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43화 (14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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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이 날 먼저 습격했다.>

이를 내뱉는 상대의 말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사내는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를 뻔했다.

참기는커녕 증거 불충분 상태에서 자신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거대한 칼날을 휘둘러댄 것이 누구란 말인가.

한데 자신들이 습격자라고?

파르르...

사내가 뻐끔뻐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차마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 목숨만 붙어있을 뿐, 어떤 이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길 정도로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지경.

하지만 사내의 경우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

'복수해주마. 진실을 밝혀서.'

꾸드득...

바닥에 기던 사내가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흙더미를 움켜쥐며 증오 어린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아너스빌은 결코 자신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만약 녀석이 자신들을 확실한 이유 없이 박살 냈다는 게 밝혀지면 녀석 또한 처형을 면할 수 없을 터.

훗날 진실이 밝혀지면 본보기로 삼아야 하기에 목이 날아가게 될 가능성이 99%이다.

여기까지 떠올린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상대의 등을 바라보던 그때.

"네 말이 그렇다면 맞는 거겠지."

"그렇지? 처리 좀 잘해줘. 난 돌아온 김에 좀 쉬려고."

"...?!?!"

'$#@#!##!'

저 말을 믿는다고?

바닥에 있던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으로 온갖 욕설을 토해냈다.

**

연구시설, 본진 위.

키이이잉...

앞장서 안쪽으로 진입하는 흰빛의 기체를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너스빌의 곁, 망설이던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새로이 조직을 개편하며 보좌역을 맡게 된 사내.

"믿기 힘듭니다. 아마 카트란이 저들을 먼저 습격했을 겁니다."

사내가 흰빛 기체 안에 있을 카트란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사내는 아너스빌을 대신해 아까전 난장판 속, 거의 반시체에 가깝던 검기 사용자 셋과 무장병들 수십과 그들이 사용하던 물자 등을 모조리 수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장의 흔적들을 모조리 확인할 수 있었다.

흔적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말해주는 법.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비록 처음은 저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어도 이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장을 볼 때까지 밀고 간 것은 카트란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불만이 컸다.

카트란은 분명 지금 상황에서 저들을 쉽사리 건드리면 아너스빌이 곤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한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런 사내의 말에.

"압니다."

"한데 왜 그냥..."

<넘어갔느냐>라는 끝마디를 생략한 사내를 흐릿한 목소리에 아너스빌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가장 충성스럽다고 여겼기에 일단 보좌역을 맡긴 상대.

카트란의 이번 행동을 탐탁치 않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내를 바라보던 아너스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누가 정말로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누가 잘못<했어야>하는지가 중요한 거지."

"...!"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어요."

아너스빌이 앞장서 가는 카트란과 뒤쪽, 실려 오고 있을 녀석들을 떠올렸다.

사실 누가 실제로 잘못을 했고 시작을 했으며 끝장을 보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누가 잘못한 쪽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는 정해져 있다.

뒤쪽 녀석들이 만약 올바르고 불쌍한 쪽이라면?

지금쯤 계속 새로이 유입되어 안쪽에 우글거리고 있을 범죄자 녀석들이 왜 자신들 쪽을 그쪽 세력이 공격했냐며 정신없이 밀어붙이고 물어뜯으려고 할 테니까.

그렇기에 철저히 못되고 사악하며 아주 막 나가는 짓을 한 건 카트란이 아닌 녀석들이어야 했다.

실제로 조사 결과 <그렇게> 결론이 났으며, 선량한 카트란을 공격한 뒤쪽 녀석들은 그 죄에 적합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녀석들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말이다.

지금 당장 다 죽이는 건 좀 그렇지만, 일단 내부가 안정될 때까지 철저히 격리시켜 가둬 놓을 예정이다.

그리고 나중에 제일 위험한 곳으로 보내 조용히 정리하면 될 터.

"아마 카트란은 다 알고 한 거겠지요. 자신이 무조건 무죄가 될 거라는 걸."

그런 아너스빌의 말에 보좌 사내가 침음을 흘리며 앞쪽, 천천히 구축된 진지 안을 향하는 흰색의 기체를 바라보았다.

**

키이잉…

수림을 베어 만든 널찍한 공터, 그곳을 중심으로 지어진 수백 개의 임시 구조물들과 우글거리는 이들.

그 사이를 지나 페리트란네의 구역 외곽에 흰색의 기체를 가져다 댄 강태석이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스윽 둘러보았다.

자신이 출발하기 전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활발함, 혹은 격렬함.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기가 진지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새로이 들어온 이들, 그리고 기존에 존재하던 이들이 모조리 뒤섞여, 아마 당분간은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활화산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이를 보며 강태석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진즉 떠넘기길 잘했다고.

"아너스빌이 알아서 잘하겠지."

아까전 소녀, 이올레타는 진즉에 아너스빌의 수하에게 넘겨 보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 보다 그쪽에서 데리고 있는 게 훨씬 나을 테니.

들어보니 페리트란과 아린의 주도하에 어린 소년, 소녀들만이 모여 지낼 구역이 따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여기서 자신이랑 둘이 지내는 건 모양새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혼자 있는 게 더 편했고.

"후우."

까딱.

굳이 있는 침대를 놔두고 그 위로 걸려있는 해먹에 가서 누운 강태석이 금속 생명의 내부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했다.

아마 파르스의 업그레이드는 끝났을 것이고 이미 아래쪽에서 생산에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 그런 티가 안 나는 건 쓸데없이 새로 유입한 이들에게 경계심을 유발하게 될까 봐 숨겼을 것이다.

충분한 양의 전투 병기, 파르스가 준비되고 이에 탑승할 파일럿들까지 훈련이 끝나면, 그렇게 실전에 투입될 파르스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확보되면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내외부의 균형과 규칙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때가 되면 이 혼란은 무력에 의해서라도 강제로 찍어 눌려 평온해질 것이다.

반대로 말해 그전까지는 이 혼란이 좀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뭐 다들 알아서 잘하겠지만.

'... 역시 이 세계에 온전히 정이 붙지는 않아.'

강태석이 해먹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이방인.

이곳에 가족이 있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며 그렇기에 욕망과 야망이 있는 이들과는 다르다.

물론 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는 끈끈한 무엇보다는 동료 간의 그것에 가까운 정도이다.

그렇기에 지금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카티나 페리트란들과도, 야망과 책임감 중간 지점에서 격축하고 있을 아너스빌이나 군파츠등과도 다르게 움직이게 된다.

적당히 자신의 일을 했다 여겨지면 혼자 있고 싶어진다.

지위나 인간관계 따위의 구축에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어차피 자신은 이곳을 떠날 이방인이기에.

하지만 일단은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는 게 우선이다.

아마 이런 상황이 무한히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 도착해 <방주>를 탄다면, 주어지는 선택지가 있을 터.

이를 확인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세계관의 끝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는 착실히 진행 중이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다.

<멸망 현재 79.9% 진행 중...>

푸우.

눈앞의 창을 바라본 강태석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몸을 누였다.

다음 단계는 프라다비아와 소입자코팅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결정해도 된다.

그전까지는 아너스빌과 아린, 카티들에게 맡기면 될 터.

키르르르륵...

푹 쉬고 싶다는 강태석의 소망에 발맞추듯 캠핑카 형태를 한 금속 생명의 외관이 챠르륵 소리를 내며 외부의 수많은 기척과 소음마저 포근히 줄여버리던 그때.

저 멀리 자리 잡은 곳에서 동쪽의 해안으로 어떤 무리들이 도착했다.

**

푸른 하늘, 새하얀 모래사장, 내리쬐는 햇살과 철썩이는 파도.

어디 휴양지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광경을 자랑하던 해변가로 크기 30m 정도 되는 작은 선박이 도착했다.

쿠르르르릉...

모래사장을 깊숙이 밀어붙이며 고랑을 만들어낸 배 한 척.

터덕!

터어어억!

"후우. 도착."

배에서 내린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경 50m 정도 되어 보이는 모래사장, 이를 둘러싼 높은 절벽들.

이곳은 예전 자신들 <스피어>가 G구역을 정탐하기 위해 왔을 때 종종 사용하던 자연의 항구였다.

근방 수심이 깊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출항을 하기에도, 거대한 짐승들로부터 들키지 않기에도 그만인 곳이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통해 왔어도 되지 않아요?"

터턱.

터터터터턱!

자신의 뒤를 따라 내리는 수십 명의 이들, 그중 가장 앞에 선 사내를 보며 묻는 청년의 말에 사내가 혀를 찼다.

"5층을 통해서 왔다갔다 거리면 다른 세력 녀석들이 눈치를 채지. 그리고 올라왔을 때 기습을 받을 수도 있고."

"... 확실히 여기가 이제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기습 걱정도 해야 하고."

청년이 절벽으로 감싸진 자연 해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이들을 만날 목적으로 오긴 했지만, 기습 이야기를 꺼내니 확실히 자신들이 사람 사는 곳에 왔다 싶어서.

하긴 그렇게 치면 이렇게 배를 통해 이동하는 게 낫긴 하다.

5층과 달리 광대한 바다와 해변가들을 일일이 감시하는 건, 각 세력들이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저주파 발생장치가 달린 저 특수한 배를 이용하면 바닷속에 사는 <녀석들>로부터 습격받을 일도 훨씬 줄어드니까.

하여간 잘 도착 했으니 이제 자신들의 할 일을 하면 그만이다.

"우리 임무가 정확히 뭐였죠?"

청년의 말에 배에서 뛰어내리는 이들을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 돌려 대답했다.

"새로 나타나 이곳에 자리 잡았다는 외부인들의 확인 및 접촉. 그리고 풀려난 이들로 인해 이곳 세력 구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들을 비롯한 11군세들의 최근 관심사는 셋 정도였다.

다른 11군세.

외부에서 도착했다는 생존자집단.

갑자기 풀려난 수많은 범죄자 녀석들.

사실 첫 번째 요소만 없다면 뒤의 두 번째, 세 번째 요소는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군대화가 진행되지 않고 진행 될 리도 없는 민짜 생존자 집단들 따위, 자신들의 상대가 될 수 없으니 여차하면 그냥 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첫 번째 요소가 있기에 이야기가 다르다.

정밀하게 힘의 균형이 잡혀있는 상황에 무시하기에는 또 너무 큰 두 덩어리 세력들의 등장.

이 녀석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균형을 무너트릴 수도, 우위를 점해 눈엣가시 같은 다른 녀석들을 뒤흔들 수도 있다.

자신들이 굳이 다른 세력들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배를 타고 움직인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들은 이점에 있어 우위에 있다.

자신들의 A구역은 다른 녀석들보다 이곳 G구역에 가장 가까웠으니.

잠시 후.

"다들 움직이자."

"네."

"상대가 적대적 도발을 한다고 해도 무작정 죽이지 말고. 일단 사로잡은 뒤 이야기를 들어봐라. 나중에 협력적 관계가 될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물론 협력적 관계라고 해도 자신들이 우위일 것이다.

마치 강대한 침략자 군대에 협조하는 원주민 세력처럼.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잠시 후.

스르르르륵.

스륵.

모래사장 위에 서 있던 63명의 남녀들이 청년과 사내를 따라 절벽 아래, 바깥의 구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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