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콰르르르르륵!
거칠게 톱니칼을 빼낸 강태석이 바닥에 널브러진 짐승을 보며 숨을 후 내쉬었다.
무슨 길 가다가 레벨 16짜리를 만난단 말인가?
하지만 또 못 이길 정도는 아닌 녀석이다.
<강태석>
> 레벨 : 13(77.77%)
> 직업 : 전마강갑 지주(등급-?)
> 스킬 : 전마강갑 장착*해방(?)/영뇌수(D+)/무량검기(D+)/그림자칼-지(D++).
> 스탯 : 흑선(D+)9/암흑 회로(D+)9/짙은 그림자(D+)9/어둠샘(C+)9/이상 상념(D+)8.
> 무장 : 전마강갑(?)/여의(S?)/칠채영창(B?)/오시리스(C-잠항중)/알레고리아(B)/NO. 111(C+).
상태창을 한번 확인한 강태석이 멈춰선 캠핑카 옆, 시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길에 땀 한번 시원하게 뺐지만, 그와 별개로 레벨은 착실하게 오르고 있다.
돌아가는 길이 멀진 않으니 레벨업까진 무리겠지만, 편하게 돌아가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다.
'아니, 사실 더 안 싸웠으면 좋겠다.'
목이 날아간 공룡을 보며 강태석이 중얼거렸다.
레벨업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제일 좋은 건 그냥 안 싸우고 끝내는 것이다.
그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레벨이 착실하게 착착 올라가고 있는 것이지.
치익...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바깥 상황을 조심스레 살피는 소녀를 본 강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 한번 툭툭 털고 다시 안쪽으로 타려던 순간.
스스슥...
스슥...
수림 주변에서 드러난 인기척에 강태석이 넣어 두려던 칼의 손잡이를 다시금 움켜쥐었다.
당장 느껴지는 기척만 해도 서른.
거기에 하나하나의 기척이 사납고 약하지 않다.
이 정도 숫자에 이 정도 무력을 갖춘 이들이 우글거린다면 답은 하나.
자신이 온 숲으로 흩어 놓은 아래층의 범죄자들이다.
'생각보다 더 깊이 들어왔네?'
강태석이 거대한 칼날 전체에 무량검기를 휘감아 내치려던 그때.
"잠깐 타임! 타임, 타임!"
"?"
가장 앞에선 사내의 커다란 외침에 전신에 힘을 주려던 강태석이 멈칫하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
상대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우리 영역으로?"
"그래. 너 아너스빌 그 여자랑 같은 패일 거 아냐."
"...?"
강태석이 여전히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인 사내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녀석이 아너스빌의 이름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런 강태석의 표정에 되려 사내가 이해 안 간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야 너. 그쪽 아냐? 희한한 걸 타고 다니길래 당연히 그쪽인 줄 알았는데."
"맞긴 맞지."
"그러면 아직 아래쪽 말단까진 이야기 안 한 건가? 그 여자가 사방으로 지금 사절을 보내고 있어. 자신들에게 협력하면 이전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우리는 뭐... 이쪽저쪽 고민하다가 너희 쪽으로 붙기로 한 거지. 아무래도 그 시커먼 꼬맹이는 영 껄끄럽단 말이야. 자존심도 상하고."
단번에 무시하면서 치고 들어오는, 지나치게 친절하면서도 불친절한 사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강태석은 이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결국 아너스빌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범죄자고 뭐고 일단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품어, 세력을 확장 하기로.
아마 다른 대륙의 군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서로, 혹은 각자들을 신경 쓰기도 바쁠 녀석들이 대륙 너머 이곳까지 손을 뻗기에는 시간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굳이 중장갑병기가 준비되고 충분한 힘을 갖추기 전 이 녀석들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건 지나치게 리스크가 높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이런 결단을 내리고, 이에 카티같은 이들이 동조했을 이유는 하나다.
당장 흩어진 범죄자들을 끌어모으며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대적자가 나타난 것이다.
방금 전 사내의 말에도 힌트가 있었고.
바로 시커먼 꼬맹이.
정확히 특정할 순 없지만, 마찬가지로 수하를 뿌려가며 세력을 결집시키고자 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흩어진 범죄자들을 배척하며 놔두면, 갈 곳 없는 녀석들은 불안정한 요소에서 확실한 적이 된다.
결국 이대로 숫자에 밀려 패배하지 않으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위험하긴 해도 일단 받아들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잘 결정했네."
"응? 뭐?"
"아니다."
혼잣말을 한 강태석이 사내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내에게 한 말이 아닌, 아너스빌에게 한 말이다.
주변 상황을 고려한 좋은 결정이다.
당장 시간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고비만 잘 넘기면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도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서른 명 중 검기 사용자만 해도 세 명.
이런 녀석들을 받아들여 제대로 세력으로 삼는다면 다른 열한 군세들과의 차이를 급격하게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이 고비를 넘기는 게 만만치 않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강태석 역시 현재의 결단을 내렸다.
"고맙지만, 제안은 거절하지. 따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굳이 같이 갈 이유도 없어 보이고."
강태석이 사내들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같이 갈 이유가 없다.
녀석들도 본진을 알 테고 자신도 본진의 위치를 아니까.
가는 길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못 지날 정도로 위험하다면 모르겠지만 레벨 20이 넘는 상위개체의 영역에 기어들어 가지 않고서야 그 정도는 아닌 상황.
무엇보다 녀석들은 통제되지 않은 변수가 너무 많은 위험요소이다.
영 불안해하는 친구도 하나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 뭐. 그럴 수 있지. 가던 길 가봐. 우리는 따로 우리끼리 알아서 갈 테니까."
"이해해줘서 고마워. 나중에 본진에서 보면 인사라도 하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키르르릉...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불안하다는 듯 바라보던 소녀가 있는 캠핑카로 향한 강태석이 이내 스르륵 자동으로 열린 문을 타고는 시동을 걸어 부드럽게 다시 출발했다.
**
스르르르릉…
"이야. 잘나가네. 하여간 그놈들 집단이 먹고살 만하긴 한가 봐? 저런 말단 녀석도 저런 거 가지고 있고."
서른의 집단을 이끌던 셋, 검기 사용자 중 하나가 수림 사이로 스르륵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흰빛의 유선형 기체를 보며 감탄을 토했다.
이미 말을 꺼낸 사내의 표정에는 무시의 빛이 역력했다.
자신들이 꺼낸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이, 말단인 게 거의 확실했으니까.
상대가 자신들 같은 검기 사용자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시절, 검기 사용자 같은 건 발에 채였던데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잠들기 전엔 강기 사용의 경지였기 때문이다.
에테르에 절여져 형편없이 약해져 버리긴 했지만 검기 사용자가 눈에 찰리가 없었다.
그런 사내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여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저거 그대로 그냥 보낼거야?"
"응? 무슨 말이야. 저거 그 살벌한 여자 녀석네라니까? 그쪽으로 합류하고 있는데 왜 공격해?”
앞의 두 사람과는 다른, 조금 어리바리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 하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애초에 이 근방에 저런 신기한 최신 문물을 가지고 있을 녀석들은 생존자집단 녀석들뿐이다.
자신들처럼 에테르장에서 갓 풀려난 이들은 그냥 어디서 칼이나 철판 쪼가리나 잘라 쓰고, 옷이나 간신히 걸치고 있는 수준이다.
물자도, 병기도 모든 게 부족한 상황.
그게 지금 좀 더 강해 보이는, 시체를 부리는 소녀 대신 아너스빌이라는 여자 쪽에 붙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 아닌가?
동굴 속에 처박혀 주리게 지내느니 좀 풍족해 보이는 녀석들에게 들어가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지내자고.
더불어 미인들도 많으면 좀 즐기고 말이다.
'하여간 여기 있는 녀석들은 왜 죄다 못생긴 거야? 그 여자도 얼굴 상처만 아니었으면 끝내줬을 텐데.'
직접 사절로 왔던 여인, 아너스빌을 떠올리며 중년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
"..."
"... ..."
한심하다는 듯 중년 사내를 바라보던 사내와 여인, 그중에서도 여인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아. 그래서 말한 거잖아. 일단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덩치를 키워서 들어가야 한다고."
안으로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다.
안에 들어가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솔직히 아너스빌이라는 그 여자가 자신들이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받아들이는 거겠는가?
당장 내버려 두면 들개가 늑대가 되어 자신들을 물어 뜯을까 봐, 필요해서 들이는 것이지.
그러니 최대한 덩치를 키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 다른 녀석들을 짓누르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키우기 위해서.
말하자면 자신들의 목표는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도 주축이 되는 것이다.
베스트는 아너스빌이라는 그 여자와 똘마니들조차 젖히고 군림하는 것이지만, 차선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덩어리만 구축해도 아주 괜찮다.
아니, 오히려 이게 베스트일 수도.
머리 아픈 일은 녀석들에게 다 떠넘기고 자신은 다른 덩치 큰 녀석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어 귀족마냥 즐길 수도 있으니까.
하여간 그러려면...
"귀한 것들은 최대한 박박 챙겨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잖아. 겸사겸사 수하로 들어올 녀석들도 찾고."
여인이 아스라히 어둠 속 수림으로 사라져가는 유선형 기체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저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귀한> 물건이라고.
겉으로 보면 무슨 휴양용 장난감처럼 보이겠지만 상재의 가문에서 자라 정말 수많은 것들을 보고 교육받으며 자라온 여인은 알 수 있었다.
겉모습만 저렇지, 저건 정말 대단한 보물이다.
이는 거의 직감에 가까운 능력이다.
심지어 믿기는 힘들지만 마주친 녀석에게서도 왠지 모를 보물의 냄새가 솔솔 났다.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의미.
"일단 쫓아가자고. 우리는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으니까 말이야."
"어... 어어 그래. 그래야지. 야야! 이놈들아! 가자!"
주변 수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치는 중년 사내를 보며 피식 웃은 여인은 이내 고개를 돌려 옆, 사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저 녀석이 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고 우리가 그 잔해를 수습해 줬다면... 그것까지 돌려내라 하진 않겠지? 우리 습득물이잖아. 거기에 우리 손이 아쉬워 부른 입장이고."
그런 여인의 말에.
"크흐. 그렇겠지 아마?
그 의미를 깨달은 사내가 사납게 웃었다.
**
쿠르르릉...
"뒤통수가 어째 간질간질하네."
"엇..."
"아, 아냐아냐. 너 때문이 아니고."
좌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강태석이 뒤쪽, 침대에 쪼그려 있던 소녀의 말에 몸을 돌리며 손을 저었다.
이유는 소녀 때문이 아니었기에.
거슬리는 건 아까 전부터 주욱 따라붙은 녀석들.
...
자신과 연결된 금속 생명의 존재가 뒤따라오는 녀석들을 감지해 자신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만능은 아닐 테니 아까 짐승녀석처럼 기척이라도 감추면 잘 찾지는 못할 텐데 이 정도라면 거의 대놓고 따라오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가는 방향도 같고 서로의 목적에 대해서도 소통했으니 기척을 감추고 따라오는 게 오히려 더 수상하긴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길 바란다.'
스윽.
눈가에 한순간 감돌았던 냉기를 지운 강태석이 이내 부러 웃으며 눈앞, 소녀와의 사이에 온기를 좀 둘러보려고 하던 그때.
스르르륵...
"이번엔 절벽이야?"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서는 기체에 고개를 돌린 강태석이 정면을 우뚝 가로막은 험난한 장애물을 보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