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미로탄.
나이, 오십.
C구역의 동쪽에 살던 사내는 이렇게 살아생전 세상이 여러 번 뒤집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 번째, 어린 시절엔 나라가 망했고.
두 번째, 사십 즈음엔 세상이 망했고.
세 번째. 일 년 전쯤엔 플래그가 무너지고 희망이 박살 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발 딛고 살던 대지가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다.
간신히 자리 잡은 터전은 무너졌으며 살기 위해서는 또 한 번 도망쳐 발버둥 쳐야 한다.
그리하여 기계병기들을 피해 도착한 곳이 이곳.
수도, 로블롭.
그리고 과거 세 번의 난리통 속에서 자신이 깨달았던 것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약할수록 더 강해지고 집요해지며 뭉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잔혹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콰지지직!
"이 섀끼들아! 안 꺼져! 이건 우리꺼라고!"
먹을 것을 실은 연료형 구식 내연기관 트럭을 향해 달려드는 난민 놈들을 향해 미로탄이 거침없이 손에 들린 손도끼를 휘둘렀다.
**
“아아아아악!”
투타타탕!
"..."
은폐된 바이크 위에서 서서히 육지를 향해 다가가던 카르멘이 그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비규환.
수도 근처로 펼쳐진 평야를 가리키는 광경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뇌종, 각지 C구역에서 생존을 위해 모여든 모든 난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과 뒤섞여 싸우고 난리 치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이유는 역시 굳게 닫혀버린 수도의 문.
수도를 둘러싼 성벽의 문은 실로 굳건히 닫힌 채 안과 밖을 구분하며 몰려드는 이들을 한층 더 착실히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앉은 칸헬, 강태석의 표정은 요지부동.
"내리지."
키이잉...
고철들이 쌓인 한쪽, 잘 안 보이는 곳 해변 한켠에 바이크를 가져다 댄 강태석이 위장막을 거두고 그 위로 뛰어내리자 복잡한 표정을 하던 카르멘이 이어 뒤따라 내렸다.
촤르르르륵...
정팔면체 안으로 빨려들어 사라져가는 바이크.
이어 강태석의 주변으로 빙글 떠오른 정팔면체가 자신의 몸을 눕혀 길쭉한 곳을 어느 한쪽으로 가리켰다.
이곳으로 가라는 듯 말이다.
'지하 쪽 같은데.'
조금 아래로 향하는 방향을 지켜보던 강태석이 무너져 내리는 발치의 고철더미들을 피해 한걸음 옮겨선 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카르멘을 향해 외쳤다.
"하고 싶은 대로해. 남고 싶으면 남는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
"그런데 교통정리 가능하겠어?"
강태석이 발치, 너무 눈에 띄는 NO. 111 대신 임시로 쓸 고철 칼 하나를 주워들며 물었다.
카르멘이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어떻게든 바깥 상황을 진정 시켜 봐야 하는가에 대한.
하지만 지금 저 밖에 몰려든 난민들이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각 도시에서 난다긴다하던 유력가들도 있고 야지에서 산적마냥 무력만 믿고 살아오던 무장세력들도 있다.
이런 이들 수십만을 개인의 힘으로 진정시킨다?
다 때려죽이는 게 차라리 더 쉬울 것이다.
지금 수도에서 성문을 열어주고 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
그런 강태석의 말에 고민하던 카르멘이 눈을 감았다 뜬 뒤 강태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저들을 통솔해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는 어찌 보면 카르멘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
현재 이오스는 칸헬의 지위를 만들어 놓기 위해 그 수라장 같은, 적통 파벌의 깊은 곳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자리를 만드는데 더욱 간단한 방법이 있다.
스스로 자신만의 힘을 가진 세력을 지니고 정정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것.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닌 데다 왕실 적통까지 지녔다면 양 파벌 모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도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은 어찌 보면 이를 위한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불가능하지만, 그 흑기사라면 가능할 수도 있으리.
그렇게 되면 칸헬은 실로 위풍당당하게 이들을 끌어모아 굳게 닫힌 저 성문을 당당하게 두드릴 수 있게 된다.
'설마 이것까지 예상하고 여기 오자고 한 건가?'
하지만 강태석은 카르멘의 그런 요구를 간단 깔끔하게 거절했다.
"지금 바빠."
키이잉...
재촉하듯 떨어 울리며 한쪽 방향을 가리키는 정팔면체를 보며 강태석이 몸을 풀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끝의 상황이 크게 여유는 없는 듯 하다.
외계 생명체 녀석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빠르게 가서 정리하는 게 낫다는 뜻.
한데 여기서 흑기사를 불러내 한바탕 난리를 친다?
일단 성공한다고 해도 안정시키는 데까지 걸릴 시간이 한세월이고, 그 과정에서 가까스로 회복해 놓은 흑기사의 마력과 출력이 상당 부분 소모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 정도까지 가면 저 섬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군대가 가만있을 리 없다.
말하자면 페어플레이 위반.
중장갑병기를 들고 설치는 순간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양 파벌의 군대들이 즉각 움직여 이 수상한 난입자를 향해 다짜고짜 포격을 퍼부을 것이다.
그 주변으로 우글거릴 난민들이야 어찌 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하여간 결론은 간단.
키이잉...
"따라올 거면 따라오고. 여기 상황을 어떻게 해보려면 그렇게 하고. 그 정도 능력은 되잖아?"
금속 생명체에 고철 칼을 담갔다 빼며 순식간에 은빛 코팅을 입힌 새 칼로 바꾼 강태석이 카르멘을 향해 말했다.
분명 그 정도의 능력과 백은 있을 것이다.
애초에 특전대가 무력만 가지고 뽑아놓은 곳이 아닐 테니.
하지만 그런 강태석의 말에.
"... 아닙니다. 일단 보좌하지요."
고개를 털어낸 카르멘이 허리춤, 자신의 칼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강태석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
타타타타타탕!
“저리 꺼져!”
티이이잉!
"..."
날아드는 유탄 하나를 칼로 튕겨내 바닥에 처박은 강태석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모닥불, 트럭과 천막들로 만들어진 임시 거주지들.
그 주변으로 먹을 것을 배식받는 허름한 복장의 이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가까스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상자들.
기계병기들에게 베어 물린 날카로운 상처들도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화기나 냉병기에 의해 입은 상처의 흔적들이 많았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그들의 표정 위로 어린 공포와 절박함, 굶주림.
그리고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태어나고 있는 광기.
단언컨대 그렇게 술렁이는 이들 속에서 나름 멀끔한 복장을 하고있는 강태석과 카르멘, 그 둘은 상당히 눈에 띄는 존재들이었다.
설령 이를 알고 대충 감추기 위해 거적때기를 위에 휘둘러 썼다고는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건 카르멘이 대놓고 흉흉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쩌적...
다가가기만 해도 마치 호랑이 대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주변, 나름 냉병기와 화기들로 무장한 난민의 청년병들도 섣불리 거적으로 몸을 휘감은 강태석과 카르멘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못하는 상황.
하지만 그 속에서 걷던 강태석이 이내 카르멘을 향해 말했다.
"그거 기운 거두지."
"안 거두면 일이 더 많아질 겁니다."
반경 20m에 살기를 뿌려대며 걷던 카르멘이 덤덤히 칼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대답했다.
이는 자신들이 아닌, 저들을 향한 조치이자 자비이다.
덤비면 칸헬을 모시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저들을 모조리 벨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카르멘을 향해 강태석이 고개 저었다.
"평소라면 좋지. 하지만 지금 저들이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를 넘어섰다."
후욱...
후우우우욱...
범접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게 하는 아우라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거리를 지키는, 주변의 청년들을 보며 강태석이 말했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 터인데, 거리를 물리거나 기를 꺾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에 버텨내려는 듯 점점 더 눈에는 핏발이 서고 숨이 거칠어진다.
애초에 지금 저들은 몰릴 만큼 몰릴 상황이다.
지킬 이, 목숨, 자원, 희망.
어느 하나 적절한 것이 없다.
평소라면 살기에 스스로를 낮추고 물러섰겠지만, 이미 저들은 바닥 아래서부터 무언가가 뭉치고 뭉쳐 터질 것처럼 몰린 상태.
안 그대로 터질 것 같은 상황에 살기로 드륵드륵 긁으며 지나간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주변을 살핀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기를 거두었다.
스르르륵.
"좋아. 한결 더 낫네. 일단은."
갑작스레 청명해진 주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강태석이 휘적거리며 난민들 사이를 걸었다.
어차피 금속 생명체가 가리키는 목적지가 거의 코앞에 와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조금만 더 지나면 지상을 지나 지하로 진입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
저벅.
저벅.
투타타타타타!
“이 새끼들아! 안 비켜!”
“우아아아악!”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우르르 몰려오는 발걸음에 주변에 모인 이들이 모조리 고개 숙이고 갈라지고 흩어졌다.
그렇게 웅성이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웅크리자 들어온 건 한결 더 황량한 주변 광경.
그리고 그 속,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오십 가량의 무장한 청년병들.
“거기! 너희. 딱 멈춰라.”
대놓고 자신들에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이들.
이를 빤히 보던 카르멘이 강태석을 바라보았다.
"조금 일찍 거둔 것 아닐까요?"
"..."
본인과 자신에 대한 질책이 반반 섞인 그 물음에 강태석이 그 자리에 서서 입맛을 다셨다.
**
투타타타타!
"다들 엎드려 있어! 거기 둘은 꼼짝하지 말고 서 있고!"
하늘에 총화기를 투타타탁 갈긴 미로탄이 주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레일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구세대 화기.
하지만 어디서건 중요한 건 상대평가.
고성능 병기는 물론, 레일건마저 동력원이 흩어지는 이 C구역에서 이런 화기는 일반 난민들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폭력을 부여한다.
물론 이 주변에 만만한 놈들만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녀석들은 이런 구역까지는 오지도 않는다.
“으으...”
바닥에 납작 웅크린 이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미로탄이 이제는 발치, 양탄자마냥 널려있는 그들을 넘어서 넝마를 쓴 두 남녀에게 직진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사방팔방 살기를 뿜어대던 녀석들.
하지만 갑작스레 살기를 거뒀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주변과의 기싸움에서 밀린 녀석들이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는 뜻.
그리고 자신은 그런 먹잇감을 순순히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내줄 만큼 자비로운 성격은 아니다.
가진 것을 털던, 인질로 삼건.
아니면 다른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하건.
눈앞의 범상치 않아 보이는 둘은 필시 자신들에게 노력 이상의 만족을 줄 터.
넝마로도 감출 수 없는, 왼쪽 여성의 훌륭한 몸매를 위아래로 훑으며 미로탄이 흥얼거리던 그때.
“... 어떻게 할까요?”
“그냥 손 좀 보고 가지 뭐. 적당히 해.”
"...?"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둘의 말소리에 미로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내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기에.
'쓴맛을 좀 봐야겠군.'
철컥.
장전한 미로탄이 사내놈의 다리를 겨누고 기분 좋게 두세 발 연달아 갈겨버리려던 그때.
쩌거거걱.
갑작스레 자신의 오른팔에서 들려오는 불쾌한 소음에 미로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
“으아아아아악!”
"아니 적당히 하라니까."
"..."
저 멀리, 오른팔이 잘려 나간 채 울부짖는 사내와 옆에 선 카르멘을 보며 강태석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