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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리릭...
금속 생명체가 어둠 너머의 존재에게 차츰 밀리는 것이 느껴진다.
콰드득..
“후우우욱!”
터어어어어어엉!
NO. 111을 뽑아 들어 어둠 속, 적의 갈래 중 하나를 휘둘러 가른 강태석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에 혀를 찼다.
상성상 분명 금속 생명체가 우위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 있게 이곳,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자신을 안내했을 터이고.
하지만 금속 생명은 오랜 공복으로 유아마냥 약해져 있던 반면,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외계 생명체는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에너지를 흡수하며 강대해졌다.
그게 지금 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
"결국 몸을 써야 하잖아."
콰아아아앙!
어둠 속, 홀로 칼춤을 추듯, 빛마저 끌어 삼키는 상대에게 칼을 휘둘러가며 강태석이 혀를 찼다.
**
해안가, 800m.
금속의 섬.
철썩.
스으윽...
바다 속을 헤엄쳐 가로질러온 이들이 스윽 머리를 내민 채 금속의 섬 아래켠을 잡고 위로 조심스레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면검기 정도는 사용이 가능한 정예들.
배를 타고 오다 아무래도 걸릴지도 몰라 배를 버리고 바닷속을 헤엄쳐 이곳까지 온 것.
조류도 거세고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게 문제 될 수준의 이들은 이 특공대에 아무도 없었다.
이들을 이끄는 중년 여인도 마찬가지고.
화르륵...
자신의 몸에 묻은 물을 열기로 말려버린 중년 여인이 앞장서 금속섬을 타고 오르다 옆, 배신하지 않고 따라온 사내를 보고 이채를 띄었다.
솔직히 중간에 도망칠 줄 알고 큰 기대 안 했는데 이곳까지 따라온 것.
'야심이 있나? 야인인 줄 알았는데.'
중년 여인이 사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을 돕는 와중에도 숫제 자유로워 보이길래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가 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중년 여인 입장에서도 그게 더 안심이었고.
자유를 원하는 이에게 중년 여인이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야욕을 원한다면 줄 수 있는 게 제법 많았다.
돈, 명예, 지위, 그리고 여인까지도.
"혹시 아직 몸담은 곳이 없으면 이 기회에 내 아래로 오는 게 어때? 잘 대해줄 테니."
"이 타이밍에?"
"이 타이밍이니 말하는 거지."
금속섬을 거진 다 타고 올라가던 타이밍.
갑작스런 중년 여인의 제안에 멈칫한 사내가 이내 씨익 웃었다.
"일단 이번 일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일이 틀어져서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
말을 돌리는 사내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내 중년 여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 올라갔다.
사내의 말대로 일단은 이곳의 일 처리를 잘 해내는 게 중요하다.
D-113.
끼이익...
금속 섬을 타고 오른 중년 여인이 머리만 빼꼼 내민 채 이 구역의 이름을 되뇌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무 생각 없이 온 게 아니다.
이곳은 신흥 파벌 측에서도 수도의 비상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중장갑 부대들이 대기하는 곳.
지금쯤 난리가 난 육지 상황에 비상이 걸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온 신경이 그곳에 가 있을 것이다.
성문이 열려 신흥 파벌 측이 직접적으로 휘말리게 되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말하자면 그 혼란스러운 틈을 노리는 게 핵심.
"파일럿들은 최대한 인질로 잡고. 지휘관들은 모조리 살해해야 한다."
중년 여인의 말에 뒤따르는 이들이 찰싹 섬의 벽에 몸을 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당연히 자체 방위군과 검기 사용자들 역시 이곳에 드글드글하니까.
하지만 해내야 하는 상황.
그런 이들을 향해 사내의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앞장서지."
촤르륵...
뱀과 같은 세 갈래 검기를 칼에 휘두르며 나서는 사내의 여유로운 태도에 중년 여인이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자신들의 등장에 놀란 이들의 얼굴이 코앞.
“무슨... 침입... 커헉!”
“컥!”
파파파팍!
파팍!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가르고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뱀 모양의 검기에 목이 잘려 나가는 세 보초병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중년 여인이 옆, 흥얼거리며 다시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신날 수 있지? 세상이 이런데?"
그런 여인의 말에.
"간단하지. 비전이 있고 희망이 있거든. 꿈은 중요한 법이니까."
"...?"
알 수 없는 사내의 대답에 중년 여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
G구역, 연구시설단지.
키이이이잉...
쿠르르르릉...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려내듯.
지상으로부터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한 무언가가 서서히 그 형체를 현실에 드러내 갔다.
테두리부터 시작하여 외벽, 이어 꼼꼼히 차오르는 색채들까지.
잠시 후.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앗!”
완성된 드높은 탑.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여파를 느끼며 주변에서 구경하던 모든 이들이 놀람 섞인 외침을 터트려냈다.
단순히 탑이 마법처럼 생겨난 게 신기했던 게 아니다.
모두가 나름 산전수전 겪은 이들이니만큼 그 탑으로 인해 생겨난 자신의 몸속 변화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쿠르르릉...
"진짜다. 진짜 <벽>이 사라졌어."
아래서 탑을 올려다보던 더그가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저주와 같이 자신을 가로막던 정체불명의 장벽.
한때는 동일 선상에 서 있던 자신과 군파츠, 아린 등과 이제는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내던 천형과도 같은 저주가 풀려나가는 게 느껴진다.
푸른 탑이 완성되며 뿌려낸 푸른 파장.
그 안에 서 있자 마치 비비 꼬여 있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풀려나가는 느낌이다.
완성되지 못할 운명이었던 자신의 유전자에 푸른 권역에 흘러넘치는 입자들이 결합하여 완전히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실로 어마어마한 변화라는 걸.
이제 이곳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 모두에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한계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면 이 콜로니 내부의 판도가 어떻게 바뀔까?
수만 명의 검기 사용자들로 이루어진 제국.
아마 단번에 내부 전체를 휩쓸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말이다.
그때.
"어떤가?"
"엄청... 엄청나군요."
호위병 몇과 함께 걸어온 아너스빌을 보며 더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카트란 녀석이야 자신에게 반말을 하건 무얼 하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너스빌과 그 호위들은 달랐다.
이제 덩치가 커지고 체계가 생길 테니 그에 마땅한 권위가 필요하다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더그 역시 조직을 이끌어본 입장이었으니 어느 정도 이에 공감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끔씩은 예전, 나름 편안하던 그때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내긴 힘들었지만 말이다.
'아냐. 이제 죽은 놈 그리워해서 뭐 해.'
고개를 작게 붕붕 흔들어버리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떤 녀석에 대한 기억을 떨쳐내던 더그를 향해 아너스빌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생각이 많나 보지? 갑자기 고개를 흔들고."
"아... 그... 그냥 다른 세력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혹여 이때 쳐들어오면 어쩌나 해서."
새로운 권력자 앞에서 옛 세대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다.
솔직히 말하는 대신 적당히, 하지만 정말로 걱정되기는 하는 바를 말한 더그의 말에 아너스빌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쪽 일은 또 따로 편성된 조직들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네는 자네가 맡은 일만 충실히 해주면 돼."
"... 알겠습니다."
저벅.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는 아너스빌의 뒷모습을 더그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느덧 자신은 그 윤곽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 세력과 조직들.
아린과 카티, 달리안 등도 각자의 역할을 위해 뿔뿔이 찢겨 흩어졌고 새로 생겨나는 조직과 편제, 인원들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많고 빨랐다.
자신은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만 충실할 뿐.
감찰 대장.
혹여 이 무리 안에 싹을 키워내고 있을 불순한 분자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보고하는 것.
"..."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까?
탑이 자라나고 세력이 자라나지만, 그 바닥이 보이지 않기에 마냥 껄끄럽기만 했다.
목숨 걸고 싸우던 예전이 오히려 마음으로는 편했을 지경.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 기우다. 몸담은 데가 커지면 좋지.'
고개를 휘휘 저은 더그가 이내 탑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
지하.
콰아아아아앙...!
"아 녀석. 진짜 애먹이네."
키이이잉...
어느새 서서히 걷혀 가기 시작하는 어둠.
그 속에서 강태석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숨을 후 내쉬었다.
걱정과 달리 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빨아먹은 에너지에 비해 외계 생명체의 전투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반면 금속 생명체는 포식자라는 위명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맹렬하게 외계 생명체를 몰아붙였기 때문.
말하자면 쓸데없이 크게 자란 해파리와 작은 상어의 느낌?
초창기에는 지닌 에너지 차이가 너무 커서 밀렸지만 도와주기 시작하자 금방 사태를 역전하여 맹렬히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눈앞의 결론.
우걱...
우드드드드득...
마치 요동치는 물풍선마냥 크게 자라난 은빛의 금속 생명이 자신의 몸 안에서 발버둥 치는 무언가를 소화 시키듯 착실히 압착하며 반항을 제압하고 있었다.
문어가 집어삼킨 생명체를 으깨고 삼키듯.
사뭇 기괴한 모습과 형태를 보이며 말이다.
'하여간 외계 생명체란 것들은 왜 이런지.'
거의 잡아 먹히기 직전, 빛이 조금 드러나며 보였던 상대 생명체의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떠올리던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 설명하려고 해도 도무지 설명하기 힘들었기에.
하긴 애초에 지구상의 단어들은 오직 지구상의 존재들 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면 저것들은 말 그대로, 우주의 존재들이고.
아마 우주 시대였다면 저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적합한 단어들이 또 만들어져 있겠지만 지금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닌 상황.
하여간 녀석의 외양과는 상관없이 퀘스트는 훌륭하게 마무리되었다.
띠링!
<퀘스트 : ‘검은 태양’을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금속 생명은 이미 당신의 기체, 흑기사를 자신의 모체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외계 존재를 삼킨 금속 생명은, 그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당신의 기체를 훌륭히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시킬 것입니다.>
<지하에서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던 외계 생명체가 스러졌습니다. <팩토리-야전 타입>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던 외계 생명체가 사라지자 서서히 주변의 광경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철, 고철, 고철.
온갖 쓸데없는 잡동사니들로 그득 찬 것 같은 넓고 광대한 공간.
더불어 떠오른 문구.
이를 본 순간 강태석의 머릿속, 의아하던 모든 것들이 풀렸다.
왜 이곳이 고철로 그득했는지.
"팩토리가 오작동하고 있었구나."
쿠르르릉...
쿵쾅쿵쾅쿵쾅!
고철더미가 무너지며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불쑥불쑥 생산되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장난감, 칼, 바이크, 건축자재.
그야말로 공통점 없이, 난잡하게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변 고철들과 다르게 온전히 새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본 강태석이 온전한 기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C구역의 원래 이름, <공업지대>.
콰르르르르르릉!
깊은 곳, 주체할 수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토해내기 시작하는 문명의 흔적을 향해 강태석이 한 발 더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