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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각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왜 생존자 무리의 상층부 녀석들은 굳이 지뢰까지 깔아가며 바깥으로 나가는 걸 막고 안쪽으로 꽁꽁 숨어들었는지.
얼핏 생각하면 누군가 나가서 혹여나 쉘터까지 시끄러워지진 않을까 걱정하여 막았을 수도 있지만, 그걸로는 조금 부족하다.
거프의 말을 듣자 하니 그 당시는 한창 궤도 엘리베이터가 시끄럽던 시기.
갑작스런 6층으로의 관광은 누군가에게 있어 7층 거주구를 벗어날 절호의 찬스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이가 있다면... 그 상대는 혹여 자신이 가진 귀한 것들을 모조리 챙겨가지고 나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이들이 몇몇 더 있다면, 그들은 대피소를 찾아낸 순간 우선적으로 그것들부터 숨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들어와 본 지하 대피소.
비록 대부분의 구역이 온통 혈향으로 가득할 뿐, 생존자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쿠르르르르릉.
"찾았다."
지하 대피소 가장 깊은 곳.
그중에서도 굳은 피가 그득한 공간의 바닥을 뜯어낸 강태석이 아래 숨겨진 커다란 금고문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굳이 끌고 내려온 랜드마이너까지 구릉구릉 거리며 대기하고 있는 상황.
가지고 내려온 이유는 간단하다.
안에 귀한 게 있으면 일단 최대한 챙겨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원시설도 망가진 마당에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출력이 높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이 싣고 가는 무게보다는 훨씬 많이 지니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 짊어지고 가기에는 귀찮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디 한번 보자."
터어엉!
둥근 금고문 위에 뛰어내린 강태석이 멈칫했다,
버튼식으로 된 잠금장치 위로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핏자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지옥 속에서 이 안으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카드드드드드드드득!
NO. 111에 검기를 한껏 불어넣어 금고문 자체를 도려내기 시작한 강태석이 혹시 모를, 안쪽에서 있을 습격에 대비했다.
이윽고.
끼이이이익...
터어엉!
온전히 도려낸 철문을 바깥으로 뜯어낸 강태석이 이내 안쪽의 광경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금고 안으로 보이는 건 한 변이 5m 정도의 작은 정육면체 공간이었다.
제법 가득 차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안쪽은 거진 텅 비어있었다.
보이는 건 둘.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고 있는 소녀 하나.
그리고...
빙글...
빙글빙글...
후우우웅...
'저건 또 뭐래?'
정육면체 공간 정중앙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은빛의 일렁이는 30cm 반경 구체를 본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
우우우웅!
은빛의 구체가 빙글거리며 정사각형의 공간 정중앙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액체 같은 표면을 일렁이며.
신비롭게 주변을 비추며.
그리고 이를 경계하듯 바라보고 있는, 구석에 웅크린 소녀의 모습에 강태석이 어떻게 된 건지를 물어보려던 그때.
띠링!
<???의 ????를 발견했습니다.>
<자격 판명 중... 현재 ???가 당신을 스캔 중입니다.>
<부분 합격. ???가 당신에게 일시적 협력을 요청합니다.>
<응 할 경우 ???는 당신에게 협력하며 당분간 여러 가지를 도와줄 것입니다.>
<거래 조건으로 ???가 당분간 깃들 구동형 머신을 원합니다.>
거래, 일시적 협력.
당분간 깃들 구동형 머신.
이를 본 순간 강태석은 상대의 정체를 대충 알 수 있었다.
"기계 생명이네 이거. 이건 귀한 건데."
강태석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은빛 구체가 이에 동의라도 하듯 그 표면을 일렁거렸다.
**
강태석이 누빈 수많은 차원과 광대한 세계들.
대부분의 대지를 딛고 선 것들은 유기조직에 영혼이나 지성이 깃든 생명들이었지만, 우주 차원으로 좀 더 넓혀 본다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강화되지 않은 육체는 우주의 가혹한 공간과 다양한 행성에서의 환경에 적응하기 썩 부적합하다.
그렇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바로 금속 생명, 혹은 기계 생명.
살과 피 대신 금속과 기계에 영혼과 지성, 마력이 깃든.
눈앞에 있는 것도 그중 하나인 걸로 보였다.
'대부분 금속 생명은 고도의 지성과 문명을 내포한다.'
꿀렁.
일렁이는 은빛 구체를 보며 강태석이 턱을 매만졌다.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이 압도적인 경우가 많아 일반적으로 금속 생명은 압도적 수준의 문명을 구축한 경우가 많다.
육체가 강력하기에 우주를 홀로 누비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저 안에는 높은 수준의 무언가를 담고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얼핏 보기엔 슬라임 같아 보이지만 협력할 경우 장기적으로 여러 가지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왜 저런 녀석이 이런 망해가는 행성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승낙.
<협력에 응하겠습니까?>
강태석이 승낙 버튼을 누른 순간.
스스스스스슥...
마치 허공에서 지워지듯 파지직 소리를 내며 흐릿해진 은빛 구체가 공간을 뛰어넘듯 강태석의 뒤, 랜드마이너의 위쪽으로 나타났다.
**
치지지지직...
마치 렉이 걸린 게임에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듯 나타난 은빛 구체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랜드마이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어 생겨나는 변화.
콰지지지직!
콰직!
콰지지지지직!
일렁이는 은빛 구체에 집어 삼켜진 랜드마이너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더니 압축되어 한 점으로 수렴했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크기 3m가 넘던, 제법 커다란 기체는 사라졌고 남은 건 한 변이 10cm도 안 되는 자그마한 정팔면체 형태의 수정이었다.
동시에 강태석의 눈앞으로 새로운 상태창이 떠올랐다.
띠링!
<???는 오랜기간 지쳐 있었기에 이 거래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동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의 의식은 사라지지만 권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권한이 거래자에게 동조됩니다.>
<???의 육체는 거래자의 상념에 반응하여 자동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까지 협력할 것입니다.>
상념에 반응한다는 말.
누가 들으면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겠지만 나름 금속 생명들과 몇 번 거래를 해왔던 강태석은 이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된다.
<싸움이 끝나니까 조금 피곤하다. 누워 있고 싶기도 하고.>
<칼도 지나치게 커서 들고 다니기 불편한데.>
<언제 본진까지 걸어서 돌아가지?>
이 생각이 강태석의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전.
치지지지지직...
은빛 수정의 앞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딱 NO. 111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수정이 꾸르릉 소리를 내며 자신의 형체를 변화시켰다.
더 크게, 더 유려하게.
이어 나타난 건, 반중력 엔진을 탑재한 채 허공에 1m쯤 붕 뜬 길이 4m의 캠핑카.
유선형 동체와 열린 문, 그 안으로 보이는 침대와 의자, 간단한 조리 시설들까지.
"완벽해."
치지지지직...
허공의 빈틈으로 NO. 111을 쭈욱 밀어 넣은 강태석이 눈앞에 나타난 이동 수단을 보며 웃었다.
**
소녀, 이올레타는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벌어진 습격,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속.
자신의 아버지는 이를 악물며 소녀에게 이곳 금고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함께 달려오던 친구들은 볼크스들에게 모두 감염되고 자신만이 간신히 혼란 속에서 이곳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달랐던 것이 두 가지라면.
첫 번째로 제법 그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금고 안의 물건들은 어디 가고 은빛 구체만 있었던 것이며.
두 번째로 지금 나타난 저 사내는 어떻게 금고를 알고 또 어찌 저리도 자연스럽게 은빛 구체를 수거한 것인지.
누가 보면 마치 이를 위해 나타난 것처럼 보일 지경.
심지어 갑자기 허공에서 칼이 슥 사라지고 유선형의 탈것이 나타나는 건 나름 많은 것을 보고 자란 자신이 보기에도 마법 같을 정도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7층에서 왔어요? 다른 거주구?"
소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앞의 사내를 보며 물었다.
멸망 당시 각지,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7층의 생존자들.
자신들과 같은 곳에서 온 누군가라면 이곳의 존재도, 은빛 구체의 존재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소녀의 말에.
"그건 아니지만... 나중에 그쪽도 가긴 하겠지. 그나저나 어쩔 거니? 난 이제 나갈 건데."
"...!"
사내의 말에 멈칫한 이올레타가 이내 양 주먹을 꼭 쥐었다.
**
쿠르르릉...
폐허가 된 자원시설.
그곳에서 빠져나온 유선형의 부유선이 대지 위를 반쯤 떠 유유히 수림 사이로 진입했다.
현재 탑승객은 둘.
강태석 본인, 그리고 자신을 이올레타라고 소개한 소녀.
"잘 자네?"
쿠르르릉...
반자동으로 운전되고 있는 캠핑카의 전면 유리창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숲을 보면 강태석이 뒤쪽, 은빛 침상에 누워 어느새 기절하듯 잠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난리통에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렸을 테니 이해야 가지만, 또 처음 보는 사람 곁에서 저렇게 경계 없이 잘 자다니.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편하긴 하다."
쪼르륵...
운전석에 해당하는 은빛 의자에 몸을 추욱 늘어트리듯 앉은 강태석이 벽면 옆에서 쭉 뻗어 나온 수도와 잔 하나를 받아들며 홀짝였다.
거의 생각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해준다.
스마트폰의 인공 비서 기능이 극한으로 진화하면 아마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물론 지금에야 일상적인 것밖에 지원되지 않지만, 나중에 금속 생명의 원래 영혼이 깨어나고 녀석이 예전의 형상을 더 많이 찾는다면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스르르르륵...
기체가 부드럽게, 마치 유령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피해 가는 걸 보던 강태석이 자신도 혹시 한숨 잘 수 없나 고민하던 그때.
스르르릉...
갑작스레 잘 나가던 기체가 멈춰 섰다.
이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
크르르르릉...
"아 그래... 싸움은 내가 해야 하는 거구나.”
혹시나 했다.
좀 편하게 가나 했더니.
치이익.
키이이잉...
투덜거리며 열린 문으로 내린 강태석이 허공에서 길쭉하게 뽑혀 나오는 NO. 111의 손잡이를 잡은 뒤 어느새 수림 사이로 쿵쿵거리며 등장한, 마치 티라노사우르스를 닮은 크기 16m의 공룡 같은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
바다 저 건너.
A구역의 이종지대.
여러 지성형 종족들이 살아가는 컨셉으로 조성된 대륙의 어딘가.
후우우웅...
들과 밀이 가득한 황금빛 벌판,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높이 300m의 거대한 피라미드형 거주구의 정상에서 갈대를 질겅질겅 씹던 금발 청년이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아래만 봐도 아찔할 정도로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 그 옆에 꽂힌 높이만 해도 30m에 달하는 커다란 깃발.
콰르르르르륵!
높은 위치에 어울리게 강렬하게 부는 바람에 휘날리는 붉고 거대한 깃발을 청년이 투명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때.
타닥.
"또 이런 곳에 계셨네요."
"아래 있으면 너희가 일 시킬 것 아냐..."
"서류 작업도 중요한 겁니다. 장으로서 할 일을 하셔야지요."
"..."
피라미드 옆으로 뛰어오른 또 다른 흑발 청년의 말에 금발 청년이 고개를 슥 돌렸다.
여기서 또 말대꾸하면 시간이 길어지니까.
차라리 이 대화를 빨리 끝내는 방법은 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다른 파벌 녀석들은 어때?"
"똑같지요.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흑발 청년의 대답에 금발 청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한때는 한 깃발 아래 모여 싸우던 녀석들.
하지만 <찬>이 쓰러지고 모두가 흩어진 지금, 이제는 적만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이래서야 언제 다시금 숙원을 이룬단 말인가?
콰르르르륵...
머리 위에서 거칠게 펄럭이는, 커다란 창이 그려진 깃발을 바라보던 금발 청년이 이내 입을 열었다.
"G구역으로 사람을 보내봐."
"그 폐허에는 왜요?"
이에 금발 청년이 웃었다.
"이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며? 또 모르지. 그 개척민들이 무슨 힘이 되어줄지.”
G구역은 원래부터 자원이 넘치고 무언가의 흔적이 많은 구역.
득보다 실이 크다 생각하여 들어가지 않았을 뿐, 그곳을 파내고 있는 생존자들이 또 무슨 일을 해내고 있을지는 모른다.
이럴 때는 먼저 침 발라 놓은 게 임자.
그런 금발 청년의 말에.
"... 알겠습니다. 특사를 보내지요. 저희 이름으로."
<스피어>.
이제는 깃발을 잃고 창대만 남은 자신들의 이름.
콰르르륵...
금발 청년과 마찬가지로 깃발을 올려다보던 흑발 청년이 이내 피라미드 아래로 몸을 훌쩍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