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협곡.
콰르르르르릉...!
캬아아아악!
우아아아아악!
"이놈들아. 계속 열심히 뛰어.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고."
중턱에 앉아있던 청년 하나가 아래, 사방팔방에서 발에 땀나게 뛰며 지네들을 유인하고 있는 수하 녀석들을 보며 하품을 했다.
영 위험한 일이기에 몇 놈들 죽기야 하겠지만 별 상관없는 일이다.
아랫것들 몇 녀석 죽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보다는 이번 소주께서 시키신 일을 성공리에 끝마치는 게 더욱 중요.
'신호가 올 때까지 본진을 붙잡아 두라고 하셨지.'
쿠르르릉...
캬아아아아아악!
수하 녀석들에게 이끌려 괴성을 내지르며 저 멀리, 본진 쪽으로 향하는 거대한 지네 괴물들을 보며 청년이 턱을 긁었다.
한 놈 한 놈이 아직 에테르장에서 제대로 회복 못 한 자신이 상대하기도 벅찬 괴물 같은 녀석들이지만 어떻게든 잘 막아낼 것이다.
그 정도로 파르스라는 장난감은 성능이 좋아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소주의 이번 결정을 자신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세상이 변했다.
맨몸과 애병 한 자루만 있으면 대지를 질주할 수 있던 시절이 가고 화기와 병기, 군대들이 또 다른 힘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좋은 보검 만들 수 있다는 정도의 가치만 있던 광산과 쓸데없는 민간인 녀석들만 자라나던 대지가 고스란히 힘의 결정으로 변환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물론 자신이 활동하던 시절에도 어느 정도 그 변화가 진행되고 있기는 했지만 연방이 휩쓸고 우뚝 섰다 망해버리기까지 한 이 시대에는, 이 격차가 한층 더 큰 것으로 보였다.
즉 어떻게든 이를 해낼 본진을 통째로, 아무 별 탈 없이 집어삼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낼 수 있는 것은 한 명뿐이다.
소주.
귀족가의 혈통과 능력을 쥐고.
자신들의 위에 설 오롯한 자격이 있으며.
동시에 기존 세력들의 지지 또한 확보할 수 있는.
다만 이 지지를 아무 문제 없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존, 그 카트란이라는 녀석을 이번 사태가 끝나기 전 <아무 문제 없이> 몰아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의 일이 중요하다.
자신이 맡은 바 임무는 혹여 일이 끝나기 전까지 본진에서 지원이 출발하지 못하도록 녀석들의 발을 묶어두는 것.
"남은 녀석들이 보자... 백서른둘. 충분하겠네."
지네는 이미 넘치고 미끼도 충분하니 시간을 버는 데는 문제 없을 듯하다.
“우아아아악!”
콰르르릉!
질주하는 지네들의 앞에서 버둥거리며 달음박질치는 자신의 수하들을 보던 청년이 재차 하품을 하며 지금쯤 일이 벌어지고 있을 절벽 방향을 바라보았다.
**
후우우웅...
아너스빌의 칼을 휘감은 열세 줄기의 황금빛 검기가 줄기줄기 쪼갈라지며 강태석의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몇 줄기는 칼을 밀쳐내거나 휘몰아치고.
몇 줄기는 흡정기공을 피해 이리저리 요동치고.
몇 줄기는 강태석의 급소 이곳저곳을 노렸다.
평범한 검기 사용자는 어림도 내지 못할 신기, 심지어 그 검기조차 사실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마치 면을 쪼개 만든 파스타 같은 넓적 두툼한 면.
지금 아너스빌은 검벽을 열세 갈래로 쪼개 강태석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쩌르르르르릉!
내달리던 황금빛의 면포 채찍 하나를 쪼가른 강태석이 그 안에서 넘쳐흘러 들어오는 마력을 받아들여 구석구석 흘려보내며 남은 열두 줄기 검벽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검기 사용자는 물론, 강기 사용자도 보여주기 힘든 신기.
이게 바로 군바리안이 자랑하는 절정의 기예.
<황금의 혼>
군바리안의 특장점은 기예 관련 스탯이다.
강태석이 현재 C등급의 어둠샘을 가지고 다른 검기 사용자들보다 커다란 이점을 누리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아너스빌은 C등급의 기술, 혹은 기예 관련 스탯을 보유하고 이를 자유자재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군바리안의 혈통들이 가지는 특징이며, 그들이 익히는 혈족 권능 특유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 덩어리의 철도 누가 빚으면 몽둥이가, 누가 빚으면 명검으로 변한다.
심지어 거기에 조금의 무언가를 추가한다면, 한 자루 총으로 변하기도 한다.
같은 칼일지라도 하수가 잡은 칼과 고수가 잡은 칼이 같지 않은 것처럼.
똑같은 육체, 똑같은 근력에 똑같은 마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기예의 수준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로 갈라지는 것.
그리고 지금 그게 강태석이 피곤한 이유이기도 했다.
쩌저저정!
쩌정!
아너스빌은 오로지 한줄기 황금 채찍만을 강태석의 칼과 맞대며 다른 열두 갈래는 철저히 충돌을 피하고 강태석의 전신을 노리고 있었다.
절대 먹이는 주지 않겠다는 듯.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만을 담은 채, 한 자루만으로 칠채영도를 상대하고 나머지로는 끊임없이 빈틈을 노렸다.
한 자루라도 마력이 고갈된 강태석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녀석을 베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베어낸 채찍으로부터 얻어낸 마력은 고작 한 가닥 분이기에 나머지 열두 개를 피해낼 움직임을 만들기에 심히 부족하다.
거기에 아너스빌의, 체스를 두는 듯한 치밀한 몰아붙임에 강태석은 지금 차츰차츰 구석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콰직!
간신히 자신의 발치를 향해 날아들던 채찍 한 가닥을 피해낸 강태석이 이를 베어내려 했지만,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채찍에 포기하고 혀를 차며 칼 부리를 돌렸다.
이어지는 충돌.
콰아아아아앙!
베어내는 순간 한 줌 마력도 넘기기 아깝다는 듯 스스로 폭발해버리며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오는 황금빛 파편들의 세례를 피해 한 발짝 물러선 강태석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찌 보면 절체절명의 상황.
아너스빌이 두어가는 체스는 그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앞으로 열 수.
다섯 수 정도면 칠채영도가 박살 나고 일곱 수에 양팔이 잘려 나가며 아홉 수나 열 수쯤 목이 잘려 나간다.
황금빛 기운을 몰아쳐 오는 아너스빌도, 주변에 구경하듯 선 새로운 군바리안의 수족들도 모두 이를 느끼고 있었다.
그저 새로이 태어날 주인에 대한 경복을 준비하며 무덤덤하게 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 가장 무덤덤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너스빌을 마주 본 강태석이 손의 칠채영도를 바르게 잡았다.
세상사 자신들 마음대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후우웅!
콰직!
열 수중 한 수.
그 첫발을 떼는 황금빛 채찍을 베어낸 순간 아까 전과 동일한 일들이 벌어졌다.
터져나가는 검기, 흩뿌려지는 파편.
찰나의 순간 이를 베어낸 칠채영도의 흡정기공이 주르륵 마력을 빨아들이기는 했지만 앞으로 들이닥칠 공격들을 모두 막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볼륨이다.
물론 그마저도 지금 상황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했다.
하지만 강태석은 심장을 스쳐 다시 전신으로 뻗어 나가려는, 그 한줄기 마력을 손으로도, 발로도, 칼로도 흘려내지 않았다.
한 줌 마력이 향한 곳은 머리, 정확히 말하면 뇌.
파지직!
뇌전의 권능을 머금은 마력이 정확히 뇌를 직격했다.
공격에 쓰였다면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을, 스파크 수준의 턱없이 부족한 양.
하지만 강태석이 필요한 권능을 불러내기에는 충분했다.
강제로 만들어진 뒤 뇌 신경을 따라 구석구석, 순차적으로 정밀하게 퍼져나가는 한 줄기 번개.
콰르르르릉...
열 중 두 번째 수.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치는 열두 줄기 금빛 채찍 속, 퍼져나간 번개가 온전히 뇌를 통째로 뒤흔들고 감과 동시에.
키이잉...
<금안. 발동.>
<현재 육체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한계발동 시간이 3.7초에서 0.14초로 줄어듭니다.>
<시간 내 인지와 기교가 극대화됩니다.>
<암흑 회로(D+)(전 반사 신경>뇌속)가 뇌망(C)으로 변화합니다.>
<이상 상념(D+)(전 기술>기예)가 초상 현상(C)으로 변화합니다.>
키이이잉...
상태창과 동시에 강태석 주변의 세계가 즉각적으로 변화했다.
느려지다 못해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세계.
섬광처럼 날아들던 채찍도 허공에 멈추고 반경, 100m 안의 숨소리와 솜털마저 생생하게 느껴진다.
뇌망.
번개가 몸속 신경계를 질주하고 이를 넘어 사방으로 뻗는다.
초상 현상.
기예가 상식을 뛰어넘어 마치 초능력처럼 현실을 뒤바꾼다.
지속시간은 만전에서도 3.7초, 지금은 고작 0.14초.
장기전엔 부적합하기에 쓰지 않았지만 지금, 찰나의 승부에 있어서는 이보다 적합한 게 없는 스킬이다.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도 강태석의 신경망 내의 명령은 빛처럼 의지를 전달했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
느려진 세계 속, 강태석의 손에 쥐어진 칠채영도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쿠르르릉...
휘몰아치는 검기 속.
가장 먼저 이변을 느낀 건 소주에게 나설 것을 제안한 사내였다.
'뭐지?'
눈앞의 격돌을 지켜보던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앞으로 일곱 수, 길어야 아홉 수.
어린 나이에도 자신들조차 경탄할 성취와 실력을 선보이며 상대를 몰아붙이던 소주의 실력은 훌륭했으며, 비록 강하긴 했지만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던 상대는 이를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아주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소주보다 상대가 더욱 괴물 같기는 했지만.
어떻게 저 상태에서 저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지, 아마 자신이 저 정도로 마력이 바닥이었다면 오십 수 이전에 진즉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자신을 비롯한 주변 이들의 협공에 이미 갈려 나가 전신이 질펀한 육편으로 변했을 것이다.
한데 자신들의 협공을 버텨낸 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보기에도 빛날 정도인 소주의 공격을 저 정도까지 버텨내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끝.
자신이, 소주가, 주변 모두가 느낀 것처럼 이 승부는 조금 있으면 끝난다.
수세에 몰린 상대의 목이 날아가면서.
한데 이 위화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
눈을 갸름히 뜨고 자신이 느낀 감정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눈앞의 싸움에 한층 더 집중한 사내는 순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깨달았다.
눈동자.
평범한 흑색이던 사내의 눈동자가 어느새 금색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들 소주와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소주의, 군바리안을 상징하는 특유의 황톳빛이 조금 섞인 둔탁한 금빛과는 다르게 상대의 눈동자는 청명함이 뒤섞인 온연한 금빛.
동시에.
스으윽...
스윽...
스으으으으윽...
"!!!!!!!!!!!!!!!!!!!!"
갑작스레 변화한, 상대의 손끝에서 피어나던 칼날의 경로.
그와 더불어 찾아온 변화에 사내가 두 눈을 터질 듯 부릅떴다.
태풍처럼 상대를 휘몰아치던 열세 줄기의 검기 채찍들이 상대의 칼끝이 스칠 때마다 마치 가루가 되어 흩어지던 허공에서 스러져 사라지고 있었다.
저렇게 스러질 것들이 아니다.
가냘프게 보여도 검사가 줄기줄기 얽혀 만들어진 파괴의 면포.
한데 칼끝이 유려하게 지나가자마자 마치 씨줄과 날줄이 모조리 끊어진 것마냥 줄기줄기 풀려나더니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으로 스러진다.
마치 지우개가 톡 건드리자 그림이 스르륵 지워지는 것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칼날이 스쳐 지나자 허공을 질주하던 모든 금빛 선들이 지워져 스러진다!
하지만 이내 사내는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허공의 모든 선들을 일순간에 지워버린 한줄기 칼날의 끝이 향하는 곳은...
후우웅...
"막아!!!!!"
콰아아앙!
그들 소주의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드는 한줄기 칼날에 기겁한 사내가 가장 앞장서서 뛰쳐나가며 주변을 향해 버럭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