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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배 뒤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기척을 감추고 배 한구석으로 올라탄 그라함이 저 멀리, 갑판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배에 워낙 사람들이 많았기에 자신이라도 피곤할 뻔했지만, 쉽게 올라탈 수 있었다.
모두가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으니.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말이 딱 맞군."
갑판에 몰려 육지를 보고 웅성거리는 이들을 보며 그라함이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걱정스럽게, 누군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공통적인 감정은 있었다.
저 난장판 속에 있는 것이 자신들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것.
“정말 다행이야. 우리도 육로로 걸어왔으면 저 꼴이었겠지?”
“끔찍하군....”
“설마 우리도 내리면 저렇게 방치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우리는 ‘그 양반’이랑 왔잖아.”
'그 양반?'
어딘가로 숨어들려던 그라함의 귀가 쫑긋했다.
이 배에 있는 이들 모두가 불안해하면서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으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이들도 결국 배에 떠 있는 피난민 수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 없으며 배에 내리면 결국 육지의 저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텐데 나름 안심한다?
점점 더 외교부장, 칼리만 공의 추측이 맞아떨어질 거 같다는 확신이 들던 그때.
저벅.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군데 우리 청년단 쪽 복도를 서성이지?"
"이런."
좁은 난간 복도 쪽, 갑작스레 마주친 열 명 가량의 사내들을 보며 그라함이 혀를 찼다.
**
저벅.
저벅.
강태석은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옆에서는 금속 생명이 마음 급하다는 듯 끝없이 진동을 떨어 울리며 앞으로 빠르게 재촉했지만, 강태석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지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직 어둠만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단순히 깊은 지하라서 어두운 게 아니다.
강태석이 만들어 놓은 위쪽 구멍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 혹은 강태석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빛.
향상된 감각으로 인해 한 줌의 빛만 있다면 어둠 속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이 동굴, 아니 사실 동굴인지 뭔지도 모르겠는 공간을 가득 차지한 어둠은 모든 종류의 빛을 살라먹고 빨아들여 한치의 시야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대충 이유야 알 수 있었지만.
키이잉...
강태석이 검기를 피워 올려 푸른 빛을 뿜어내자마자 사방을 비추려던 푸른 빛이 그대로 어둠에 살라먹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블랙홀로 빠져들어 가는 빛줄기처럼 말이다.
아마도 이 너머에 그 존재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곳의 빛뿐 아니라 C구역 전역의 에너지를 빨아먹고 있는 정체불명의 외계 존재가.
녀석을 해치우고 금속 생명이 먹어 삼키면 일단의 목적을 완수할 터.
물론 쉽지는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고오오오...
자신의 아늑한 보금자리에 구멍이 난 것을 깨달은 건지 어둠이 불쾌하다는 듯 꿈틀거리며 새어 들어오는 빛을 쫓아 위로, 더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색채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먹어 치워 없애버리겠다는 듯 말이다.
스스스슥...
서서히 자신이 뚫고 내려온 입구를 검게 물들여가며 타고 오르는 어둠을 본 강태석이 시각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감각에 의존한 채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향했다.
**
지상.
콰드드드득!
“커어어억...”
"이쪽으로."
두 사내를 베어낸 카르멘이 트럭 안쪽에 숨어있던 두 소녀를 향해 손짓했다.
이미 카르멘의 뒤쪽에는 난리통속에 구해진 제법 많은 이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
피투성이가 된 카르멘의 얼굴에 두 소녀가 멈칫했지만 이내 뒤쪽에 몰린 이들을 보고 조심스레 트럭 안에서 기어 나와 내민 손을 잡고 내려 그들 뒤에 섰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굳은 눈으로 바라보던 카르멘이 고개를 돌려 이제는 전장마냥 변해버린 수도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때, 예전의 기억과 똑같다.
인류가 멸망하던 시절, 규범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버리던 그때와.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화가 나 있는 걸 수도.
나약하던 그때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 비슷했으니.
그리고 더 나아가 그때마냥 상황에 손쓸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가장 열 받았고.
"..."
'이건 지금 내 힘으로는 답이 없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주변을 보며 카르멘이 칼을 까득 쥐었다.
지금 혼자 칼 좀 쓴다고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방 수 킬로미터에서 학살과 폭력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
안에 있다면 자신이 가용 가능한 병력이라도 끌고 나왔겠지만 이미 로블롭의 성벽은 열릴 생각조차 않는 상황.
투타타타...
“우아아아아악!”
성격 급한 몇몇이 문을 열라고 시위라도 하려는 듯 다가가 총질을 해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 위에서 쏟아 부어지는 몇십 배의 화력에 갈려 나가고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쳐야 할 뿐이었다.
자신이라도 지금 성문 쪽으로 가면 똑같은 꼴이 될 터.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자신은 그저 이 태풍 같은 상황 속, 간신히 버텨내는 낙엽마냥 자신의 손안에 닿는 몇몇만을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대의에는 전혀 상관없이, 과거 자신을 극복하는 자기만족이자 위안 수준의 목적으로.
하지만 그 속에서도 카르멘의 머리는 강렬하게 의아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너무 급격해. 이게 말이 되나?'
인간의 광기는 모두 생존 본능으로부터 나온다.
바꿔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떤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다는 뜻.
한데 지금의 광기는 너무나 불길처럼 빠르게 번져 올라 순식간에 온 수도 주변을 뒤덮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를 원했던 것처럼.
"저번 도시의 사건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도시의 주인, 빈마흔이 모조리 학살당하고 적통과 신흥 파벌 간의 오해를 불러올 뻔한 사건.
저번 항구도시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카르멘이 중얼거린 순간.
"앗."
"?"
"언니. 저기... 성문이 열려요."
"!"
쿠르르릉...
갑작스레. 저 멀리서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에 카르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동쪽 제13 성문.
“성문이... 성문이 열린다!”
“그쪽 방위군 놈들은 뭐 하는 거야!”
건설 로봇에 의해 지어진 성벽 안.
그 안쪽에 살고 있던 이들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굳건히 자신들을 지켜주던 성벽의 문이 열리고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졌기에.
그리고 그런 성문 한켠, 비상 컨트롤타워.
“끄으으윽...”
푸욱.
신음을 토해내는 호위병을 베어버린 사내 하나가 컨트롤타워 안에서 서서히 열리는 성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 녀석들은 평온하고 바깥에서만 난리가 벌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소주께서는 이곳, 뇌종 모든 전력의 착실한 약화를 원했다.
모여든 중립 세력이고, 신흥 파벌이고, 적통 파벌이고 구분 없이.
수도 안의 양대 세력만 멀쩡해서야 되겠는가?
셋 다 구분 없이 치고 받아줘야 한다.
안쪽에서 자신의 일은 끝냈으니, 이제 바깥에서 활동하는 녀석들이 적당히 마무리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아아아아아! 성문이 열렸다!”
“안으로! 안으로 내달려라!”
"당분간 나는 좀 쉬어도... 되겠지."
숨어드느라 제법 귀찮았다.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하는 바깥의 난민들을 본 사내가 길게 하품을 하며 피바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
지하.
철그럭.
철컥.
어둠 속, 강태석이 온 감각에 의존한 채 발을 내디뎠다.
보이진 않지만, 청각은 생생하다.
그렇기에 강태석은 발치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을 비롯해 온 주변이 모조리 지상과 같은 고철더미라는 것을.
정확히 말하면 지상부에서부터 시작하여 관통하는 통로, 그리고 지금 이곳과 주변까지.
그 말은 지금 수도 자체가 이 고철더미 위에 서 있다는 말이 된다.
"6층에 이런 지대가 있었나?"
철그럭...
어둠 속 적막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강태석이 중얼거리며 걸었다.
배를 타고 뇌종의 구역으로 향하면서부터 생겨났던 의문.
A구역, 이종들이 살아가는 지역이나 G구역, 거대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곳은 제법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둘은 6층 내에서도 제법 인상적이었고 볼거리도 많았으니까.
한데 고철더미가 쌓여 만들어진 지대라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애시당초 이 6층은 관광지대.
이런 지대가 존재할 이유도 없거니와 만들 이유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고철 처리장의 용도 정도겠지만 그걸 굳이 6층에 만들어놓을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자신의 기억에 분명 이 지역쯤에 자리 잡고 있던 건...
파지지지지직!
"잡생각 할 때는 아니라 이거지."
강태석이 어둠 너머, 박동하듯 느껴지는 감정에 정신을 차렸다.
보이진 않지만 선명하게 느껴진다.
안락한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입한 상대에 대한 분노와 불쾌함, 적의가.
원래 퀘스트대로라면 치고받아야 할 터.
하지만 강태석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키리리리링!
키리링....
거의 도착하자마자 기이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정팔면체, 금속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강태석이 으쓱했다.
보아하니 이 녀석과 저 너머의 생명체의 관계가 명확해 보였다.
포식자와 피식자.
정복자와 약자.
강태석이 금방이라도 날뛸 것 같아 보이는 금속 생명과의 링크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준 순간.
촤촤촤촤촤촤촥!
키리리리리리리리릭!
어둠 속.
대체 어떻게 변했을지 짐작조차 안 가는 금속 생명이 미친 듯이 스스로를 확장 시켜가며 어둠 너머, 정체불명의 외계 존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지상.
"하나... 둘... 서이. 다들 잘도 달려들어 가네."
살길이 열렸다 싶은지 우르르 성문 쪽으로 몰려 들어 가는 수천 명의 생존자들을 보며 한 사내가 웃었다.
보아하니 안쪽에서 잘 해낸 모양.
사격이 퍼부어질 법도 한데 아까 전보다 훨씬 화력이 줄어든 걸 보니 성문 쪽 군인 녀석들도 들어간 놈이 잘 정리한 것 같았다.
하여간 저쪽으로 시선이 상당히 쏠렸으니 이번엔 이쪽 차례.
"움직이자고."
"... 정말 이게 되는 거겠지?"
철썩!
난리통과 조금 떨어진 해안가.
정박한 수십 척의 작은 배들 위에 올라탄 수백 명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묻는 중년 여인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고 별수도 없어. 너도 알잖아. 군대가 필요하다는 걸."
"..."
사내의 말에 중년 여인이 침음을 삼켰다.
도시가 무너지는 와중 만난 사내.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도시를 벗어나는 걸 돕고 자신과 호위 세력들을 이곳까지 도착하게 해주었지만, 사상이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살다 살다 군대 일부를 탈취하자는 제안을 듣게 될 줄이야!
철썩...
바다 건너, 난리통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롯이 떠 있는 금속의 섬들과 그 위의 군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인을 향해 사내가 혀를 찼다.
"지금 아직 정신 못 차린 거 같은데, 지금 기회 놓치면 끝이야. 저 난리통이 수도에서 힘이 없어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군대 나서면 그냥 싹 다 정리된다고. 난민이고 댁들이고."
"..."
그 말에 중년 여인이 눈을 감았다.
맞는 말이다.
사실 자신들이 무력 좀 있다고 자신과 난민들을 다르게 놓고 있지만 양대 파벌 입장에서 보면 그냥 다 똑같을 뿐이다.
눈에 거슬리고, 밟으려는 순간 즉시 밟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꼴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난전에서 스스로의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내의 말대로, 군병기의 일부를 탈취해서라도.
"가지."
"그럼 그럼. 좋은 생각이야."
잠시 후.
끼이이익...
끼익...
작은 배들에 올라탄 수백 명의 이들이 은밀하게 어둠이 서린 바다를 지나 금속의 섬으로 향했다.
**
다시 지하.
"아니 이런 뭔..."
기운차게 달려들어 놓고선 무슨!
키리리리리리릭!
!!!!!!!!!
저 너머.
어둠 속에서 상대에게 대차게 밀리고 있는 금속 생명체에 강태석이 NO. 111을 뽑아 들고 달려들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