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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어어어억!
검기와 검광이 난무하는 사이, 가장 유려하게 빛나는 아지랑이의 검로를 바라보던 사내가 재차 아너스빌을 향해 말했다.
"소주. 이건 당신에게 있어서 기회이자 시험이오. 제대로 해낸다면 단번에 더한 충성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불신만 쌓일 것이오."
사내가 가라앉은 눈으로 아너스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예전, 어둠 속에서도 태양처럼 빛나던 군바리안의 위세를 바라보며 살아오고 활동해왔다.
그 찬연함과 공포, 누구도 그 위대한 가문을 거스르지 못했다.
종종 제 잘났다는 듯 난리를 피우며 거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주춧돌마저 모두 타오른 채 사라져 있기 일수였다.
그렇기에 소주 아래 모여든 쉰다섯 명의 자신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일어나보니 인류는 멸망해가고 있다.
그 강대하던 연방도 쪼개져 힘을 못 쓰고 있고 군바리안을 비롯한 뭇 귀족가들조차 자신들의 찬연한 영향력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본신의 능력.
그렇기에 보여줘야 한다.
그녀가 단순히 군바리안을 배경으로 두고 있을 뿐이라는 걸 넘어, 핏줄 속에 오롯이 그 흉폭함과 공포스런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 누가 자신보다 재능 없고 나약한 이를 주인으로 모시고 싶어 하겠는가?
하물며 자신들은 <그> 군바리안의 자락들.
소주가 될 이는 그에 걸맞게 강대하고 지독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인연 정도는 가볍게 지르밟고 짓이겨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수레가 사마귀를 짓밟고 지나듯, 앞으로의 거대한 행보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말에.
"..."
스르릉.
침묵을 지키던 아너스빌은 칼을 뽑아 들고 그 주변에 눈부신 금빛의 휘광을 감은 채 저 너머, 검기와 아지랑이의 격전지로 향했다.
**
손목 너머, 손으로 쥔 칼끝으로 흘러드는 마력뿐 아니라, 생각과 잡념마저 흘려보낸다.
후우우웅!
쩌어어어어억!
날아드는 세 갈래의 각기 다른 검기를 휘둘러 빨아들이고 쪼개버린 강태석이 무아지경에 가깝게 검로를 그려내며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들을 토막 냈다.
강태석의 검로에 의해 지워진 검격 사이로 상대의 마력이 격랑을 일으키며 흘러든다.
그렇게 흘러든 마력이 세맥을 타고 휘몰아쳐 텅 비어버린 강태석의 단전과 심장을 스쳤다.
이후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그곳에 도달한 마력이 게걸스레 기운을 빨아들이려는 장소를 벗어나 다시 가속을 붙이며 손, 발, 전신 근육과 신경으로 뻗어 나갔다.
이어 재차 텅 비어버린 단전.
그와 반대로 기운이 충만해져 질주하는 육체.
쩌저저저적!
달려들던 상대의 목을 거진 베어낼 듯 질주하던 검격이 무기만 베어내고 안타깝게 상대의 목젖만 스친다.
터져 나오는 핏방울.
얼핏 보면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칼을 휘두른 강태석도, 피한 상대도, 주변을 둘러싼 모두도 알고 있었다.
그저 시간문제라는 걸.
강태석을 둘러싼 이들에겐 여유가 있다.
반면 끊임없이 그들을 휘몰아치고 있는 듯해 보이는 강태석에겐 그닥 여유가 없다.
육체에 서서히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기에.
치지지지직...
칼끝으로 빨려 들어오는 각기 다른 수십 종류의 기운들.
하나하나가 수년, 혹은 수십 년을 고되게 단련한 이들의 단전 속에 똬리 틀며 새로운 생명을 얻은 마력들.
주인 된 이들이 모두 다르고 개성 넘치기에 기운들 또한 제각기 다르다.
그렇게 다양하고 흉맹한 기운들이 칼끝을 타고 강태석의 세맥을 통해 빨려들고 뿜어지며 전신을 질주할 때마다 그 통로가 되는 강태석의 마력 회로들은 마치 불길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상처 입고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본신의 기운만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
안 그래도 바닥까지 쥐어짜 말라붙고 쪼그라들어 있는 상태였는데 그 위로 각기 다른 수십 종류의 기운들이, 심지어 흘러들어 역행까지 해가며 끊임없이 질주한다.
전기 회로에 과부하가 걸리듯 마력 회로도 차츰 타들어 가는 상황.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
흡정기공은 마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마력을 무제한 뿜어 쓸 수 있게 해주는 마법 같은 기술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상대의 기운을 끌어 쓰는 대가는 자신의 육체.
그나마 파르스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온전히 보존되었던 본신 육체와 체력이 빠른 속도로 마모되어간다.
상대하는 이들도 백전노장.
세상에 공짜는 없고 그들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굳이 급할 것 없이 주변을 둘러싼 채 천천히 압박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걱!
"커헉...!"
"!!"
갑자기 빨라진 칼.
이에 피하지 못하고 가슴팍을 길게 베이며 피를 토한 한 여인의 신음에 주변, 둘러싸던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도 여력이 있다고?
그들이 놀라는 틈을 타 강태석은 칼끝, 피와 함께 콰르르륵 몰려드는 마력을 더욱 거칠게 전신으로 뿜어내며 휘청이는 여인을 향해 한줄기 칼의 선을 그렸다.
그들이 몰랐던 것.
자신의 마력 회로는 한 단계 높은 스탯, 어둠샘의 마력을 위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어둠샘의 마력은 다른 D등급 스탯에 비해 한층 더 거대하고 도도하며 흉폭하다.
그렇기에 이를 받아들여야 했던 마력 회로 역시 대운하의 그것마냥 단단하고 두터우며 굳건하다.
흡정기공을 통해 각기 다른 세맥으로 흘러들던 수십 종류의 기운이 비록 거칠고 흉맹하여 자신의 마력 회로를 갉아먹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력 회로는 여전히 어느 정도 버틸 여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그 균형을 무너트린다.
후우우우우웅!
쩌저저적...!
다급하게 막아서는 두 자루의 칼날을 베어내고 질주하는 검격 너머, 당황을 넘어서 끔찍하게 일그러지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여인을 향해 강태석은 무심히 힘을 주어 자신의 손끝, 아지랑이를 휘감은 칠채영도를 내질렀다.
목표는 여인의 심장.
우지지직...
천천히 흐르는 세상 속.
느리게 움직이는 칼날이 상대의 피부를 찢겨 갈비뼈를 차츰차츰 베어내며 파고드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피와 심장은 마력의 보고.
동시에 흡정기공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쿠르릉!
심장과 가장 가까운 부근의 피 맛을 본 순간, 흡정기공이 요동치며 상대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게 느껴진다.
마저 칼날을 박아 넣어 온전히 베어낸다면 이내 검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순하고 순도 높은 마력이 폭풍처럼 몸 안으로 흘러들 터.
이를 다시 뿜어내며 주변의 적들을 베어낸다!
콰드드득...
한껏 몸 전체의 세맥을 준비시킨 강태석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 마저 칼날에 힘을 주어 심장을 온전히 갈라내려던 순간.
후우우욱...
터어어어어어어엉!
갑작스레 끼어들어 자신의 아지랑이 칼날을 튕겨내는 금빛의 칼에 강태석이 작게 콧김을 내뿜었다.
**
우드드득..
찬연하게 빛나는 금빛의 휘광.
이를 휘감은 칼날이 여인과 강태석 사이로 끼어들어 가운데 놓여있던 칠채영도를 밀어붙인다.
투명하고 영롱한 유리 칼날에 아지랑이 같은 검기를 휘감은 강태석의 칼.
반면 자체로 고풍스러운 백금빛의 칼에 우아한 금광을 두른 난입의 칼.
강태석의 칼날에 휘감긴 흡정기공이 금빛의 칼날마저 베어내며 기운을 빨아들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마치 금광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때로는 피해내고 때로는 몰아붙이며 흡정기공을 방해했기 때문.
이윽고.
터어어엉!
온전히 튕겨 나가 버린 자신의 칼날을 보던 강태석이 눈을 들어 자신과 여인 사이에 끼어든, 새로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치정 싸움, 삼자대면 이런 거라면 그나마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상황은 아니다.
여전히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 속, 어느새 완전히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금발의 여인.
아너스빌.
흉과도 같던 커다란 상처는 더이상 흉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그녀의 삶이 쉽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듯.
되려 얼핏 보면 소녀와도 같았을 그녀의 얼굴에 강인함과 철혈, 주인으로서의 면모를 부여한다.
터어어어어엉!
휘리릭!
거대한 역도에 튕겨 나가려고 한 칠채영도를 재차 움켜쥐고 끌어당긴 강태석이 자세를 다잡으며 오롯이 선 상대,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몰아붙이던 수십 명의 남녀들이 질서 정연히 주변을 둘러싼 채 원을 그리며 서 있다.
커다란 검투장을 만들듯.
그리고 그 안에 선건 강태석 본인과 아너스빌, 둘뿐.
설령 아너스빌을 이긴다 해도 주변 수하들이 남는다.
하지만 그런 강태석의 생각을 정리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마주 보고 선 아너스빌이 말했다.
"나만 이기면 된다. 그러면 살려 보내주지. 돌아갈 순 없겠지만."
그게 상대, 카트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자신의 목적도 있고 수하들도 챙겨야 하니 설령 자신이 진다고 해도 생존자집단에 카트란을 돌려 보내줄 순 없다.
그곳은 오롯이 자신의 것.
일단 자신이 결단을 내린 순간 카트란이 돌아온다는 선택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려 보내줄 순 있다.
비록 패배로 인해 자신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고 싹을 뽑고 싶어 하는 수하들을 짓눌러야 하겠지만, 자신이 진다면 그 정도는 스스로 기꺼이 감수할 의향이 있다.
하지만 이긴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패자를 동정한다는 건 군바리안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여야 이들 주인으로서의 면이 선다.
그리고 자신은... 안타깝지만 져줄 생각은 없다.
이겼을 때의 포상이 더욱 달콤할 테니.
잠시 후.
후우우우우웅!
쩌어어어어어어엉!
대기를 질주하며 날아든 금빛의 칼날이 주변 수십 명 한가운데, 마주 선 강태석의 칠채영도와 강렬하게 충돌했다.
**
쩌어어어엉!
쩌어엉!
"..."
'망할 혈통빨 같으니. 진짜.'
사방에서 태양의 길과도 같은 선을 그려내며 자신을 향해 내달리는 아너스빌의 검로에 마주 칼을 대어가던 강태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세계는 정말 혈통빨이 심하다.
어느 정도냐면... 사실상 레벨업을 통해 일반인은 따라올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을 자신을 눈앞의 소녀가 따라잡다 못해 앞질러 자라고 있을 정도로.
물론 이는 자신의 업무 태만이기도 하다.
사실상 레벨업에 집중했으면 지금보다 더 빨리 자랐을 테니.
하지만 이 게임이 레벨업해서 혼자만 떵떵거린다고 잘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할 일은 태산이고 상황이 개판인데 믿을 건 홀몸이니 어쩌겠는가?
덕분에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
강태석의 의지에 따라 몸 안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보내는 흡정기공이 머리의 사념마저 칼끝에 담아 날아드는 황금의 칼을 향해 내질렀다.
이어지는 충돌.
쩌어어엉!
강태석이 자신의 칼날 주변에 서린 아지랑이, 이를 피해가며 맹렬하게 칠채영도와 자신을 집어삼키려 드는 황금의 기운을 바라보았다.
저걸 보니 어느 정도 생각났기에.
군바리안 정도면 그제서야 기억할 만하다.
특징은 극에 달한 기교.
콰르르르르릉!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황금빛 검기들을 보며 강태석이 혀를 찼다.
**
산등성이, 위.
콰르르릉...
"..."
절벽 위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이들이 저 아래서 퍼져 나오는 금광과 아지랑이의 충돌을 보며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