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내리꽂힌 난입자들.
그런 이들에 신속히 반응한 여덟 남녀와 주변 수십 들의 칼 끝에서 휘황찬란한 빛들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터져 나온 파괴의 빛들이 거침없이 강태석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침입자들 모두를 동시에 쓸어버리려던 그때.
콰직...
콰지지직...
콰르르르릉!
흙먼지 속에서 피어나온 굵은 번개 줄기들이 사방을 강타했다.
콰지지지직...!
이를 피해 뒤로 물러선 여인은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뇌종.
이 콜로니를 질주하는 열한 개 군세 중 하나.
하지만...
'대체 왜?'
발자국을 남기며 일시적으로 물러선 여인이 미간을 좁혔다.
뇌종이 갑자기 이곳에 난입할 이유가 하나 없다.
아니, 애초에 여기 있을 원인조차 불분명하다.
한데 왜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적대한단 말인가?
반면 여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드디어... 드디어..."
"..."
자신의 앞을 갑자기 가로막고 서서 감격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청년을 강태석조차 갸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뇌종.
뇌지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종횡무진 하고있는 이들.
청년, 이오스와 수하들이 이곳 G구역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스피어들과 같은 이유.
최근 5층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녀석들을 살펴보고 만만하면 꿀꺽하고 쓸 만 하면 손을 잡기 위해서.
다만 A구역보다 먼 C구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탓에 스피어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긴 했으며 그렇기에 오자마자 난리에 휩쓸렸다.
일어서는 시체들, 몸을 삼키려 드는 전염병과 저주들, 뒤흔들리는 대지와 무너지는 절벽까지.
육신에 특유의 파사의 기운을 담은 뇌지국의 기공들을 익히고 있었기에 크게 전력이 손실되지는 않았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았던 건 분명하다.
그렇기에 동맹이고 뭐고 일단 본국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피려던 순간.
이오스와 수하들은 보고야 말았다.
이제는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저주받은 그들의 전대 왕이 가지고 사라져버린 뇌지국의 비기를.
황금 순록의 왕관.
이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그들이 익힌 것과 비교를 불허하는 강력한 파사현정의 기운을.
이 구석진 곳에서 이를 사용하는 사내를 만나고 그들은 놀라 일단 몸을 숨기고 사태를 지켜보았다.
격전 끝에 상대가 <금안>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판단을 끝마쳤다.
그는 그저 유사한 번개의 기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진짜 그들 왕실의 권능인 황금 순록의 왕관을 물려받은 자라는 것을.
그렇기에...
"저희랑 가시지요. 위험합니다."
파지지지직...!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번개를 전신전령에 휘두르며 사방에 뽐낸 이오스가 지친 강태석을 향해 말했다.
**
파지지지직...
전신에 익숙한 번개를 휘두른 청년을 본 순간 강태석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왜 자신을 도우며 막아섰는지.
뇌지국의 후예들.
그리고 스러 사라졌던 그들의 왕에게 권능을 이어받은 자신.
자신의 정체와 무관하게 이걸 보고 뇌지국의 인원들 입장에서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작게 중얼거린 강태석이 너머, 노려보는 이들과 정신을 잃고 그들 중 하나에게 안긴 아너스빌을 바라보았다.
혼자 힘으로 이곳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의 곁에 선 이들이 도와준다면 아마 가능할 것이다.
그 정도로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들의 기세는 매서웠으니.
비록 떠나가면 그곳에서의 생활 또한 만만찮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벗어난다.'
"다음에 보자고 다들."
함께 가자는 이들에 대한 수락의 한마디.
그 말에 떨어진 순간.
"모시고 돌아간다! 다들 길을 뚫어라!"
"어림없는 소리하지 마라. 죽여!"
동시에.
콰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앙!
터져 나온 번개와 검기들이 양쪽에서 휘몰아치며 빠져나가려는 이들과 막으려는 이들의 충돌이 벌어졌다.
**
한 시간 후.
"... 놓쳤다고?"
"면목이 없습니다."
눈을 뜬 아너스빌이 자신의 앞, 무릎 꿇은 여인과 여덟을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이는 건 아까 전보다 조금 더 흙투성이가 되고 지쳐 보이는 자신의 수하들.
그리고 할 말 없다는 듯 고개 숙이고 있는 여덟 남녀.
돌을 깎아 임시로 만든 의자 뒤로는 번개와 검기들이 사방을 후려갈기고 태운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뇌종.
뇌지국의 후예들.
11권세 중 하나.
카트란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간 이들의 이름.
카트란은 그들과 사라졌다.
이 숲을 벗어나, 아마 이 G구역마저 벗어나 그들 뇌종의 본거지가 있을 B구역으로.
죽지 않았으니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카트란을 놓친 이들의 표정은 근심과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말을 어긴 것보다 나중 그 녀석이 찾아올 것에 대한 걱정을 지닌 것이었다.
그런 이들을 보며 아너스빌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군바리안의 자락들이 저런 표정이라니.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화가 났다.
"자신 없나 보지? 녀석이 다시 돌아왔을 때?"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직 그자를 따르던 이들이 많으니까요."
무릎 꿇은 여인이 담담히 읊조렸다.
카티, 아린, 군파츠, 달리안 등을 비롯한 생존자 집단의 실세들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강하고 따르는 이들도 많다.
무엇보다 할 일이 많고 적도 많은 지금 당장 필요하기에 무작정 치워버릴 수도 없다.
카트란이 죽었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언젠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리고 진실을 밝힌다면 필시 문제가 될 수 있을 터.
그런 여인의 말에 아너스빌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란 실로 가볍다.
중요한 건 이를 가릴 권세와 짓누를 힘이 있느냐의 문제.
"앞으로 바쁠 거다. 떠나간 패배자는 신경 쓸 수도 없을 정도로 크고 강해져야 하니까."
"...!"
"일어서라 다들. 이제 돌아가야지."
이에 밝아진 표정으로 일어나는 이들을 보며 아너스빌이 주먹을 꾸득 쥐었다.
어차피 살려주려 했다.
빠져나갔건 무슨 상관이랴?
다만 자신의 자비는 한 번뿐.
'카트란. 다시 돌아오지 마라. 그때는... 너를 감싸고 있는 이들조차 모조리 죽여버려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저 너머, 카트란과 뇌종의 인원들이 빠져나간 바다 방향을 바라보던 아너스빌이 빙글 몸을 돌렸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할 일이 많을 것이다.
피이잉...
파아아앙!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밝은 폭죽을 하늘로 터트린 이들은 이내 난장판이 된 수림을 지나 지금쯤 안정되고 있을 본진 방향을 향했다.
**
콰아아아아앙!
"그냥 터트리는 겁니까?"
"스피어 녀석들이 배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모르니까요. 아깝긴 하지만 남겨두면 귀찮아집니다."
쿠르르릉...
절벽에서 떠난 커다란 배 위, 스피어측이 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배가 폭발하는 것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자신을 이오스라 소개한 청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이들은 물자의 생산능력이 좋지는 않다.
배 한 척 한 척이 아쉽기는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터트려버리는 게 나은 상황이었다.
달콤해 보이는 것에는 언제건 독이 발려 있을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후우."
하여간 어떻게든 빠져나오기는 했다.
쿠르르릉...
점점 더 멀어져 가는 G구역, 바다 위를 헤쳐가는 배.
추격 없이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깨달은 강태석은 갑판 위에 털썩 주저앉은 채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 바닥까지 고갈된 체력과 마력.
간신히 서 있기도 힘든 상황.
그런 강태석의 눈앞으로 몇 가지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띠링!
<파일런과 일정 거리를 벗어났습니다. 통제권이 임시로 허용자들에게 넘어갑니다.>
파일런의 통제권이 허용자, 즉 테크니컬인 달리안과 온과 소장에게 넘어갔다.
앞으로 아너스빌은 이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빠르게 불려나갈 터.
실제로 아너스빌이 가장 원했던 것 또한 저 물건이었을 것이다.
군수 병기의 생산이 멈춰버린 이 대지에서 오직 홀로 병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었으니까.
거기에 스스로의 역량과 군바리안의 수하들까지 지지한다면 그 성세는 날개 돋친 듯 뻗어 나갈 것이다.
반면 자신은...
'전마강갑. 여의. 파르스. 금속 생명. NO. 111. 나쁘지 않네.'
혈혈단신.
만신창이가 된 몸에 걸친 물건들을 떠올린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사 단장, 에르트와 구울몬트라를 몰아붙였던 전투 모드가 떠올랐기에, 임시로 <흑기사>라고 이름 붙이기로 한 병기.
마력이 버텨주는 한은 무쌍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일 수 있다.
한 개 챙겨 왔다지만 그 한 개가 나쁘지 않음을 넘어 상당히 좋다.
거기에 새로 생긴 세력의 자락들인 뇌종.
뇌지국의 후예들.
파직.
바닥난 마력을 그러모아 손가락 끝에 작게 스파크를 일으켜본 강태석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한 발짝 물러서 뒷짐을 지고 굳건히 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 이오스를 마주 보았다.
물어볼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말을 아끼는 걸로 보이는 상황.
후우.
그런 상대를 바라보던 강태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뭘 원합니까?"
"..."
"솔직히 말해주는 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를 정하기에 편합니다."
강태석이 침묵을 지키는 이오스를 바라보았다.
강태석이 생각하기에 뇌종의 내부상황이 그닥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내부가 단단하고 강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면 사라진 옛 왕의 존재 따위는 되려 방해가 될 뿐이니까.
심지어 나라를 한번 말아먹을 뻔했던 존재인데 홀연히 나타나 제 권리를 되찾겠다고 설치면 얼마나 거슬리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목숨까지 걸어가며 자신을 구해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눈을 잠시 감았던 이오스가 강태석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우리들의 중심이 되어주십시오."
"허수아비가 필요한 건 아니고요?"
"..."
왕이란 권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징.
강태석의 말에 이오스가 재차 눈을 감았다.
**
이오스에게 전해 들은 뇌종의 현재 상황은 간단했다.
사분오열.
다른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 오롯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수구 세력들.
동시에 다른 11권세, 혹은 칠국연합들과 손을 잡고 일단 생존과 세력의 확장을 도모해야 한다 말하는 강성파들.
혹은 이도 저도 상관없이 오로지 휘하 스스로들의 세력만 생각하며 기회를 노리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독립 세력들.
그 모든 이들이 C구역에 발원하여 개판 오 분 전인 상황이다.
설령 방향이 같아도 중심이 없으니 오직 서로가 힘만을 앞세운 채 성과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필요한 건 절대적인 중심.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선명한 명분과 상징.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저 그 자리에 계셔만 주신다면.>
철썩...!
어느새 밤이 되어 달빛만이 비치고 있는 갑판 위, 의자에 홀로 앉아 서 있던 강태석이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안 해줘도 된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게 그들 입장에서 더욱 좋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머리 위의 상전이 아닌, 그저 앞에 내세울 간판이니까.
사라졌던 뇌지국의 정통 후계자.
이보다 더 좋은 상징이자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해볼까?'
어둠 속, 자신을 감시하듯 사방에 선 뇌종의 인원들을 스윽 둘러보던 강태석이 하늘에 뜬 인공 달을 보며 손가락을 비비 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