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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푹 파인 나무표면.
마치 무언가를 알리기라도 하듯 몇 개의 작대기들이 조합되어 새겨져 있다.
"벌써 찾았다 이거지?"
근방을 돌아다닐 녀석들을 떠올리며 강태석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긴 수천 명이 움직인 길이다.
흔적을 지운다고는 했지만, 아예 남지 않을 수는 없으니 조금만 주의 깊게 봤다면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별 상관이야 없지."
스윽.
살피던 나뭇등걸에서 손을 뗀 강태석이 수림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들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녀석들에게 습격할 힘이 있느냐니까.
그리고 숲과 들판 사방으로 흩어놓은 지금, 수십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이라면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을 터.
그 정도라면 검기 사용자가 껴있다고 해도 엑소슈트의 화력으로 눌러버릴 수 있다.
아마 서로 잘 해결할 것이다.
그럼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일단 좀 돌아다녀 볼까?"
끼룩...
강태석이 수림 밖, 나무들 사이로 철썩이고 있는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
6층.
A구역부터 H구역까지 여덟 개의 커다란 대륙과 그 아래, 작은 섬들이 분포한 생태계층.
시카른 일행에게 들어보니 열한 개의 군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각자들에 대한 생각은?
사실 강태석은 별 관심 없었다.
머리 숫자가 중요한 것도 초창기의 이야기다.
파일런이 완성되고 본격적으로 문명이 크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사람은 모일 것이다.
그 아래로 들어와 각자가 제 역할을 해준다면 편하긴 하겠지만, 굳이 또 무리해서 통합하거나 정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각자 일을 각자가 잘하자 정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지닌 문명의 발전 속도를 조금 끌어 올리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자원을 확보하고 더 많은 테크니컬과 더 많은 진지를 구축한다.
이를 통해 현재 연구 중인 업그레이드를 더 빠르게 완성한다.
파르스, 프라다비아, 소입자 코팅.
세 가지 정도만 일단 마무리해두면, 11~20레벨 구간은 속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현재 파르스 연구 진행 중...>
<남은 시간 : 24시간 13분 41초...>
"이 근처에 또 멀티 할 만한 데가 어디더라?"
강태석이 나뭇가지에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자신이 데리고 온 생존자들은 사실 말 그대로 <생존자>였다.
천막 정도야 칠 줄 알지만, 시설이나 기반을 구축하는 데는 그야말로 한세월이다.
이번에 자신이 발견한 소장의 연구시설 단지처럼, 이미 자원을 캐는데 특화된 곳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
달리안이 나중에 테크니컬로 개화해서 건설 로봇으로 <자원 수집 센터>같은 걸 지어낼 수 있지 않는 한, 당분간은 시설이 구축된 곳을 찾아보는 게 좋다.
급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야 항상 아낄수록 좋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할지가 그런데 감이 안 잡히네."
끼이익...
서서히 휘기 시작한, 자신이 앉아 있던 나뭇가지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뭇가지가 굉장히 크고 두터웠지만 자신이 어깨에 메고 있던 칼, NO. 111은 그 이상으로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우선 내려가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 강태석이 땅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스팟!
"엉?"
수풀 어디선가 날아든 날카로운 무언가.
이어 빠직하고 부러져버린, 자신이 서 있던 나뭇가지를 보며 강태석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
우지지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앙!
"좋아...!"
수림 속,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추락해 바닥으로 쿵 떨어져 버린 상대를 보며 땅에 서 있던 소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이내 소녀가 목을 우득 풀며 몸을 풀었다.
방심할 때가 아니다.
이제 시작.
"준비해. 저놈 바로 사로잡을 거니까."
이에 뒤에 서 있던, 열두 명의 소년, 소녀, 청년, 여인들이 각자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놈들 수뇌부 중 하나.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우웅...
각자가 기묘한 기운을 손과 전신, 그리고 각양각색의 무기에 휘감은 이들이 먼지구름 속으로 뛰어들려던 그때.
촤르르르르르르르륵!
듣기만 해도 섬찟한 소리가 먼지구름 사이에서 그들을 향해 질주했다.
육중하게 대기를 찢으며!
"...!"
이에 숨을 고른 소녀가 손을 기묘하게 휘두르며 모인 이들의 앞을 막아섬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캬아아악!
날아든 NO. 111의 거대한 칼날 부분이 소녀의 가냘픈 손짓에 튕겨 나가 땅바닥에 처박히며 괴성을 내질렀다.
**
콰아아아아앙!
"막아?"
촤르르르르륵!
시험 삼아 휘둘렀던 NO. 111의 손잡이를 쥔 강태석이 흙먼지 너머,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시작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소 힘 빼고 휘둘렀던 건 맞다.
하지만 흑선의 근력에 전마강갑에, 어둠샘의 마력에 무량검기까지 담은 칼날의 폭격.
실제로 중간, 걸리적거리던 건 모조리 박살 났는데 소녀로 보이는 상대가 막아내다니?
그것도 맨손으로.
쩌저저저적...
쩌적..
우드드드득...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던 일곱 그루 나무의 아랫둥치에 구멍이 뻥뻥 뚫리자, 쩌저저적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무너져 내리며 수림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강태석이 휘두른 NO. 111의 일격에 이 꼴이된 것.
이대로라면 칼날이 깔려 꺼내기 귀찮아질 것 같았다.
촤르르륵!
손잡이에 힘을 준 강태석이 깔리기 전 얼른 백수십 미터까지 쭉 뻗어 나간 NO. 111을 회수하려 잡아당기려던 그때.
패애애애앵!
"... 오늘 뭔 일이라니 진짜."
마치 거대한 바위에 걸린 낚싯줄 마냥.
팽팽하게 잡아당겨 진 체 딸려오지 않는 칼날을 보며 강태석이 혀를 찼다.
슬쩍 고개를 숙여 쓰러지는 나무와 나무 사이, 흙먼지와 수림 너머를 바라보자 NO. 111의 칼날 머리 끝을 꽈득 움켜쥐고 있는 두 명의 청년과 여인이 보였다.
나이는 대략 스무살 정도 되었을까.
콰드드드득...
캬아아악!
칼날이 발버둥 치며 사방으로 물어뜯으려 하고 있는데 이걸 또 맨손 맨발로 꽈득 억누른 체, 마치 동아줄을 밟아 제끼는 마냥 단둘이서 땅에 고정시켜놓고 있었다.
소녀, 청년과 여인.
그리고 그 뒤로 열 명의 각기 다른 남녀까지 하여 총 열셋.
공통점은 다들 어려 보였다는 것.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게 지금 동아줄, 아니 NO. 111을 밟고 있는 스무 살 가량의 둘로 보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지금 자신을 가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래. 누군지는 뭐... 싸움 끝나보면 알겠지."
파파파파팟!
터어엉!
날아드는, 암기로 보이는 철침 두 개를 쳐낸 강태석이 NO. 111의 손잡이를 툭 내려놓고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을 온몸으로 끌어올리며, 양손에는 번개를 끌어올리며.
잠시후.
콰아아아아아아앙!
"얘들아. 인사는 끝나고 하자."
쿵쾅쿵쾅 달려와 자신을 내려 찍은, 덩치 큰 소년을 시작으로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강태석이 웃었다.
**
연구 시설, 외곽.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앙!
"...? 뭔 일이래."
연구 시설 지상 외곽, 잘 보이지 않는 지하 벙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연구 시설 소속의 감시병 사내가 저 멀리 숲속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충돌음에 인상을 쓰며 틈과 틈 사이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이곳은 저주파 장치로 보호를 받는 장소.
어지간한 괴물 녀석들은 다가오지 않는 데다가, 멋도 모르고 다가 온 녀석들은 연구소의 <그 녀석>들이 알아서 걷어내 준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이 마경과도 같은 숲과 대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자신과 같은 감시병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혹시 모를 사태의 대비 때문이지 실제로 무언가가 쳐들어 올까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물론 새로 왔다는 녀석들이 걸리긴 하지만 자극은 하고 있지 않는 데다, 소장님 얘기를 들어보니 대화가 어느 정도 잘 진행된것 같은 상황.
큰 일이 생길 상황이 아닌데 무슨 이런 폭음이 들려온단 말인가?
잠시후.
"이런 씨... 큰일 맞잖아!"
틈과 틈새 너머를 확인한 감시병 사내가 읽던 책을 내던지고 화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로 가는 철제 수직사다리를 향했다.
이를 까득 악물면서.
대체 왜 연구소를 지키고 있던 <차일드> 녀석들이 이방인의 수뇌부중 하나와 치고 받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차라리 이기던가! 아니... 아니 이게 중요한건 아니고."
정말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지금 해야 하는 건 상황 보고.
잠시후.
텅텅텅텅텅!
으윽...
감시병 사내가 거의 떨어지다시피 하며 철제 사다리를 타고 벙커 아래, 소장과 사내가 있을 연구 시설을 향해 허겁지겁 내려가기 시작했다.
**
콰아아아아아앙!
"아윽..."
"단단도 하다."
검은 장갑을 휘감고 달려들던 소녀를 걷어찬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 아무리 상대가 죽일 듯 달려들고 있다고 해도, 열 살짜리 소녀를 걷어차는 게 영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니까.
두 번째,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소녀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이 썩 만만하지는 않았기에.
지이이이익...
두 손을 교차시키며 밀려난 소녀가 힘에 부치는지 씨근덕거리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자신을 노려본다.
주변, 땀과 신음을 흘리며 땅 혹은 나무에 처박히듯 밀려났던 다른 소년, 소녀들도 마찬가지.
아까 전과는 달리 자신을 한껏 경계하는지 달려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빈틈을 노렸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주욱 둘러보던 강태석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만하자. 너희 저 연구 시설 쪽 녀석들이잖아. 도적놈들이 아니고. 대화 나름 잘 풀렸다고."
이에 움찔하는 몇몇 꼬마들을 보며 강태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자신이 적당히 시간만 끌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왜 다짜고짜 공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은 <아군>이다.
연구 시설 쪽에 소속된 걸로 보이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녀석들.
아직 서로 신뢰가 완전히 쌓인 것도 아닌데, 나중에 전력이 될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심하게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 어차피 적당히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고.
타타타타탁...
타탁...
저기다!
"...!"
"저기 어른들이 온다. 오면 얘기 다시 해보자."
수백 미터 밖, 연구 시설 쪽에서 달려오기 시작하는 수십 명의 인기척과 라이트들을 보며 강태석이 숨을 후 내쉬었다.
어른들이 달려오는 걸 보고 빳빳하게 굳는 걸 보니 일단 사태는 일단락될 터.
하지만 그와 별개로 피로가 엄습하는 게 느껴졌다.
달밤에 산책이라도 조금 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하여간 마가 낀 거지. 천막에 콕 처박혀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지 그러면 아너스빌이 귀찮게 했으려나?'
지금쯤 자신을 향해 이를 벅벅 갈고 있을 아너스빌을 떠올린 강태석이 턱을 긁적이다가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 난리를 쳐놨는데 안 돌아갈 수는 없다.
정말 돌아가기는 싫지만 일단은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봐야 할 터.
이 녀석들이 왜 갑자기 자신을 공격했는지도 들어보고 말이다.
철크럭.
카르르륵...
"너는 임마. 실망이다. 데뷔전에서 두들겨 맞기나 하고."
땅에 널브러져 있던 NO. 111을 칼날부터 집어 든 강태석이 팅 칼날 콧등을 치며 크르렁거리는 녀석을 타박하고 길이를 원상태로 줄이려던 그때.
쿠르르르르르릉...
묵직한 진동.
이어 지하로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의 불길함에 강태석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