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69화 (16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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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좋아."

10분 전.

배에 탄 여인, 카일란은 오늘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빈마흔이 죽었다지만 애초에 아버지로서의 정은 거의 없던 차였다.

예전 뇌지국이 무너지던 날, 적통인 어머니를 버리고 첩들을 챙겨 피신하던 자에게 애정이라는 것은 없으니.

다만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좋은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챙겨주었으며, 그렇기에 사람들 앞에 설 때 내뱉었던 카일란의 분노에는 명분이 서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슬픔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끼익...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침대에 앉은 카일란이 자신에게 주어진, 제법 고풍스런 객실을 둘러보며 웃었다.

창밖이 잘 보이는 고급스런 조망.

난리통에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운 바다가 바깥으로 펼쳐져 있다.

하긴 무너진 게 인간의 도시지 바다는 아니니까.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고급스런 가구들.

한때 휴양지로 유명하던 이곳 6층, 이를 횡행하던 여객선 하나를 발견해 왕실에서 자신들 전용으로 쓰고 있었다던가?

다 망해가면서 떠돌고 있는 주제에 왕실이니 뭐니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 덕에 이런 와중에도 나름 호화스러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려고 했다.

사실 환경만 보면 아버지, 빈마흔이 준비했다던 허름한 화물선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거기에...

똑똑.

"무슨 일이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에 침대에서 일어선 카일란이 미소를 슬쩍 지워내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입구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이어 보이는 얼굴들.

끼이익.

"들어와요."

입구에 선 다섯 명의 청년.

그리고 그 뒤로 선 세 명의 남녀.

복도를 그득 메울 것처럼 선 여덟을 향해 인사한 카일란이 앞장서 안으로 들어오자 열린 문을 통해 밖에 서 있던 이들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이어 닫힌 문.

쿠웅...

바깥과 격리된 공간 안에 들어온 카일란이 눈앞의 여덟을 바라보았다.

복도는 좁았지만, 객실은 충분히 넓었기에 여덟이 널찍이 거리를 두기에도 충분했다.

그렇기에 구분된 거리, 구분되는 차이.

쇼파에 앉아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세 명,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인.

그리고 그들의 반대편에 호위하듯 뒷짐 지고 우뚝 선 다섯 명의 청년들.

누가 봐도 한쪽은 여유로웠고 한쪽은 충성스러워 보였다.

그렇기에 한층 더 만족스러워진 카일란이 그들을 향해 웃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을 텐데 마지막까지 다들 수고했어. 그리고 도와주신 여러분들도요."

"고생은 무슨. 네가 제일 힘들 텐데. 카일란."

"아닙니다. 아가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양쪽에서 다른 톤의 대답이 나왔다.

2남 1녀 중 여성에게서는 다정한 반말이, 다섯을 대표하는 청년 중 하나에서는 묵직한 존대가.

구분은 간단했다.

그들 셋은 아까 전 자신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한, 어린 시절부터 함께 돈독히 자란 도시 각 권세가의 후계들이다.

청년 다섯은 난리통이 끝나고 배로 오던 중, 자신들을 모시고 싶다고 하며 친위대처럼 모여든 이들의 대표.

말하자면 새로운 주인인 자신들을 찾아온 것.

이오스는 아까 전 소리치던 자신과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자신들의 결백을 몸소 보여줄 테니 수도까지 같이 가자고.

당신들을 호위하며 이를 증명하겠다고.

그리고 이는 카일란이, 그리고 생존자들이 처음부터 바랬던 바이기도 했다.

애초에 분노에 가득찬 척 고래고래 외친 게 복수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으니.

미쳤다고 이오스와 그가 이끄는 특전대와 싸우고 싶겠는가?

스물 대 수천이라고 해도 격이 다르다.

배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불태워질 뿐.

다만 그들은 명분과 영향력을 원했을 뿐이다.

혹여라도 자신들을 버리고 갈 수도 있는 적통 파벌들에 대한 으름장을 놓고, 동시에 생존자 집단에서 리더로 우뚝 설 수 있는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모든 게 계획대로 잘 되었다.

죄책감인지, 신념인지, 혹은 나중에 혹여 생겨날 불씨를 예방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적통 파벌들은 생존자 모두를 배에 태워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간 뻔뻔에 가까울 정도로 적통 파벌 측 요청을 무시하며 중립을 지키던 도시의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던 도중 적당히 이뤄진 이 결과에 모두 만족하며 암묵적으로 카일란들을 자신들의 새로운 대표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들 도시 주인의 후계이기도 하거니와, 수도로 가도 똑같은 일이 생길 터인데 그때마다 카일란의 사연과 비극은 그들에게 있어 큰 이득이 될 터이니.

그리고 그중 적극적이고 야망 있던 이들은 빠르게 자원해 카일란들의 친위대를 자처했다.

자신들 주변에 모여들면 이 새로운 집단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챈 것이다.

칼리안과 세 남녀도 이런 이들이 필요했으니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끝.

그리고 그들은 그 마무리를 즐기는 동시에 다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어찌 보면 오늘은 그들에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으니.

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친위대를 자처한 청년들 대표 중 하나.

쿠르릉...

"혹시 보셨습니까? 새로운 왕가의 적통을?"

천천히 출발하는 배속,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청년의 말에 카일란을 비롯한 세 남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왕가의 적통이라니.

이미 예전에 망해버린 뇌지국의 왕실에 적통은 무슨?

"혹시 이오스를 말하는 건가요? 그자가 새로운 후계로?"

"역시 못 보셨군요."

한숨을 내쉰 청년이 이내 말을 이었다.

도시 전체, 더 나아가 고철산 가운데서 있었던 일들과 싸움을.

모여있던 이들 모두가 지켜보았던 황금빛 왕관의 주인을.

그리고 그 이야기가 모두 끝난 순간.

"......"

카일란의 표정이 절로 딱딱해졌다.

사실 아까 전부터 이해가 안 가긴 했으니까.

적통 파벌, 그중에서도 제법 중역을 맡고있는 이오스와 특전대가 뭐하러 굳이 중립을 철저히 표방하는 자신들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는지.

하지만 저 말대로라면 모두 이해가 간다.

어디선가 찾아낸, 끊겼던 왕가의 새로운 후손.

이를 호위하며 도착한 특전대.

그리고 향하는 수도.

'아마 여긴 설득을 위해 온 거였겠지. 도시가 무너지니 더 의미가 없어 배를 타고 가는 거고. 고철산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했더니.'

카일란이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들이 배를 준비하던 전용 항구는 사건이 벌어진 고철산의 반대편이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다만 그 너머에서 빛이 번쩍이고 굉음이 들려오다 어느 순간 고철산이 무너지는 것만을 보았을 뿐.

그때는 그저 깔려가는 기계병기들을 보며 운이 좋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한 명이 해낸 거였다고?

그것도 새로이 나타난, 왕실의 적통 후계라는 자가?

이건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마냥 시간 끌 수만도 없는 법이다.

이곳의 머리가 이오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대체 왜 그런 자가 아까 전 난리통에서 자신들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디 머무는지는 알고요?"

"이곳 바로 위층입니다. 최상층. 지금 안내할까요?"

"당장이요."

자신들의 기대 이상.

즉각 행동에 나서는 카일란의 모습에 만족스레 서로를 바라보던 청년단들 다섯이 이내 앞장서 문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현재.

"..."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밖으로 나서 문을 열었던 강태석이 자신의 앞, 당당하게 선 네 남녀와 다섯 청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보기 귀찮았던 얼굴들.

이 바쁜 와중에 이오스들에게 호위까지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신의 객실이 노마크상태이긴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직접적으로 아무 제제 없이 보게 될 줄이야.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도 좀 그렇다.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만 재는 뿌리지 말자.>

이게 자신의 철학 중 하나.

지금도 이오스와 그 수하들이 분주하게 배 이곳저곳 생존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 텐데 그 얼굴 역할을 할 자신이 냉큼 박대했다 하기도 좀 그러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박대는 안 하겠다는 정도.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고요?"

"네."

"들어와요 그럼."

"감사합니다."

"아 잠깐 정지. 한 명만."

고개를 꾸벅 숙이기 무섭게 냉큼 우르르르 몰려들어오려는 이들을 막아선 강태석이 자신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홉을 되려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아홉 명 다 들어오려고 그랬어요? 남의 방에?"

"..."

"한 명만. 한 명만."

이런 상황은 예측 못 한 것인지 아홉이 서로를 바라보며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중에서도 열심인 게 딱 봐도 고급스런 복장을 입은 2남 2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각자가 물러서기 싫어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이에 점점 더 귀찮아진 강태석이 대충 그들 중 하나를 찍어냈다.

그나마 말을 트고 통성명도 한,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인.

"카일란이라고 했던가? 들어와요."

"...!"

선택에 순간 희비가 갈렸다.

카일란의 얼굴에는 기쁨이, 나머지 셋의 얼굴에는 분노가.

하지만 그것도 찰나.

끼이이익...

콰앙!

매몰차다시피 문을 닫아버린 강태석이 먼저 들어온 카일란을 향해 대충 손짓했다.

"편한데 앉아요. 그나저나 할 얘기가?"

쿠르르릉...

구석에서 찻잔을 꺼내면서 강태석이 물었다.

그 와중에도 내면의 검은 샘을 끊임없이 돌려 회복시키며.

어차피 마력 회복은 무량기공이 있는 이상 언제 어디서건, 심지어 수다 떨 거나 자는 와중에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흑기사를 타고 싸웠기에 육체의 피로는 크지 않다.

즉 수다 좀 떤다고 하던 일에 방해되지는 않는다는 뜻.

그렇기에 소녀를 방 안으로 들인 것이다.

넓은 방, 바깥에서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적막하게 혼자 여유 부리자니 조금 뻘쭘하기도 했고.

이 정도 소일거리라도 있는 게 낫다.

쪼르륵.

차 마시는고 수다 떠는 걸 바깥, 분주히 움직이는 특전대들의 일과 동등하게 취급해버린 강태석이 의자에 앉으며 차를 따르고 바라보자 마주 앉은 카일란이 자세를 바로잡은 채 웃었다.

"일단 감사드려요. 들었습니다. 이렇게 새로 왕가의..."

"본론. 본론만."

"..."

"큼 흠. 몸이 좋지 않아서 지금."

길어지려는 걸 일시에 잘라버린 강태석이 어이없어하는 카일란을 향해 적당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본론이 궁금해서 부른 거지 쓸데없는 미사여구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강태석의 태도에 카일란의 눈썹이 꿈틀거리던 것도 잠시.

"... 새 왕손께서는 직선적이시네요. 좋아요. 저를 중용해줬으면 좋겠어요."

바깥, 문 쪽을 흘끔 바라본 카일란이 당당하게 말했다.

저희도 아니고 저, 당연한 이야기다.

좋은 자리가 그리 많겠는가?

그리고 카일란은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명분과 품격을 그리 중시하는 적통 파벌에 새로이 나타나 인정 받아야 하는 후손.

티끌 하나의 흠집도 내기 싫을 판국에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중립 세력의 학살극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

사실 카일란도 이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가솔을 죽였는지 알 순 없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지금 이들에게 있어 자신은 아픈 손가락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결코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거라는 것.

"약조만 해주신다면 아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알아서 잘 정리 하겠어요. 더 나아가 왕손 편에 서고."

"흐음. 좋은 제안 같기도 하고."

이에 턱을 매만지는 상대의 태도에 카일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던 순간.

"잠시만요."

"?"

따악.

어딘가로 손가락을 튕기는 상대의 모습에 카일란이 멈칫했다.

**

3분 후, 방 안.

"그런 얘기를 하시고 계셨군요."

"..."

"그런 얘기는 저랑 하시면 됩니다."

"..."

웃으면서도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왕손 앞을 막아선 흑발 여인, 카르멘을 마주하고 선 카일란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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