 사옥선의 뻥 뚫린 입구로 향했다.
이곳은 이전에 병사들이 우르르 내려왔던 통로였다.
키이이잉...
천천히 빛을 향해 다가서는 철판 위, 여전히 어깨에 들쳐 메인 말더듬이 사내가 강태석을 향해 필사적으로 말했다.
"약... 약속 지켜야... 합니다... 협조적으로 굴면...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알았다 알았어. 지킨다고."
강태석이 혀를 찼다.
이녀석은 분명 쓸모가 있다.
당장 사옥선이 아니더라도 아벨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테니.
궤도 엘리베이터 붕괴 전의 정보긴 하겠지만, 아벨은 워낙 비밀주의니 그런 것들이라도 사용할 데가 있을 것이다.
녀석 본인도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리 안절부절못하는지.
하지만 이내 빛을 통해 온전히 사옥선 안으로 진입한 강태석은 녀석이 왜 이리도 필사적으로 약조를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거창하게도 했네."
부글부글...
저벅.
철판 사방으로 뻗은 십자 형태의 내부 복도, 그중 한 방향으로 내린 강태석이 복도 좌우로 자리 잡은 수많은 유리관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높이 2m의 둥근 캡슐 형태 속, 가득 찬 녹색 액체 안에 반쯤 녹아내린 체 자리 잡은 인간의 형체들.
반쯤 녹아 내린 건지, 혹은 반쯤 자라난 건지.
좌우로 자리 잡은 수백 개의 캡슐들은 모조리 기계와 인간의 형체가 뒤엉킨 정체불명의 무언가들로 들어차 있었다.
만약 아린이 올라왔다면 당장에 말더듬이 사내의 머리통을 날려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하지만...
"됐어. 전용 병기실은 어디에 있어?"
무심하게 복도를 걸으며 다음 방향을 묻는 강태석의 태도에 어깨에 들쳐 메진 말더듬이 사내가 멈칫하다 웃었다.
"당... 당신도... 정상... 은 아니군... 요?"
"... 세상이 말세는 말세로구나."
강태석이 기가 찬다는 듯 어깨 위의 녀석을 돌아보았다.
살다살다 이런 녀석에게 정상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강태석이 고개를 저으며 이를 무시했다.
솔직히 게임을 하다 보면, 이것보다 더한 광경들도 많이 봤다.
물론, 이건 게임이 아니고 현실이긴 하지만...
'솔직히 너무 오래 게임을 해서 그런지 잘 와닿지도 않아.'
그 정도로 그랜드크로스라는 게임이 현실적이었고, 역설적이게도 지금 자신이 거닐고 있는 이 세상은 비현실적이었다.
둘이 뒤섞여 혼재되었기에 강태석은 스스로 두 기억을 구분해야 하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하나.
당장 자신은 이 세계를 헤쳐나가야 하고, 그러려면 힘이 필요했다.
물론 적당한 인간미도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까딱.
"왼... 왼쪽으로... 갑시다... 그리고... 앞으로 내밀지좀... 말고... 함정같은거... 없으니까!"
강태석의 턱짓에 방향을 안내하기 시작한 사내가 자신을 슬쩍 앞으로 들쳐메며 방패로 삼는 강태석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
연구 시설 위, 지상 천막.
"..."
모여 있던 아너스빌과 카티, 아린, 그리고 각 쉘터의 장들이 아래에서 올라온 군파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군파츠의 말대로라면 이랬다.
앞으로 25시간 이내에 기갑 병기의 제작 준비가 완료되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병기 생산이 시작될 거라고.
팩토리에서나 가능한 것들이 갑작스레 가능해진다는 게 쉽사리 믿기 힘들긴 했지만, 안에 선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키이이잉...
아까부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연하고 푸른 권역을 바라보던 아너스빌이 군파츠를 보며 물었다.
"자원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것도 최대한 많이?"
"그렇지. 그리고 그걸 위해서 막아놨던 자원부 통로를 하나씩 열고 들어갈 거야. 건설 로봇에 데이터를 넣고 파츠만 채굴 장비로 교체하면, 바로 채굴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기존에 쓰던 대형 장비들도 있고."
군파츠의 말에 모인 쉘터장들 몇몇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원을 캐는 것이야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이 세계는 아까와 같은 괴물 놈들 천지다.
통로를 틀어막아 놓은 이유도 그 너머에 그런 녀석들이 우글거리기 때문.
아래 연구 시설인지 뭔지야 특수한 장치 덕분에 그나마 안전하다고 들었지만, 그 너머는 그렇지 않을 게 뻔하다.
한데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가야 한다고?
심지어 그 역할을 누가 맡게 될지도 뻔하다.
각 쉘터에서 차출된 인원들.
그런 이들을 보며 군파츠가 피식 웃었다.
"왜, 또 맘에 안 들어? 목숨 걸어야 하는 게?"
군파츠의 말에 몇몇 쉘터장들이 사납게 웃었다.
그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
힘 좀 강하다고 빌빌 길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칼 맞아 죽나, 명령 고분고분 따르다 고기방패 신세로 구르다 죽나 그게 그거니까.
"맘에 들면 그게 정신병자지. 그리고 그보다 큰 문제도 있고."
"뭔데."
"계속 목숨 걸라고 우리 아래 녀석들에게 말해야 하는 거."
"..."
한 쉘터장의 말에 카티도, 군파츠도 입을 꾹 닫았다.
사실상 이제까지 쉬쉬해왔던 문제였다.
각 쉘터의 장들이 무슨 절대 무력과 권력을 쥐고 있기에 장 노릇을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각자를 위해 최대한 많은 파이를 챙겨 오고, 최대한 덜 위험한 곳에 설 수 있게 하는게 그들의 역할이자 책임.
이제까지 그들은 그걸 잘 해왔기에 나름 장노릇을 하고있는 것이다.
한데 계속해서 위험한 곳으로 쉘터 인원들을 밀어 넣어야 한다?
설령 불가피한 일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먹힐 리가 없다.
하물며 장들과 쉘터 인원들 사이에는 검기 사용자만큼의 큰 격차도 나지 않는다!
"XX 나는 요즘 베개 밑에 레일건 넣고 잔다고. 눈 돌아간 놈 하나가 자던 중에 푹 쑤시고 도망갈까 봐. 지금 우리 구역 안에서 이러고 살아야 한다는게 말이나 돼?"
"카티.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그걸 분담해야 하는 것도 알아. 너희가 나름 공평하게 진행하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말하면서 밀어 넣는 우리는 죽을 노릇이라고. 요즘 그놈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 밥벌레처럼 본다고."
모인 쉘터장들의 입에서 차례대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불만보다는 오히려 한탄에 가까웠다.
위로는 찍어 눌리고 아래로는 푹푹 찔리는 중간 관리자 마냥.
애초에 예전에야 한 쉘터의 장이었지, 이렇게 덩치가 커진 지금 각자 위치가 애매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듣던 군파츠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다들 어쩌자고?"
그 말이 나온 순간.
"자네도 알잖아. 군파츠."
"..."
"우리에겐 지금 악역이 필요해. 우리도 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하다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건 자유를 주장하는 리더가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과 무력을 쥐고 명령을 어기면 단칼에 목을 날려버리거나 추방해버릴, 그런 무서운 존재이자 공포의 상징이 필요했다.
"무서운 독재자가 필요해 우리는. 모두가 인정하고 그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 하."
지금 이 무리에 그게 가능한 건 단 한 명뿐.
늙수그레한 쉘터장의 말에 카티와 아린등이 한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