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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안.
서른의 남녀를 이끌고 온 사내와 쉘터내 주요 인원들을 그러모은 아너스빌이 자리 잡았다.
아린, 카티, 군파츠, 마르트 등 모두가 검기 사용이 가능한 이들로만.
각 쉘터장들은 모으지도 않았다.
여차하면 벌어질 충돌 속, 방해만 될뿐더러... 보여주면 상대에게 무시만 당할 상황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전력 차이가 나는 상황.
쿠르르릉...
앞의 사내는 물론, 뒤쪽에 선 서른의 남녀로부터도 잘 단련된 굳건한 기도가 흘러나온다.
하나하나가 검기 사용자, 그것도 수준급.
그 상황속에서 한껏 여유를 품은 사내가 자신의 앞에 주어진 차를 호로록 들이켜며 물었다.
"그러니까 남쪽에서 왔다 이거군요. 대단한데?"
사내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곳에 아직 사람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곳의 생존자들을 그러모아 기계병기들로부터 탈출해 이곳까지 도달할 줄은 더욱 몰랐다.
심지어 궤도 엘리베이터를 분리해 북쪽으로 배처럼 향하게 만든 것도 추측건대 이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자신들 스피어 내부, 수많은 이들도 제법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덕분에 고립되었다고 생각했던 자신들에게도 북쪽, 연방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곳으로 향할 희망이 생겼으니까!
그리고 이곳에 와본 뒤에야 그게 어떻게 가능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귀족 가문의 혈통이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가능하지.'
사내가 눈앞에 앉은 금발의 여인, 아너스빌을 바라보았다.
온몸에서 풍겨오는 기도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귀하디 귀한 그 혈통.
핏줄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가진바 지식까지.
일반인은 비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이며 실제로 저 바깥의 루한 공국은 오직 귀족가의 혈통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굴러가고 있는 동네였다.
심지어 그 공국의 혈통 존재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고 소문이 났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남쪽 촌 동네에 귀족가의 여식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였다면 지식과 무력으로 남쪽을 통합하여 이곳까지 도달하고, 또 이 거대한 궤도 엘리베이터의 비밀을 알아내어 움직이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사내가 한결 따스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하지요. 동맹을 제안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좀 거칠던데요."
"하하. 그렇게 다뤄줘야 되는 놈들은 그렇게 다뤄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너스빌의 말에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당연한 이야기.
자신의 말은 상대를 가린다.
적합한 가치를 지닌 이에게는 존대를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대화를 위한 한마디조차 아깝다.
개한테 매만 있으면 되지 왜 말을 건단 말인가?
하여간 이곳에 도달해 내린 결론은 대만족.
다른 생존자들 모두가 죽고 귀족가의 혈통 하나만 데려가도 남는 장사일텐데 심지어 그 세력들마저 제법 구색이 잡혀가고 있었다.
권세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저 멀리, 다른 11 권세 중 하나인 <군벌 연합>들의 군벌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듯 한데 그 정도면 <덤>으로서의 가치는 넘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내의 생각.
"우리로서는 썩 구미가 당기지 않는데요. 들어보니 당신들, 열한 개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서요?"
"..."
아너스빌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곳에서 흘러든 생존자들이 알만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슬쩍 아너스빌의 뒤에 선 이들을 스윽 훑어보니 아주 살짝이나마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아마 예전, 플래그가 붕괴되며 흩어진 생존자들 중 하나일 터.
'입이 싸군.'
그렇지만 사내는 빠르게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들이 이곳에 빠르게 도착했을 뿐, 어떻게 힘으로 찍어눌러 볼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 괜히 적만 하나 더 늘리게 되면 피곤해질 뿐이니.
자신들은 아군이 필요한 거지 피해를 늘리고 싶은 게 아니다.
하지만 씁쓸함을 지우기도 힘들었다.
한때는 이 콜로니 전체를 먹어 치우려던 자신들이 이제는 고작 N 분의 1 취급이라니.
심지어 이런 신생 집단들에게도 말이다.
그런 사내에게 이어진 아너스빌의 한마디.
"본격적인 동맹까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나 거래는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손님으로 대접할 테니 한동안 머무르며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그런 아너스빌의 말에 이채를 띈 사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지하 21층.
"그런 놈들을 안에 손님으로 두겠다고? 괜찮겠어?"
키이이잉...
허공에 물감으로 그려내듯 만들어지고 있는 27대의 커다란 이족 보행 중장갑병기, 파르스를 바라보던 군파츠의 말에 아너스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두면 더 위험해. 차라리 잘 달래서 손님 대접하는 게 낫지."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수준이 상당하다는걸.
소수지만 충돌하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단순히 동맹을 제안하자고 온 것 치고는 지나치게 강했다.
아마 이곳이 위험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기선제압을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약했으면 그냥 그대로 먼저 먹어 치워 버리고 끝낼 생각이었겠지.'
아너스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마 5층의 범죄자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워놓지 않았더라면, 즉 이전의 수준이었다면 아마 오늘 즉시 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크다.
녀석들 입장에서는 그냥 다른 세력 녀석들에게 홀랑 넘겨주느니 모조리 잡아가거나 물자만 털어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으니.
일단 녀석들의 반응을 보니 1차는 성공.
11개 세력의 균형 사이에서 간을 보며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어떤 식으로 할지.
"세력을 키워서 그 녀석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단기간 내에?"
아너스빌의 말에 옆에서 말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던 강태석이 파르스들을 내려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무리지. 아마 5일 내로 다른 곳에서도 도착하고 감시 시작할 거고... 선 넘으면 바로 밟으려고 들겠지. 서로 힘을 합쳐서라도."
"..."
강태석의 말에 아너스빌과 군파츠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결말이긴 했기에.
중간에서 간 보며 줄을 타는 것도 자신들이 약할 때나 봐주는 거지.
선을 넘어 군비를 증강하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갖추기 시작한다면?
서로 견제하던 저들이 손을 잡아 아예 제대로 자신들을 밟아놓을 것이다.
그리고 파일런같은 귀물은 그대로 빼앗아갈 것이고.
"처음부터 희망이 없는 싸움이었지. 전력 차이가 너무 나는 데다 상대가 우리를 알아버렸으니까."
"너 너무 덤덤하게 말한다?"
군파츠가 어이없다는 듯 강태석을 바라보았다.
이제 좀 있으면 얻어터지게 생겼다는데 뭘 그리 남의 일처럼 말한단 말인가?
그런 군파츠의 말에 강태석이 마른오징어를 마저 질겅질겅 씹었다.
"우리끼리라면 그렇다 이 말이야."
"?"
이에 군파츠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강태석은 그에 더이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의 창을 바라보면서.
<현재 멸망 진행... 79.9%>
80%가 다 되어 간다.
그리고 80%가 넘어가면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들뿐 아니라, 이 세계 모두가 온몸으로 버텨내야 할 거대한 홍역 같은 변화들이.
그리 달가운 변화는 아니겠지만...
'다른 녀석들에겐 더하겠지.'
쿠르르릉...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을 바깥을 떠올리며 강태석이 눈앞,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는 군대들을 바라보았다.
**
수림 외곽, 절벽 아래 동굴.
퍼어억!
"... 이상한데."
"뭐... 가 말입니까?"
거침없이 시체들을 걷어차며 안으로 향하는 청년을 보며 옆, 털보 사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묻다 황급히 이어붙였다.
"절대 속인 거 없습니다! 진짜 합류를 원하면 이쪽으로 오라고 했다고요!"
"알아 이 아저씨야. 내가 말한 이상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피피피핑...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다섯 개의 검기 파편을 만들어 사방에 쫘악 뿌린 청년이 투덜대며 말했다.
이어 터져 나오는, 종유석 동굴 안에서의 절삭음들.
콰지지지지직!
콰지지직!
쿠드드드득!
짧은 순간 푸른 빛에 의해 밝아진 동굴 안으로 보인 광경.
이에 털보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둠 속, 수백 구의 시체들이 우글거리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방금전의 일격으로 잘려 나간 녀석들만 해도 수십 구였지만 동굴 너머를 망자처럼 배회하고 있는 시체들의 숫자는 그 이상.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본 청년의 미간이 한층 더 좁아졌다.
'... 이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다. 그 꼬맹이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여기 있을 리가 없어.'
청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체를 열 구, 스무 구를 부리는 정도는 인정해줄 수 있다.
아주 과하게 평가해 일백 구 정도 부리는 정도라면 이 역시 쓸만하다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수백, 수천 구가 넘는 시체에 생명을 부여해 움직이고 있다고?
시체가 얼마나 약하고 강하고 간에 이는 상리를 넘어선 수준이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진즉 이따위 콜로니는 벗어났어야지 이곳에서 장난질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거기에 아까전부터 뒷목을 간질간질거리는 불쾌한 이 기분.
"작전은 취소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 합류한다."
청년이 자신을 따라오던 서른의 남녀에게 짧게 말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수색해볼 수도 있었지만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았다.
거기에 가장 불쾌한 건... 아까전부터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생명의 기운.
분명 털보 사내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소녀만큼은 살아있어야 하건만, 이 동굴에서는 기묘하리만치 산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안을 가득 메운 건 오로지 죽음, 죽음, 죽음뿐.
철컥.
말을 마치고 칼을 움켜쥔 청년이 다시 자신들이 들어온 입구 쪽을 향하려던 그때.
끼그그그극...
끼극...
이제까지 멍하니 배회하기만 할 뿐이던 시체들의 고개가 일순간에 그들을 향해 돌아갔다.
이어 시퍼렇게 일렁이는 불길.
그리고 입에서 합창하듯 나오는 한마디.
<가... 려... 고?>
잠시 후.
저벅.
저벅.
시체들의 물결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목 없는 수십 구의 존재들이 걸어 나온다.
한눈에 봐도 주변 시쳇더미 들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존재감을 뿜어내는 망령의 기사들이.
듀라한.
어느 옛 고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저주받은 존재들.
"정말 일진 사납네."
이를 보며 한껏 얼굴이 일그러진 청년이 뒤쪽의 이들을 향해 빠득 이를 갈며 수신호를 보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곳을 탈출해 본대에 합류한 것.
이와 동시에.
파파파파팡!
콰아아아아아아앙!
청년과 서른의 남녀들이 흩뿌린 검기들과 달려드는 목 없는 시체들의 시커먼 마력이 충돌하며 동굴 안을 굉음으로 틀어 메우기 시작했다.
**
쿠르르릉...
쿠릉...
"뭔 소리 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이제 이 근방에는 충돌할 일도 없잖아."
새로이 합류해 자발적으로 북쪽 방향을 지키는 일을 맡은 이들이 임시로 만든 망루 위에서 수림을 바라보곤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쪽에 합류할까 저쪽에 합류할까 고민했는데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도 제법 혼란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등따습고 배부르니 당장 하루 보낼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는가?
반면 그 검은 꼬맹이를 따라간 녀석들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제법 몸이 축나고 있을 것이다.
"뭐 동굴 속에서 누워 자는 거 아냐? 이끼나 짐승 같은 거 뜯어먹으면서?"
"크흐.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여기 합류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렇게 보냈잖아."
"하여간 여기가 문 열어줘서 다행이야. 싸우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지."
하지만 평온도 잠시.
망루에 서서 수다를 떨던 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림 저 멀리서 피투성이가 된 몇몇이 절뚝거리며 자신들의 진지를 향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
한눈에 봐도 보통 부상이 아니다.
"엇...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일단 한 명이 지켜보고 한 명은 보고! 기다려. 내가 다녀올 테니까."
만신창이가 된 두 남녀, 그리고 한 팔 한 다리가 날아간 채 이들을 부축해 다가오고 있는 청년을 보며 호들갑을 떨던 둘 중 한 사내가 망루에서 뛰어내려 황급히 본진 쪽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