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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
"이제 좀 살겠네."
카일란에 카르멘까지 모두 나가고 재차 조용해진 방 안에 누워 강태석이 다리를 쭉 뻗었다.
어쭙잖은 투덕거림에 끼어드는 건 사양이다.
그런 건 이오스나 카르멘 선에서 정리되는 게 맞다.
그들이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룰 문제이기도 하고.
자신은 쉬어가며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쿠르릉...
상체만을 일으켜 객실 밖. 배 너머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또 다른 육지를 보던 강태석이 콧김을 길게 뿜었다.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현 뇌종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 <로블롭>이.
동시에 그러한 도시 주변을 그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강철의 섬들도 보였다.
쿠르르릉...
'영역에 대한 문제를 저렇게 해결했군.'
온갖 철재들을 엮어 만든, 육지와 연결된 섬들.
그 위에 올려진 수많은 금속병기들과 바다 아래로 이어진 수많은 굵은 케이블들을 강태석이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육지에서는 지속적으로 동력원이 훼손되니 아예 저런 식으로 바다 밖에 기갑군대를 보존하고 충전하는 방식을 택한 것.
어차피 이 6층 구역이라는 곳 자체가 바다만 지키면 외적의 침입들로부터 안전하니 실리적으로도 나쁠 것 없다.
물론 저 군대를 이끌고 와 영역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싶을, 군대의 실권자들에게 매우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이런 격세 속에서도 다양한 중소 세력이 뇌종 내 난립할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
모든 걸 통째로 밀어버릴 수 있는 군대가, 해안지역에 발이 묶여 있으니 인력으로 경쟁을 해결해야 한다.
그게 어찌 보면 지금 군대의 실 통수권자들인 적통 파벌과 신흥 파벌의 대치가 길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아니었으면 그 두 세력이 진즉 군대를 끌고 각 세력들을 하나씩 집어삼킨 뒤 승부를 보았을 것이다.
그때.
똑똑.
"들어와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강태석이 그냥 들어오라고 말했다.
아까 전과 달리 이제는 귀찮은 사람일 리가 없었기에.
이윽고 들어온 건 청년, 이오스.
끼익.
"도착했습니다. 하선할 준비 하시지요."
"내려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할 일이 많았던 것인지, 한결 수척해진 이오스를 보며 강태석이 묻자 이오스가 잠시 강태석을 마주 보더니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하십시오. 칸헬께는 그게 더 나을 테니."
"... 그러지."
이채를 띄던 강태석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말을 놓았고, 그런 강태석을 바라보던 이오스는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당분간은 이곳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적통 파벌 쪽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오스의 말에 강태석이 혀를 찼다.
"그쪽에서도 나를 반길지 안 반길지 모르는 거군."
"맞습니다. 부끄럽지만."
이오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군이건 적군이건, 굴러온 돌을 반길 박힌 돌은 누구도 없다.
설령 그 굴러온 돌이 원래 그 자리의 주인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심지어 지금은 좀 더 복잡한 상황이다.
각자가 각자들의 권력과 무력, 세력을 움켜쥐었으며, 되려 신흥 파벌들보다는 적통 파벌들 쪽에서 자신을 더욱 껄끄러워 할 공산도 크다.
애초에 반목하고 있는 상대편과 달리 적통 파벌들의 수장들은 강태석, 칸헬이 등장하면 그 즉시 머리 위로 윗사람이 생기는 꼴이니 말이다.
이제껏 자신들이 추구해오던 명분도 그것이니 자신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떡 하니 받아들이기도 싫을 터.
최악의 경우...
'암살도 노릴 수 있지. 그게 제일 편하니까.'
턱을 매만지는 강태석을 향해 이오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도 칸헬을 발견하게 될 줄은 아예 몰랐습니다. 수도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그저 G구역의 소식 정도만 가져올 거라 여기고 있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이 틈을 타 저희가 먼저 수도로 들어가 믿을만한 이들에게 먼저 이를 알리고 자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적통 후계의 등장을 싫어하는 이도 있겠지만, 당연히 반길만한 이들도 수두룩하다.
그 예전, 빛나던 왕가를 그리워하는 이들.
구심점 없이 치고받는, 소득 없는 오랜 기간의 대립에 염증이 나버린 이들,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줄 결정적 한 수를 기다리는 이부터 이 지루한 상황을 끝내고픈 이들까지.
이들을 차례대로 모은다면 일단 강태석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초석이 된다.
그리고 이들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반대하는 이들을 흡수해 나가는 게 이오스의 현재 계획.
그런 이오스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게 뭐 있겠는가?
자신들이 먼저 가서 알아서 자리 만들어 놓겠다는데.
물론 하나의 단점이 있기는 하다.
자신을 배제하고 판이 돌아간다는 것.
여차하면 자신은 톱니바퀴가 되고 재미는 다른 녀석이 본다는 것.
하지만...
'상관없지.'
애초에 지금 강태석의 관심은 왕위보다는 조금 다른 것에 쏠린 상태였다.
육지에 다가서자마자 눈앞에 떠오른 창 때문.
띠링!
<검은 태양>
> 현재 금속 생명이 수도, 로블롭 지하 어딘가에 잠든 강렬한 태동을 느끼고 당신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 이는 금속 생명체와 같은 외계 존재의 흔적입니다.
> 현재 C구역 전역의 동력원 고갈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도 그 외계 존재 때문입니다. 이를 찾아 처리하십시오.
> 해결 시 금속 생명이 이를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검은 에너지원은 새로운 코어가 되어 당신의 흑기사를 한층 더 다른 존재로 끌어올릴 것입니다.
> 성공 시 : 흑기사 진화
> 실패 시 : 대폭주
"..."
심상치 않은 마지막 단어에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
현재 흑기사의 장점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중장갑을 지닌 고출력병기.
동시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함과 기동성을 갖춘.
여기서 핵심은 후자이다.
사실 중량과 출력조차 어지간한 보행병기보다 상위 축에 속하지만, 그보다 더욱 거대한 기계병기와 병종들이 많은 이 세계에서 그게 절대적인 장점이 될 수는 없다.
마치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상대의 멱줄을 딸 수 있다는 것이 흑기사 최대의 강점.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근접병기>들을 상대로 할 때나 먹히는 말이다.
끼이이익...
쿠르르르르릉...
"타이밍이 좋긴 한데."
어느덧 해상에 멈춰선 배 위, 발코니에 턱을 기댄 강태석이 저 멀리 금속섬에서 위협적으로 바깥쪽을 향해 포신을 내뻗고 있는 병기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울러>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도 수십 킬로미터 바깥 구역으로 포격을 뿜어낼 수 있는 초고화력 병기들.
전쟁이 격화되고 저런 병기들이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하면 흑기사고 뭐고 소용이 없다.
매머드를 잡는 기사라고 할지라도 투석기를 버텨낼 수는 없는 법이니.
한 대 맞는 즉시 격침.
그리고 마울러의 성능은 지극히 놀라워 그 정밀성과 고속기동대상에 대한 타격명중률은 투석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통상 고속 이족보행병기나 고위 검기 사용자를 대상으로도 명중률 17.2%.
대여섯 대 쏘면 한 대는 맞는다는 뜻.
심지어 정확히 적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파괴 범위 안에 있는 것 자체로 위험하다.
기체 표면이 녹아내리고 마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갈 것이다.
즉?
앞으로 홀몸으로 돌아다니고 싶으면 기체 자체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는 것.
지금의, 단순히 이 육중한 거체를 고속기동하게 만들 수 있는 정도의 동력원을 넘어서 각종 테크쉴드 등을 가동할 수 있을 정도의 동력원을 갖춰야 한다.
기체 자체가 강대해져 공격을 무시해버릴 수 있다면 외부의 충격에 마력이 바닥나는 일 따위도 현저히 줄어들 테니.
그리고 그걸 위한 최적의 퀘스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검은 태양.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를 집어삼켜 기체의 새로운 심장이자 코어로 삼을 것.
하지만 실패 시 대가로 써있는 단어가 영 마음에 걸린다.
대폭주.
이는 수도 지하에서 꾸준히, 광대하게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는 외계 생명체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할 거라는 것.
지금 구역 전체에 벌이고 있는 짓거리만 봐도 범상치 않은 놈이 분명하다.
날뛰기 시작하면 아마 로블롭이 날아가는 건 기본이고, 재수 없으면 근방 뇌종의 생존자들 모두가 절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터.
그렇지만 강태석은 망설이지 않고 허공의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수락.>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금속 생명체가 당신을 인도합니다.>
키이잉...
옆에서 반갑다는 듯 떨어 울리는 정팔면체를 바라본 강태석이 슬쩍 객실에서 일어섰다.
퀘스트는 무슨 자신이 실패해서 폭주하는 것처럼 써놨지만 저런 타입 대부분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폭주한다.
오히려 질질 끌면 그 외계 생명체 같은 녀석이 완성될 시간만 벌어주는 셈이니 더욱 안 좋은 셈.
실패고 뭐고 일단 문제로 떠올랐으면, 그 즉시 해결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최대한 이곳에 생존자들이랑 같이 계셔주십시오.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마지막, 이오스의 말이 떠올랐지만, 강태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상사태인데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제멋대로 굴 수는 없으니 말은 남기고 갈 생각.
똑똑.
"카르멘."
... 무슨 일이시죠?
강태석이 객실 문을 두들기자 그 너머에 선 카르멘으로부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오스가 작은 배를 타고 수도를 향한 동안 배의 총책임을 맡은 카르멘이 호위 겸 불상사 방지를 위해 문 앞에 서 있었던 것.
그런 카르멘을 향해 강태석이 담담히 말했다.
"할 일이 있어서 외출 좀 다녀오지. 자리 잘 지키고 있고. 별일 없으면 금방 다녀올 테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태석이 바깥으로 뛰어내리려 객실 쪽, 발코니를 향해 몸을 돌린 그때.
콰지지지지지직!
"허억... 후우. 그게 무슨 말이시죠?"
어찌나 다급했던지 문을 열 시간도 없이 부수고 들어온 카르멘이 강태석을 번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
5분 후.
부우우웅...
금속 생명체가 변한 부유바이크가 바다 위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빠르게 육지 쪽으로 접근했다.
영뇌수의 홍옥색 비늘에 뒤덮였기에 배도, 육지도, 그 어느 누구도 접근을 알아채지 못할 상황.
그리고 그 위.
"..."
함께 탄 카르멘이 복잡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칸헬을 응시했다.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즉각 치고 들어온 것도 잠시, 대답을 요구하는 자신에게 정말 뜬금없는 말이 날아들었다.
<서둘러야 해. 안 그러면 수도가 날아갈지도 몰라.>
마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했던 표정.
그렇기에 고민하던 카르멘은 결정을 내렸다.
배는 다른 대원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이 동행하기로.
이를 통해 어느 정도 변수를 통제할 수 있을 터.
'추가적인 지원요청을 해야 하나?'
카르멘이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바다 위 3m를 떠서 질주하던 배는 순식간에 수도가 자리 잡은 육지에 가까워졌다.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높이 쌓인 고철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난리도 아니네."
콰지지지직!
“이 새끼들아! 안 꺼져!”
"..."
칸헬의 말에 육지를 바라본 카르멘이 육지 위, 수천의 난민들이 뒤얽혀 만들어내고 있는 아수라장을 보곤 눈을 지긋이 감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