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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에서 내린 강태석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절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절벽이 아니라 구릉.
뒤집어진 대지와 기존의 산들이 뒤엉켜 대지 사이에 거대한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또한 난동을 부리던 몬트라 녀석의 작품일 것이다.
물론 큰 문제는 아니다.
좀 돌아가면 되니까.
키이잉...
이미 스스로 길을 찾은 금속 생명의 기체는 방향을 슬쩍 틀어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태석의 눈으로도 보이는 출구.
오른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 구릉 일부가 무너져 내린 곳에 건너편으로 향하는 협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면 될 터.
하지만 잠시 후.
쿠르르릉...
"어 왔어? 금방 또 봤네. 그런데 여기 지나가야 해?
타닥...
타다다닥...
어느새 천막과 모닥불 등을 펴고 좁은 협곡 사이에 완전히 진지를 구축한 셋과 수하들을 보며 강태석이 숨을 푸 내쉬었다.
**
연구시설, 상부 본진.
콰르르르릉!
“서둘러! 저주파 장치 권역을 좀 더 넓혀야 하니까.”
“거기 타워 조심하고! 망가지면 안 돼!”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는 하늘 아래, 연구시설 위에서는 그야말로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구시설을 감추기 위해 건드리지 않았던, 울창하던 수림들이 마르트를 비롯한 검기 사용자들과 생존자들에 의해 쩍쩍 쪼개지고 쓰러지며 벌목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수림 사이의 공간으로 건설로봇에 탄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각종 건축물과 임시 거주지역을 건설하고 있었다.
수천 명을 넘어 수만 명, 아니 그 이상을 수용하기에도 충분한 수준으로.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던 군파츠가 턱밑을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물었다.
옆, 무표정한 눈으로 선 아너스빌에게.
"이거 다 괜찮은 거야? 먹고 마실 수는 있고?"
"이미 소장에게 확인했어. 영양액과 식수의 보급은 충분하다는 걸. 맛난 것들은 좀 부족하겠지만."
아너스빌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지하연구시설을 관리하던 소장에게 들었다.
그 시설 자체가 연구뿐 아니라 이 거대한 G구역의 생물들 전원에게 먹이 및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용도를 겸하고 있었다고.
말하자면 사육의 용도.
연방이 무슨 목적으로 이 거대한 구역을 짓고 먹을 것까지 먹여가며 안쪽의 괴생명체들을 키우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카트란이 오자고 한 이 대지에서는 적어도 먹을 것 문제로 고생할 일은 없다는걸.
에너지 공급망이 조금 부족하긴 한데 이 또한 차례대로 고쳐 쓰고 있는 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에너지 효율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차츰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오시리스에 남겨두고 온 물자들을 확보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달리안에게 물으니 이 거대한 대지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다고 하니 나중에 자리 잡고 나면 인원을 보내 가져오면 될 터.
즉 이미 수많은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는 끝났다.
문제는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들어온 이후다.
“으하하하하!”
“앞으로 여기가 우리가 지낼 데야?”
저 멀리.
엑소슈트와 레일건으로 무장한 기존 섹터원들의 사이로 희희낙락하며 떠들어 대는 수십, 수백 명의 신입들이 보였다.
하나하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쫓아 기어 올라왔던 범죄자 녀석들.
마치 자신들 안방인 것처럼 작업 중인 이들을 보며 웃고 있는 남녀들, 그들을 내려다보며 아너스빌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라고 하여 저놈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아니,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개 목줄을 채운 뒤 노예병 정도로 써먹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끝장이다.
그 소문이 퍼지는 순간, 아직 합류하지 않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녀석들이 모조리 상대편으로 붙어버리거나 저들끼리 모여 세력을 형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이곳 시설을 약탈하러 차례대로 오겠지.
어차피 먹이를 줘야 한다면 빼앗기느니 먹여 자신이 부리는 것이 낫다.
비록 주인마저 물어뜯으려 할, 아니 어쩌면 주인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놈들이니 순탄치는 않겠지만.
"... 괜히 넘겨 받은 거 같은데."
"응?”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어쩌면 그 녀석은 이런걸 미리 예측하고 한발 먼저 내빼버린 걸 수도.
이마를 부여잡은 아너스빌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는 군파츠를 무시한 채 저 너머, 카트란이 실종된 산맥 방향을 바라보았다.
**
협곡, 통로 입구 부근.
끼이익.
"무슨 일이에요?"
"별거 아냐. 일단 우리도 밥이나 먹자."
차 안으로 들어와 이올레타를 안심시킨 강태석이 전면 유리창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주 그냥 싸움박질만 할 거 같던 이미지와 달리 따박따박 말을 잘하는 녀석이었기에.
<우리도 저쪽으로 가는 길이었다니까? 방향이 비슷한 게 당연하지.>
<협곡은 우리가 이미 먼저 발견하고 점찍어둔 장소였다고. 양쪽만 보면 돼서 방어하기 편하니까.>
<지나간다고? 여기 이미 우리가 천막 다 치고 자고있는 녀석들도 있는데?>
맞는 말이긴 하다.
보니까 아까전 마주친 서른 명이 돌아다니는 A팀이고, 이곳에 있던 기존 서른 명가량이 진지를 지키는 B팀.
자신들이 온다고 후다닥 가서 자리 잡은 것도 아니고, 상당한 시간 전에 자리를 잡은 뒤 돌아가며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듯 보였다.
아예 지나갈 틈도 없이 꽉 틀어막은 채 사내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초대하고 싶지만, 우리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하룻밤만 앞에서 자고 가라고. 내일 아침엔 어차피 우리도 이동할 생각이니, 그때 비켜줄게.>
유들유들 웃으며 말하는 게 속으로 잠깐 싹 밀어버린 뒤 그냥 지나갈까 고민했지만...
'역시 그럴 수야 없지.'
강태석이 푸푸푸푸 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일단 그런 건 자기 성미에도 맞지 않는 데다 후일 뒷감당이 문제다.
아너스빌이 지금 저렇게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분전 중인데 일을 모조리 떠넘겨 버린 자신이 여기서 녀석들과 사고를 친다?
그것도 합류하겠다고 오는 녀석들과?
사고야 자신이 쳤겠지만, 그 수습은 아너스빌이 모조리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필요하면 손을 써야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
"밥 먹고 잘 준비하렴.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자고 가야 할 것 같으니까."
"... 저 사람들 근처에서요?"
이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수림 안으로 이동해서 잘 수도 있겠지만 녀석들 근처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까전의 괴물 같은 게 튀어나오면 자신만 골라서 먹으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심지어 녀석들도 바보가 아니니 머릿수가 우글우글하면 달려들지 않을 놈들도 많을 터.
반면 수림 안으로 들어가면 그걸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자는내내 달려들려고 할 온갖 괴물들을.
생각만 해도 매우 즐거운 밤이다.
반면 여기서 자면...
"밤새 모기 쫓는 것 보다는 그냥 한바탕 하는 게 낫지 않을까?"
"????"
"아냐. 밥먹자. 그런데 혹시 요리 잘하니?"
금속 생명은 유기 생명체의 취향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듯 했다.
떨그럭.
떨걱.
비상대피소 지하에 조금 남겨져 있던, 챙겨온 물자들을 거의 재료 그대로 쟁반에 덜컥 담아 꺼내주는 기계팔에 강태석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
협곡, 진지.
"와 진짜 저기서 자네."
"..."
협곡 밖, 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기체를 보며 말한 중년 사내의 감탄에 사내와 여인이 심기 불편한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간이 큰 것도 정도가 있다.
분명 이 정도로 티를 냈는데 저런 식으로 나온다?
이 경우 셋 중 하나로 보인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 없는 놈이거나.
자신의 배경을 믿고 당당하게 나온다거나.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실력에 넘치는 자신감이 있거나.
셋 모두 거슬리는 케이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마음에 안 들었다.
둘은 눈치 없는 녀석들을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었으니까.
눈앞, 중년 사내처럼.
"그럼 이제 어쩔 거야? 지금 당장 쳐 죽이러 가면 되나? 나 저기서 한번 자보고 싶은데."
은빛 유선형 기체를 보곤 흥분된다는 듯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말하는 중년 사내의 태도에 여인이 이마를 짚을 뻔했다.
대책이 없어도 저리 없을 줄이야.
사실 첫 번째, 두 번째면 중년 사내의 제안도 나쁘지 않긴 하다.
하지만 세 번째일 경우, 거기에 실력이 상상 이상일 경우.
이를 감안해봐야 한다.
혹여 벌집을 건드리게 되면 어쩐단 말인가?
'그렇다고 괴물들을 저기로 유인하기에는 리스크가 좀 있고. 오늘 밤을 넘기기도 그런데. 이 바보만 보낸다고 해서 우리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 협곡만 지나면 생존자들 집단의 세력이 바로 코앞.
거기서 뭔가 일을 벌이면 아무래도 걸릴 가능성이 크다.
중년 사내만 보내서 싸움을 붙여보고 싶지만, 혹여 실패하면 공모한 자신들에게까지 책임이 넘어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여인의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아냐아냐. 생각해보니 저 녀석 건드리기엔 너무 가까운 것 같아. 우리도 그냥 잠이나 자자고. 내일 비켜주지 뭐."
"엉? 어엉?"
"...?"
갑작스런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는 물론, 여인마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여기서만 처리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
한데 왜 굳이 저런 말을?
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아쉬운 걸 넘어 참기 힘들다는 듯 충혈된 눈으로 기체를 바라보는 중년 사내와 묘한 미소를 띈 사내를 번갈아 본 여인은 사내가 무슨 생각인지를 대충 알아채고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사고 치기는 좀 힘들겠네. 우린 먼저 잘게 아저씨. 피곤하기도 하고. 아저씨도 얼른 자라고."
그런 여인의 말에.
"으음... 음. 그래."
중년 사내가 차체, 정확히 말하면 차체에 난 창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빼꼼 고개를 내민 소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
구어어엉...
캠핑카 내부에 해먹을 매달아 누운 채 기체 천장, 루프탑처럼 열린 창 너머로 달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소음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작게 난 창으로 보이는 건 수림 너머에서 이쪽 방향을 노려보는 여덟 개의 눈동자.
네 마리의 생명체가 아니다.
거진 8m 높이에서 빛나는 여덟 개의 눈동자가 기성을 흘리며 자신들 방향을 보고 그르릉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녀석의 덩치가 어느 정도 클지 짐작이 가는 상황.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구르릉..
쿠우웅!
쿠우우우웅!
캠핑카와 그 너머, 진지를 번갈아 바라보던 녀석이 여덟 개의 눈동자를 꿈뻑이다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녀석과 눈을 마주하던 강태석 역시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짐승들은 바보가 아니다.
기계 병기들은 오직 살육을 위해 스스로의 몸을 내던지지만, 녀석들은 엄연한 이곳 생태계의 일원.
천적도 있고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 죽기에 행여 무리하다가 상처라도 입으면 극도로 위험해진다.
몬트라처럼 무서울 게 없는 놈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우글우글 모여 있다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쉽사리 덤벼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인간이 더 바보 같을 정도.
지금처럼 말이다.
"잠도 못 자게 하는구먼."
해먹에 누워있던 강태석이 한탄을 토했다.
진지 쪽에서 슬금슬금, 조용히 다가오는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잔뜩 억누르긴 했지만 집중하고 있다면 알아차릴 수 있는, 강한 존재의 기운이.
강태석은 그 정체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중년 사내.
스륵.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석은 허공에서 칼을 뽑아 나갈까 하다가 아래, 침상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꼬마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타닥.
스르륵.
조용히 바닥에 발을 내디딘 강태석이 맨손으로, 전마강갑도 두르지 않은 채 그대로 문을 열고 차의 바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