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63화 (16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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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칼라다는 새로 깨어난 세상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잡아 처넣은 빌어먹은 연방 놈들이 망해버린 것도 마음에 들었고, 더 마음에 안 들던 세상과 인류가 통째로 멸망해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이전 주인, 군바리안과 달리 새로운 소주가 귀엽고 깜찍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얼굴에 상처가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어설픈 남정네들은 그걸 보고 떨어져 나갈 것 아닌가?

"소주 배필은 나중에 내가 찾아 줘야지. 흥흥. 나랑 계속 놀면 더 좋고."

고철산 정상에 앉아 콧김을 흥얼거리던 여인은 자신의 옆 자락에 놓인 기계 장난감 하나를 부스럭 들어 올려 보았다.

한때는 제대로 작동했겠지만, 이제는 이곳 특유의 성질 때문에 동력 문제로 폐물 신세.

이 C구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은 인형을 바라보던 칼라다는 이내 어깨 너머 뒤로 인형을 후웅 던져버린 뒤 난리가 나버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상황은 지옥도.

콰아아앙!

쿠르르릉...

"제법이긴 하네."

날뛰는 기계병기들을 보며 칼라다가 중얼거렸다.

저런 것들이 끝도 없이 생산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모른 채 밀려든다 했는가?

확실히 아무리 대포나 총이 있어도 싸우는 게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어 보였다.

전쟁은 공포에 잡아 먹히는 쪽이 패배하는 법이었으니.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두려움과 절망에 잡아 먹힌다.

설령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스윽.

몰아붙이는 기계병기들은 바라보던 칼라다는 고개를 돌려 도시의 반대편, 한편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쯤 뒤흔들어 놓으면 튀어나올 터.

아니나 다를까.

쿠르르릉...

저 멀리, 도시의 화려해 보이는 건물들 중 하나에서 개미같이 몇몇이 우르르 튀어나오는 걸 본 칼라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일할 시간.

"자자. 드가자."

토옹...

토오옹!

아래에서 터진 난리를 무시하고 왼쪽으로 칼라다가 통통 고철산을 뛰어 내려가던 그 무렵.

쿠르르릉...!

오른 켠, 강태석이 도착한 방향에서 또한 격렬한 굉음들이 터져 나왔다.

**

구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날뛰는 거대한 소 위에 올라탄 사람처럼.

목에 채찍이 휘감긴 채 난동을 부리는 라이노 위에 선 강태석이 자신의 손처럼 느껴지는 감촉 속, 흑기사의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이어 터져 나오는 청색의 불길.

콰르르르르릉!

검기와 고출력 사이오닉검이 뒤섞여 만들어진 청람의 열기가 그대로 NO. 111을 타고 뻗어 질주하며 수백 미터의 푸른 칼날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강철의 채찍이 어지간한 집보다 두꺼운 라이노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파고들며 썰어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더 흉악하고 두텁게 변한 NO. 111의 이빨들이 살아 움직이며 질겅질겅 금속 섬유를 파먹고 뜯어내고 있는 것은 덤.

콰드드드득...

쿠어어어어어엉!

“우아아악!”

칼날이 파고들수록 라이노가 더욱더 거칠게 날뛰며 얼기설기 만들어진 건물과 거주구역들을 몽땅 박살 냈다.

무너지는 건물과 터져 나오는 파편들에 다급히 몸을 피하던 도시민들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건 덤.

이에 흑기사 안에서 사방을 살피던 강태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간만 지나면 무난하게 이기겠지만 원체 덩치도 크고 갑각과 체력도 강인한 녀석이라 죽기 전까지 어마어마하게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심지어 주변에서는 상황을 인지한 다른 기계병기들이 라이노의 등을 타고 자신을 향해 기어 올라오고 있는 상황.

키리리릭...

키이잉...

붉은 안광을 빛내며 서로 의사소통을 마친, 크기 3m의 기계 거미들이 도시를 헤집다 말고 냉철하게 라이노의 피부를 타고 올라와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

그 숫자가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백.

거기에 실시간으로 도시 사이를 지나 자신에게 몰려드는 중.

콰아아앙!

오른손으로는 청람의 채찍을 놓지 않은 채 왼 주먹을 들어 기어오르는 거미를 내리친 강태석은 훅 터져 나오는 폭발에 인상을 찌푸리며 급히 왼손을 검기로 휘감아 보호했다.

내버려 두면 부식액을 주입해 내부를 녹여버릴 녀석들이 강제로 공격하면 자폭해 터지기까지 한다.

흑기사에게 큰 피해는 없지만, 흑기사를 유지하는 자신의 마력이 어디까지 버텨 주느냐가 관건.

하지만...

띠링!

<메탈릭(LV. 11)을 처치하셨습니다.>

<상당한 경험치를 확보합니다. 육체가 강화됩니다.>

<현재 LV16(11.94%). 소정의 마력이 활성화됩니다.>

...

<메탈릭의 코어를 통해 얻은 에너지가 파르스->흑기사에 공급됩니다. 현재 출력 잔량 43%>

<메탈릭(LV. 11)을 처치하셨습니다.>

<상당한 경험치를 확보합니다. 육체가 강화됩니다.>

<현재 LV16(12.00%). 소정의 마력이 활성화됩니다.>

...

<메탈릭의 코어를 통해 얻은 에너지가 파르스->흑기사에 공급됩니다. 현재 출력잔량 43.1%>

'해볼 만하다.'

콰아아앙!

콰앙!

맨손으로 폭발을 짓이겨가며 금속 생명을 통해 거침없이 코어를 삼키던 강태석이 끊임없이 충전되어가는 출력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흑기사를 유지하는 마력 자체가 만만치 않았기에 어둠샘으로도 흐르는 마력 자체는 조금씩 소모되어갔지만, 그와 반대로 흑기사의 기체와 출력은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폭발적으로 변해갔다.

더욱 단단하게, 더욱 강렬하게.

덕분에 내부 코어에는 이제 아까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쌓인 상황.

이 정도면 시도해볼 만하다.

속으로 중얼거린 강태석이 한 번 더 의지를 끌어올린 순간.

파지지지직...

파직!

강태석이 탑승한 흑기사의 전신, 그 주변으로 희미한 스파크가 파직거리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하지만 점점 더 굵고 커다랗고 강렬하게.

황금 순록의 왕관.

이것이 전마강갑에 집어 삼켜져 변한 뇌전의 권능.

그 권능이 마찬가지로 전마강갑에 삼켜진 흑기사의 표면을 타고 꿈틀거리며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그 근원은 강태석의 마력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기계병기들을 집어삼키며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는 흑기사의 코어.

콰르르르릉!

흑기사의 단전 부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더더욱 격렬해지며 온몸 주변을 휘감았고, 그럴수록 굵어지던 번개 줄기가 이제는 숫제 천둥처럼 굉음을 토해내며 사방을 뒤덮었다.

이윽고.

콰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사방을 휩쓰는 거대한 충격파.

이어.

콰지지지직...

콰아아아앙!

전신을 황금빛 번개의 갑옷으로 휘감은 흑기사가 거침없이 전신을 내지르며 라이노와 주변의 기계병기들을 사정없이 으깨버리기 시작했다.

**

도시 한쪽.

"모두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서쪽을 뚫어!"

콰아아아아아앙!

번개의 검기를 휘감은 청년, 이오스가 달려드는 기계 거미들을 베어내며 버럭 소리쳤다.

저릿한 손과 우릿한 단전의 통증에 인상을 쓰면서.

콰지지지지직!

콰아아앙!

"..."

'너무 단단해. 체급 차이도 크다.'

죽어가면서까지 밀어붙이고, 그것도 넘어 자폭까지 감행하는 기계 거미를 피해 뒤로 훌쩍 뛰어오른 이오스가 사방에서 끝도 없이 밀려드는 기계병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들은 확실히 자신보다 약하다.

검기만 휘두르면 두부마냥 성둥성둥 장갑을 썰어내고 코어를 베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보다 훨씬 더 무겁고 출력 자체가 강하다.

그게 지금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을 상대하면서도 육체의 피로가 쌓이고 있는 이유.

그리고 이를 넘어서 보기만 해도 피로해지는, 도시를 점령한 기계병기 군대들의 숫자에 이오스가 이를 까득 갈았다.

평화가 너무 길었다.

기계병기들은 군대의 중장갑병기로 상대하는 것이 교전의 기본.

자신 같은 검기 사용자들은 끊임없이 물량과 볼륨으로 밀어붙이는 기계병기들과 영 상성이 좋지 않다.

하지만 자신을 비롯한 콜로니 전체의 세력들이 기계병기와의 전투에는 대비를 하지 않은 지 오래다.

기계병기의 위협에 최전선으로 노출되어 있던 궤도 엘리베이터는 기술적으로 기계병기들에 대한 수많은 장치들이 선행적으로 방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붕괴된 일부인 콜로니 전체가 어지간한 수준의 기계병기들로부터는 면역에 가까운 영역이 구축되어 있었다.

그 흔한 생체 펄스 은폐장치 없이도 마음 편하게 대지와 플로어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기에 콜로니에 들어온 모두는 점점 중장갑군대를 각 지역을 지키는 용도가 아닌, 다른 세력과의 대치 전선에 배치하는 등 기계병기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해갔다.

웃기게도 자신들은 기계병기들 때문에 세상이 망해 이곳으로 쫓겨 들어왔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진화에 성공해 이곳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녀석들에 의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쩌어어어억!

콰아아아앙!

"크흑..."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기계 거미 하나를 다급하게 베어낸 이오스가 전신에 마나를 둘러 터져 나오는 충격을 막아내며 신음을 흘렸다.

싸울 만은 하지만 이대로는 끝도 없다.

자신들 한 몸 구해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사람들을 구해내 빠져나가기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

거기에 이곳은 자신들, 적통 파벌과는 상관없는 것을 넘어 사사건건 대립하던 도시.

굳이 이런 곳까지 목숨 걸고 뛰어들었어야 했나?

그냥 상징으로 남으면 족한 작자가 날뛰는 장단에 맞춰?

이를 악문 이오스가 복잡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고 재차 칼을 휘두르던 그때.

쿠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아앙!

저 멀리서 웅혼한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충격파가 훅 도시와 그사이에 선 이오스를 휩쓸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보이는 건 거대한 라이노의 목줄을 잡아채고 선 그자의 흑기사.

하지만 아까와는 느낌이 다르다.

칠흑의 기체 전체를 둘러싼 강렬한 뇌전의 갑옷.

이를 따라 뻗어 나가 거대한 코뿔소의 목 전체를 지져버리고 있는 번개의 칼.

그리고 그런 흑기사의 머리 위에 쓰여져 있는 건...

"황금... 황금의 왕관이다."

콰르르르르릉!

머리 위로 보이는 건 아홉 줄기 번개들이 뿔처럼 돋아난 거대한 왕관.

그곳에서 터져 나와 황금의 갑옷을 범하려 달려드는 기계군대 전체를 갈아버리고 있는 굵은 뇌전의 폭풍.

그 모든 광경을 이오스가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젊은 자신들은 구전으로나 전해 들은, 한때 뇌지국이 굳건하던 시절 왕가만이 부릴 수 있었다는 아홉 가닥의 번개.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건 이오스만이 아니었다.

"왕... 왕가다."

"왕가가 다시 나타났어."

이오스와 보좌 여인, 그리고 특무대를 따라 대피하던 이들이 급박한 현실조차 잊고 멍하니 도시 한가운데, 터져 나오는 황금빛을 바라보았다.

**

콰르르르릉...

고철산을 따라 도시를 향하던 칼라다의 고개가 뒤쪽에서 터져 나온 굉음에 휙 돌아갔다.

굉음이 신기할 건 없지만 칼라다의 신경을 자극한 건 뭔가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기분.

이윽고.

"아하하하! 뭐야. 저게 아직도 있었어?"

한때, 잠들기 전에는 뇌지국의 영토를 기반으로 활동하였던, 그렇기에 이번 임무에 투입된 칼라다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아홉 뿔의 번개를 보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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