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불멸의 가문, 군바리안.
모든 악과 어둠들의 주인.
**
고개를 돌린 강태석의 눈에 뒤쪽에서 걸어오는 아너스빌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십 명의 남녀들도.
어찌 보면 적은 숫자다.
하지만 그들을 본 순간 강태석은 하나하나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본진으로 모여들었던 수천이 넘는 범죄자들, 최소 수십에서 수백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집단들.
그러한 각 집단들을 이끌고 있던 우두머리들이었다.
연고도 없는 이들이 피라미드 속에 갇혀있다 풀려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한데 그런 이들의 장을, 그것도 짧은 시간 내에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강함뿐이다.
실제로 아너스빌의 뒤에 모인 이들 한 명 한 명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지금 빈껍데기 신세였다.
'상황이 썩 좋지 않은데.'
완전 텅 비어버린, 에르트를 상대하느라 한계까지 쥐어짜 말라붙은 어둠샘의 바닥을 관조하던 강태석이 다가오는 아너스빌을 보며 물었다.
"이런 곳까지 나온 거 보니 비밀스런 용건이 있나 본데. 데이트 신청하기에는 너무 관람객을 많이 데리고 온 거 아냐?"
"..."
덤덤히 묻는 강태석을 복잡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너스빌은 이내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간단히 말하지요. 이제 여기서 사라져 줘야겠어요."
"떠나 달라고?"
강태석이 상대의 뜻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그냥 떠나 달라고 말할 목적이면 저렇게 우르르 데리고 왔을 리가 없으니.
그런 강태석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아너스빌의 뒤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눈치 없는 놈이로고. 우리 새 주인님께서 온전한 머리가 되시기에는 네 녀석이 거슬린다 이거다."
사내를 비롯한 아너스빌 뒤에 선 수많은 남녀들이 강태석을 비웃듯 바라보았다.
그들은 규율의 밖에서 살아오던 무법자이자 범죄자.
하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던 그들 사이에도 룰이 있고 서열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의 정점.
군바리안.
온 대륙의 악과 어둠을 휘어잡으며 수많은 구국들에 영향력을 흩뿌렸던 강대한 혈통.
그들은 연방이 발기하기 전부터 오랜 세월 존재해왔으며.
연방통합 시절에도 귀족을 배출하는 데 성공하며 훌륭히 귀족가로 발돋움, 연방이 건국된 후에도 그 권세와 명성을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예전 시절, 에테르장에 갇히기 전 군바리안의 자락 아래 활동하던 이들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어린 새 주인님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걸.
주인의 뜻이 자신들의 뜻, 자신들의 뜻이 곧 주인의 뜻.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의 시선을 보던 강태석이 콧김을 흥 내뿜었다.
생각보다 아너스빌, 금발의 그녀는 야심이 많았나 보다.
하긴 원래 권력은 가족끼리도 나누는 게 아니라거늘.
거기에 자신을 치우려면 지금은 그야말로 최고의 타이밍.
위험한 곳으로 홀로 갔기에 죽어 사라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고, 싸움 끝에 지쳐있을 것이 뻔하기에 죽이기도 쉽다.
슥삭 자신의 직속, 새로 생긴 충성스런 녀석들만 끌고 와 이곳을 조용히 정리한 후 돌아가 이제 난리가 끝나고 슬픔에 잠길 이들을 조용히 발아래로 흡수하면 그만이다.
이 난리 통에 순식간에 뚝딱 세계를 헤쳐나갈, 자신만을 위한 세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는 거 아니다 진짜. 죽을뻔한 거 건져내서 도시에서 같이 끌고 나왔더니."
"나를 아껴서가 아니라 그저 네 과정이었을 뿐이지. 고맙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말과 동시에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하는 아너스빌, 그 새로운 부하들을 보며 강태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영 취미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이렇게 된다.
피로서 군림하거나 아예 얽히지 말았어야 했거늘.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스르륵.
마력을 그러모아 칠채영창의 한 줌 가루를 아주 날카로운 세도로 벼려 세운 강태석이 이를 빙글 한 바퀴 돌린 뒤 주변을 바라보았다.
엉성한 듯 보이긴 해도 각자의 역량을 펼쳐 옭아맨, 빈틈이 없는 포위망이었다.
서로 협동이 되고 있진 않지만 이를 개인들의 역량으로 메꿨다.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 보이는 상황.
레벨이 오르고 비기너를 넘어 익스퍼트 하급의 경지에 올랐지만, 영 마력이 부족한 게 문제다.
하다못해 아까 전의 기체를 꺼내 탈 수만 있으면 좀 더 쉬우련만.
하지만 언제 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
키이이잉...
칠채영창, 아니 칠채영도의 칼날에 맺힌 선명한 검기가 점점 더 희미해지다가 되려 주변과 동화되 듯 칼날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검기가 해제된 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흡정마공-공.
내부를 비우고 비워 진공의 상태로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낸 공간으로 상대의 마력을 빨아 먹어 치우고 또 이를 다시 비워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마력이 없어도 마력을 휘둘러 싸울 수 있는, 어차피 마력이 고갈된 자신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말이 필요 없지. 덤벼."
동시에.
터어어어어어엉!
쫘아아아아아아아악!
주변 수십, 그중 가장 앞장서 삼면을 점하고 두 남자와 한 명의 여인이 각자의 병기를 휘두르며 강태석의 상중하를 빈틈없이 휘갈겨왔다.
**
본진.
투타타타타타...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북쪽. 서서히 정리되어가고 있습니다.>
<남동쪽. 클리어!>
사정없이 진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전장을 뛰어다니며 죽은 자들을 정리해가던 파르스들의 음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내달릴 때마다 발치의 구울들이 종잇장처럼 으깨지고 인간으로는 상대하기 힘들어 보이는 거구의 시마수들마저 육중한 몸체로 막아선다.
그 과정에서 파손을 피할 수 없었기에 이제 남은 숫자는 스물 내외였지만, 그 격전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교환비다.
콰아아아아앙!
희미해 졌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양손의 칼날을 휘두르며 정신없이 엑소슈트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파르스들을 군파츠가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단기간에 훈련시켰다고는 믿을 수 없이 잘 싸우고 있는 녀석들.
소수만으로도 이 정도다.
앞으로 자원이 더 확보되고 파르스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녀석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위용은 점점 더 강해져 갈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 저 아래 파일런이라는 녀석이 제대로 작동해준다면 앞으로 더 강력한 병기들이 소환 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시작.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절로 이 모든 것을 일궈낸 녀석에게까지 생각이 흘렀다.
<아직 안돌아왔어? 아너스빌이 갔다며!>
콰드드드드득!
연구시설 아래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오고 있는, 전염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변해버린 이들의 좀비와 구울을 처리하던 군파츠가 주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강렬한 폭발이 피어났고 이어 죽음의 군대들의 영향력이 현저히 약해졌다.
중간 과정이 어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일단 카트란 녀석이 다시 한번 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었을 리가 없다.
파아아아앙!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군파츠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수림을 헤치고 들이닥치는 시체들을 정리하던 아린이 대답했다.
"각 세력을 어느 정도 차출해서 간 거 같긴 한데, 걱정되긴 하네. 군파츠 네가 가볼래? 파르스 세대 정도는 빼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콰아아아앙...
콰앙!
아린의 말에 군파츠가 사방에서 날뛰는 파르스들을 바라보았다.
그 말대로.
이제 주변 전장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전염병들의 여파로 지하연구시설 내부에서 좀비가 발생한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린과 카티등이 내려가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더이상 기동이 불가능한 파르스와 전장 및 전선 정리를 위한 파르스를 제외하고서라도 두 세대 정도는 차출 가능할 거 같은 상황.
콰드드드득!
이에 숨을 후욱 내쉰 군파츠가 지하에서 올라오던 시체 두 구를 짓밟아 으깨버리고 아린의 말에 크게 외쳐 대답해주려던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이런 제기랄... 비상! 비상입니다! 고랑을 타고 커다란 지네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연구시설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인지 저주파 장치 출력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달려듭니다!>
전장 저 멀리에서 갑자기 다급하게 들려오는 단거리 통신에 바이저 안, 군파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고랑을 통해 몰려드는 놈들이라면 그놈들일 것이다.
얼마 전 몬트라의 난동 때문에 카트란이 휩쓸려 가버렸던 절벽 방향에 살고 있던 녀석들.
연구시설 내부가 좀비와 구울들의 난동에 의해 일부 망가지자 그 틈을 통해 몰려들고 있는 것.
당장 내려가 안쪽을 정리하면 저주파 발생 장치는 다시 재가동시킬 수 있을 테니 문제없지만,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힘으로 막아 서야 한다.
<쉴 틈이 없군... 연구시설 아래는 내가 내려가 볼 테니까 파르스들은 다 달려들어서 그놈들 막아!>
콰아아아앙!
거칠게 지하시설로 향하는 문을 박차 연 군파츠가 아래로 뛰어들어 시체들을 으깨 내달리며 소리쳤다.
속으로 이를 악물며.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곳의 여유가 없으니 카트란 쪽은 아너스빌에게 맡기는 수밖에.
'잘하겠지? 능력이 모자란 녀석도 아니고.'
이윽고.
콰드드드득!
캬아아아아아아악!
잠잠해져 가려던 연구시설이 고랑을 타고 달려든 지네들과 파르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싸우는 이들의 격전음으로 재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기가 막히는군.'
쩌어어어억!
자신의 성명절기, 적뢰검을 가르고 질주하는 희미한 세도와 그 주인을 싸우던 사내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사내의 몸에는 한 줌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러 내보낸 것 이전에 말라붙은 게 분명해 보이는 마력샘, 여러 번의 격전으로 끝까지 고갈된 기맥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강렬함은커녕 마치 무로 느껴질 정도로 희미한 세도 끝의 아지랑이.
이 정도면 오히려 일반인 이하라고 할 수 있다.
한 자루의 칼날과 주인이 세트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가냘프고 연약한 상태.
한데 그런 상태에서 자신들과 싸우고 있는 것도 모자라 되려 몰아붙이고 있다.
쩌어어어어억!
'이런. 또.'
다시 칼을 휘둘러 날아드는 세도와 맞댄 사내의 인상이 슬쩍 일그러졌다.
상대의 세도가 자신의 검기를 스친 순간 자신의 마력이 사정없이 상대를 향해 쭈욱 빨려 들어간다.
마치 가득 찬 저수지의 물이 무너진 둑, 건너편의 말라붙은 대지를 향해 해일처럼 몰려나가듯.
그렇게 쭈욱 빨려 나간 기운은 그대로 주르륵 흘러가 칼날, 손목, 팔을 타고 상대의 세맥으로 촤르륵 흘러 퍼진다.
흡사 사막에 뿌리내린 채 말라붙어가던 식물이 한 줌의 물을 빨아들여 단번에 줄기부터 잎 끝까지 생명을 보충하듯.
촤아아악...!
그렇게 기운을 빨아들여 전신으로 보낸 상대의 움직임이 서서히 빨라진다!
흐늘거리던 육체에 힘이 붙고 유려하던 동작에 힘이 실린다.
이어 작렬하는 일격.
서거거거거걱!
"...!"
검기도 모자라 자신의 무기까지 반쯤 썰어내며 질주하는 칼날을 가까스로 피해낸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빠르게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마력을 빨아들이는 기묘한 검기.
그렇게 빨아들인 마력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기묘한 육체.
이 두 가지가 합쳐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대를 지치지 않는 살인 병기로 만들고 있었다.
방금 전도 자신 혼자만 있었다면 커다란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를 피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녀석이 상대하고 있는 게 자신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카아아아아앙!
카아앙!
서거거거거걱!
차륜을 유지하며 달려드는 십여 명을 중심으로 희미한 아지랑이를 머금은 세도가 유려하게 춤춘다.
수십 줄기의 강맹한 검기들을 홀로 상대하는 희미한 칼날.
이를 보고 있던 사내는 왜 그들의 새로운 소주가 상대를 처리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충만할 때는 죽음의 사도를 죽일 정도로 사납고, 비어있을 때조차 저리 강하다.
심지어 귀족가의 혈통인 소주조차 버거워할,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까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대는 틈이 날 때 처리해 둬야 하는 법이다.
이제는 소주보다 자신들이 더 급해졌다.
놓치게 되면 훗날 반드시 원한을 품고 찾아들 테니까.
그리고 그때는 오늘처럼 유리한 상황이 결코 아닐 것이다.
"... 소주. 결단을 내리시오."
격전의 밖으로 한발 물러서 나온 사내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던 아너스빌의 눈가가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