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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76화 (17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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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전.

탈리만공의 저택.

"... 그게 사실이었다고? 정말로 왕가 적통이 나타났다는 게?"

"네. 배에서 들은 정보로 인하면 그랬습니다."

그라함이 자신의 손을 한 번 더 흘끔 내려보며 공손히 대답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손의 피를 닦기는 했는데 혹여 묻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대단히 온건적으로 해결했다.

자신의 임무 상 이제까지 상대를 입막음하지 않고 몇 대 줘패가며 이야기를 듣는 수준에서 끝난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만큼 자신도 어느 정도 이번 일에 대한 후폭풍을 생각하고 신중히 움직였다는 이야기.

"..."

그라함의 보고에 턱을 매만지던 탈리만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나 무능하다거나 그러진 않고? 그저 적통 파벌 측이 명분으로 삼을 수준으로?"

탈리만이 궁금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적통이라고 하더라도 그 후계 본인이 유능하느냐 무능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저 바깥쪽, 칠국연합의 루한공국처럼.

귀족가의 후계라는 이름 하나로 온갖 이들을 끌어모았지만, 정작 본인은 실권하나 쥐지 못하는 루한공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탈리만의 말에 그라함이 고개를 저었다.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흡사 칸헬 건국대제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하는군요. 혼자 도시를 지키는 기계병기들을 유인해 모조리 쓸어버리고, 거기 있는 생존자들을 몽땅 구해냈답니다. 물론 혼란스런 와중에 일개 민초들이 하는 이야기니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흐음."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라함이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탈리만 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안 그래도 자신들, 신흥 파벌 들은 현재 적통 파벌 측에 비해 다소 밀리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던 경쟁 우위적 요소였던, 다른 11권세와의 교류들이 콜로니 분위기가 격해지며 모조리 끊어졌기 때문.

현재 자신들의 대지만 해도 난데없는 기계병기들의 습격으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심지어 연락이 끊기기 전 이야기를 들어보니 A구역, 스피어측은 웬 괴상한 전염병과 시체들의 준동으로 자신들 이상의 난리가 벌어졌단다.

즉 고립무원의 사태.

한데 안 그래도 중립 세력들을 끌어모아야 할 상황에 상대측에 적통 파벌의 정통 후계까지 등장했다?

그것도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당히 유능한?

단번에 분위기가 저쪽으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군대까지 동원해 결판을 내야 하는, 궁지의 상황까지 몰릴 수도.

꾸득.

"제거할까요?"

그라함이 자신의 손가락을 꾸득 움켜쥐며 생각에 잠긴 탈리만 공을 향해 물었다.

고래로 왕들의 가장 큰 적은 다른 왕이 아닌 암살.

아무리 난다긴다해도 방심한 틈을 타서 치고 들어오는 칼날에는 방법이 없다.

심지어 이런 난장판 속, 아직 이렇다 할 기반이나 호위조차 없는 왕이라면 더더욱.

어찌 보면 기회는 그자가 아직 적통 파벌 측에 인정받지 못하고 저 멀리 어딘가 벌판을 떠돌고 있을 지금뿐이다.

청년단들을 통해 상세히 전해 들은 그자의 인상착의를 떠올리며 그라함이 각오를 다지던 그때.

"아니. 아니다. 그건 지금 하수에 불과하지. 그럴 여유가 없기도 하고."

쿠궁...

쿠구구궁...

저 바깥쪽, 탈리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난리가 난 금속의 섬 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어찌 보면 지금 새로 나타난 적통 후계보다도 더욱 중요한 녀석들.

그라함이 이끄는 암무대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뇌종 구역의 전역에서 수상한 놈들의 행적이 보고되고 있다.

때로는 도시를 약탈하고 지금은 수도의 바깥에서 학살과 광기를 유도하고 있으며 방금 전엔 성문을 열고 이내 기어이 자신들 측이 보유한 금속섬의 하나까지 먹어 치운 녀석들을.

중립 세력이나 적통 파벌 측의 일가들이 각자의 욕심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하나같이 이 녀석들의 목적이 일치해 보인다.

현재 자신들, 뇌종의 분열과 상잔을 원하고 있다는 것.

이는 외교부장으로서 국내 각 파벌, 다른 11군세, 심지어 콜로니 밖의 칠국연합까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탈리만으로서도 처음 보는 부류들이었다.

대체 이런 녀석들이 어디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설마 아래층 범죄자 놈들? 설마 그놈들에게 이 정도의 일사불란함이 있을 리가.'

범죄자 놈들은 범죄자일 뿐.

지금 이 녀석들은 뇌종 전역을 활동 범위에 넣은 채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강력한 주인을 머리에 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주제에 흩어지고 숨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실로 피곤했는데 지금 기회가 왔다.

제 놈들이 스스로 우르르 금속섬 안으로 모여들어 주는 기회가 말이다.

창밖, 빼앗긴 자신 측의 금속섬을 보고서도 되려 차갑게 웃은 탈리만이 그라함을 향해 말했다.

"그라함. 지금 즉시 가서 새로운 적통 후계 측을 만나봐라. 아마 호위를 맡은 특전대들을 잘 살피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테지. 단 목적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다."

"반대라 함은..."

대상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암살의 가장 첫걸음이 목표 대상의 자취를 찾아내는 거니까.

하지만 목적이 정 반대라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라함을 향해 탈리만이 웃었다.

"우리 신흥 파벌 쪽이 힘을 실어주겠다는 말을 전하라 이거다."

단 그 자격을 증명했을 때만.

쿠르르릉...

여전히 위협적으로 자신들과 대립하듯 떨어 울리는 금속섬을 보며 탈리만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

그리고 현재.

"..."

호위대가 임시로 친 천막 안 한켠에 우뚝 선 카르멘이 실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칸헬, 그 너머 마주 보고 선 청년을 노려보았다.

아주 유명한 놈이다.

탈리만 공의 제 1 수족이자 충실한 개.

암무대장, 그라함.

자존심 상하지만 그 실력은 자신보다 명백히 몇 수 위.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그라함이 칸헬을 습격하려 든다 해도 자신은 막아낼 자신이 없다.

지금 자신의 곁에 선 네 명의 특전대들이 함께한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그라함의 표정 역시 좋진 않았다.

어찌 보면 혈혈단신, 자신을 노출한 채 적진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니.

암무대의 역할에 정반대되는 상황.

다만 이 속에서 홀로 여유로운 건 칸헬, 강태석뿐.

오물.

말린 건포도를 하나 끄집어내 씹은 강태석이 그라함을 향해 물었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강태석이 약간의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그라함을 바라보았다.

사실 카르멘의 의견대로 이 접견은 굳이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없긴 하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온 상대는 생각보다 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예를 들어 암살이라던가.

하지만 강태석은 굳이 일부러 받아들였다.

지금 딱히 할 일도 없긴 했거니와...

'이제 당할 것 같지도 않고.'

쿠르르르릉...

거칠게 휘몰아치는 내면의 마력을 느끼던 강태석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라함이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탈리만공께서는 일단 적통 후계이신 칸헬께..."

"서론은 좀 자르고. 본론부터. 원하는 게 뭔지."

"..."

"지금 시간이 금일 거 아냐."

콰르르릉...

천막 밖, 강태석이 아까 전부터 위협적으로 소음을 뿜어내고 있는 금속의 섬을 가리켰다.

점령당한 순간부터 마치 괴물이 거칠게 숨을 내쉬듯 강렬한 진동과 수상한 소음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강철덩어리.

지금 저 안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라도 시간을 주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은 자명했다.

특히 상황이 좋지 않은 신흥 파벌 측은 더더욱.

"... 알겠습니다. 본론부터 말하지요. 저희 쪽의 제안은 간단합니다. 지금 칸헬을 인정하고 힘을 어느 정도 실어드리고 싶다는 거지요. 원하신다면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는 중립 세력의 안정화나 통합 같은 작업을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지위는 온전히 칸헬께서 가져가실 거구요."

"!!"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카르멘이 오히려 당황했다.

실로 좋은 조건.

신흥 파벌은 칸헬을 암살하고 싶을 정도로 위협적으로 느껴야 정상이다.

안 그래도 기운 힘의 균형추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으니.

한데 힘을 실어주는 것도 모자라 지금 평원에 모인 이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세력까지 만들어주겠다고?

들어가는 노력과 물자를 생각한다면 이는 신흥 파벌 측에서도 제법 큰 출혈을 감수하고 투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카르멘과 달리 강태석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좀 키워줄 테니까 그거 가지고 적통 측이랑 대립각 세워서 좀 투닥거려 보라고? 가서 괴뢰 인형 노릇 하지 말고?"

"..."

"하여간 뭐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지. 한데 조건이 뭔데?"

강태석이 하품을 하며 그라함에게 물었다.

자신은 거래를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어느 게 더 귀찮냐, 귀찮지 않느냐 정도를 구분할 뿐.

게임 초창기 같았으면 뭐가 더 득실일지를 따졌겠지만 이미 그 선은 지났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할 뿐.

그리고 신흥 파벌이 자신을 돕겠다는 말은 분명 나쁘지 않다.

이쪽의 손을 붙잡으면 적통 파벌 측도 마음이 다급해지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문제는 이렇게 달콤한 조건을 그냥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

아무리 윈윈이라고 해도 말이다.

"..."

그런 강태석의 태도에 그라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끈 떨어진 연 신세인 저자가 자신들보다 더 다급해야 할 상황인데 여유를 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것도 자신이 탈리만 공을 직접 대리하여 나온 지금 상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대화가 잘 풀리는 건 좋은 일, 멍청한 것보다는 눈치가 빠른 게 낫다.

후욱.

숨을 내쉰 그라함이 강태석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네가 과연 이걸 듣고서도 태연할 수 있겠냐는 듯,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간단합니다. 저희 신흥 파벌 측도 투자해야 할 근거가 보여야 하니까요. 왕의 능력을 이곳, 수도 안에 있는 모두와 난민들에게 보여주시면 됩니다. 강렬하게요."

이에 강태석이 숨을 푸 내쉬었다.

뭘 그리 본론을 안 꺼내고 빙빙 돌려 말하는지.

'처맞아야 제대로 말하려나.'

하지만 속마음과 별개로 그라함이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사방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만한 미션, 혹은 업적이 뭐가 있겠는가?

오로지 단 하나.

"그러니까 저 금속섬을 점거한 놈들을 어떻게 해보라 이거지?"

"그러면 더할 나위 없겠군요. 지금 저 폭도들이 온 사방을 불안에 몰아넣고 있으니까요."

저 바깥.

점점 더 커다란 소리를 토해내며 수도 전체를 불안감에 몰아넣고 있는 군함과도 같은 금속섬을 보며 그라함이 웃었다.

**

쿠르르릉...!

'어쩔 거냐.'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굉음 속, 그라함이 무표정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득의양양한 속내를 감춘 채 말이다.

어찌 되었건 녀석들은 금속섬을 점거한 상황.

이를 해결하려면 그 위, 빼앗긴 군대조차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멋대로 작동해 적통 파벌을 공격한 터렛 타워가 녀석들이 단순 점거가 아닌, 실질적인 군대의 제어권조차 손에 넣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 말은?

절대로 일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의미.

즉 이 과정은 길들이기일 뿐이다.

자신들이 기꺼이 한발 나서 도와주고 키워줄 테니 앞으로도 말을 잘 들으라는.

하지만 그라함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이어 내뱉기도 전.

"갔다 오지 뭐."

"??"

"기다려."

"??????"

엉덩이를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태석의 모습에 그라함의 무표정이 꿈틀거리며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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