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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릉...
두텁게 둘러싸인 푸른빛의 방벽.
강태석이 다시 한번 금속섬을 둘러싼 구체를 바라보았다.
저건 군용병기로 만들어진 쉴드.
그렇기에 마울러나 터렛같은 고화력병기로 두들겨대야만 뚫을 수가 있다.
한데 지금 옆의 녀석, 금속 생명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그런 강태석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촤르르르륵...
금속 생명체가 강태석의 손끝으로 와서 붙더니 스스로의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강태석이 한정적으로 허용한 여의의 권한을 끌어다 써, 나노머신을 집어삼키며, 자신의 내부 유기지성에 저장된 온갖 정보들을 바탕으로 내부에 삼킨 외계 생명체의 에너지 코어를 주축으로 삼았다.
주르르륵...
쿠르르르릉...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한 정팔면체는 강태석의 손끝과 바닥에 붙어 점점 더 기괴하게 변해가더니, 이윽고 꾸물거리며 형체를 고정하기 시작했다.
높이 7m, 길이 25m.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된 유려한 형체의 포신.
키이이이잉...
손끝, 순식간에 만들어진 정체불명 문명의 형태로 변한 포대를 통해 강태석의 머릿속으로 온갖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지만, 권한을 가진 이로써 강태석은 순식간에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옆의 병기가 묻고 있는 것은 하나.
<파괴하고 싶은 대상은?>
"어허."
강태석이 턱을 매만지며 건너편의 섬을 바라보았다.
**
금속섬, 중앙 통제실.
쿠르르릉...
"다 제압한 거 맞아?"
"몇 놈 시범 삼아 목을 날렸으니 반항하진 못하겠지. 그리고 이놈들도 어차피 한배라고."
안에 모인 열일곱의 남녀들.
그중 한 여인이 손끝에 뱀 문양의 타투를 허공에 빙글빙글 그려내며 웃었다.
종속의 문양.
목에 감긴 이 뱀은 주인이 원하는 즉시 상대의 경동맥을 타고 들어 피시술자의 심장을 집어삼킨다.
아직 약해서 백여 개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하지만, 주요 지휘관들에게 감는 것 정도는 충분했다.
"흐음."
그런 여인을 보며 턱을 매만진, 이곳에 자리를 마련했던 사내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제어실 창밖, 금속섬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섬 주변을 둘러싼 푸른 장벽, 그 너머로 보이는 대지와 다른 금속섬들.
장벽과 이 섬의 군대가 일시적으로 지켜주고 있지만, 오래 가진 못할 것이다.
뇌종이란 녀석들이 적당히 정신 차려 몰려오기 전에 볼일을 끝내야 한다.
"군대만 안 오면 뚫릴 일 없으니까. 다들 적당히 끝마치고 서두르자고."
사내의 말에 주변에 서 있던 남녀들이 여유로이 누군가는 담배를, 누군가는 뭔가를 질겅거리며 수긍의 의사를 표하던 그때.
"그런데 저기 저놈은 뭔데."
"?"
바닷가를 바라보던 동료 하나의 말에 고개를 돌린 사내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다 건너.
웬 놈 하나가 육지 쪽에 선 채 자신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어딘가에서 본 거 같기도 한 얼굴.
하지만 한 놈이 홀로 뭘하랴 싶어 사내가 무시하려던 순간.
촤르르륵...
"!"
갑자기 사내의 옆에서 마법처럼 뻗어 나와 완성된 기묘한 포대에 사내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쉴드를 믿고 무시하기에는 자신의 생존 본능이 맹렬하게 경종을 울린다.
마치 커다란 대포에 정면으로 노출된 듯한 느낌.
"뭐라도 잡아!"
"?"
사내가 버럭 소리를 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섬을 통째로 후려쳐버리는 거대한 진동에 안에 서 있던 이들이 우당탕 나뒹굴었다.
**
쿠르르릉...
슈우우우욱...
"와우. 좋네."
시퍼런 빛줄기를 뿜어낸 뒤 포대 전체에서 뿌연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은빛 유선형의 병기를 보며 강태석이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단 한발.
한발을 쐈을 뿐인데 어찌나 그 위력이 강력했던지 병기 전체를 구성하고 있던 여의의 나노머신들이 모조리 과부하가 걸려 자르륵 진동하며 간신히 제 형체만을 부여잡고 있었다.
금속 생명이 구현해낸 기술과 에너지를 버텨내기에 지금 강태석이 다룰 수 있는 분량의 나노머신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쏠 수가 없다.
하지만 더이상 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한발로 충분했으니.
키이이이잉..
키잉....
마치 공간이 어그러지고 왜곡되듯, 바다 건너 섬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장막이 사정없이 찢기고 일그러져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안에 감싸인 섬조차 흔들리고 휘몰아치는 격랑이 사정없이 그 위를 덮쳐댄다.
단 한발로 성벽마냥 섬을 지키던 쉴드가 박살이 난 것.
물론 완전한 건 아니다.
일그러지고 찢겨진 푸른 장막들이 마치 물결치듯 스스로 움직이며 원래 제 형태를 서서히 복구해가고 있었으니까.
쉴드를 박살 낼 정도의 위력은 있었지만, 그 안의 장막병기들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금속섬을 박살 낼 정도의 타격은 가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재차 복구되는 것.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촤르르르륵...
강태석이 의지를 일으켜 올린 순간, 오른손의 끝에서 자라나 있던 거대한 포대가 마치 뒤집어지듯 강태석의 손을 타고 역행하며 그대로 강태석의 전신을 뒤집어 덮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은빛의 반죽 덩어리가 통째로 집어삼키듯.
그렇게 강태석의 전신을 통째로 삼킨 은빛 덩어리가 순식간에 꾸물거리며 포대와는 다른 형태의 유려한 형태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좀 더 두텁게, 좀 더 특이하게.
이윽고.
콰아아아아아아앙!
단번에 흑기사를 입어 대지에 우뚝 선 강태석이 강하게 발을 굴러 수백 미터 너머, 바다 건너의 섬을 향해 도약했다.
**
쿠르르릉...
"환장하겠네. 어떤 놈이야?"
"군용병기 당분간 못 쓸 거라며. 뇌종 쪽 특수부대라도 온 거야?"
흔들리는 통제실 안, 간신히 자세를 다잡은 군바리안의 남녀들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비틀 일어섰다.
분명 당분간 노골적인 공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빠르게?
심지어 그 위력조차 보통이 아니다.
한발에 쉴드를 통째로 뒤틀어 버리는 건 마울러가 직격해도 힘든 일인데!
하지만 그들은 이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무엇이 되었건 현재 공격받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할 일은 즉시 이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너희 둘은 섬 지하로 내려가서 <일>을 빠르게 마쳐. 이쪽 다섯은 혹시 잡아놓은 놈들이 기회를 노리고 난동 부릴 수 있으니 기갑부대 쪽으로 가고. 그리고..."
"어이."
"?"
"저거 지금 이쪽으로 뛰어오려나 본데?"
"???"
다급하게 현 상황을 정리해가던 사내가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 포대가 있던 방향으로 보이는 건 어느새 온데간데없어진 병기 대신 우뚝 선 칠흑의 기체.
사내가 뭐라 하기도 전 잔뜩 몸을 웅크렸던 기체가 단번에 땅을 박차고 지축을 뒤흔들며 수백 톤에 가까워 보이는 육중한 거체를 뽑아 올렸다.
하지만 누가 봐도 무리였다.
후우우웅...
"다이빙이라도 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서서히 해수면으로 다시 추락해가는 거체를 보며 사내가 바쁜 와중에도 머리를 긁적였다.
기운 좋게 뽑아 올린 것과 달리 기체는 고작 수십 미터도 도약하지 못한 채 다시 바다 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절반은커녕 십 분지 일도 안되는 거리.
저대로 바다에 추락해도 물론 여기까지 올 수는 있을 것이다.
바다 밑을 걸어오면 되니까.
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쉴드가 모조리 복구를 마쳤을 것이다.
키리리리링...
서서히 제 형체를 찾아가는 일그러진 푸른 장막 너머, 떨어져 내리는 기체를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사내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분명 추락하고 있던 녀석이 바다에 한발 내디딘 순간, 주변 바다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쩌저정 진동하며 거대한 발판을 만들어낸 것이다.
출렁...!
칠흑의 기체는 그 도약하는 속도까지 포함해 말 그대로 작은 운석과도 같은 파괴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수십 미터, 진동하며 응집된 바다는 그대로 이를 버텨내며 굳건하게 흑기사를 지탱했다.
이어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도약!
콰아아아아아아앙!
"염병 진짜. 가지가지 하네. 다들 준비해!!"
다시 한번 바다를 육지마냥 박차며 거침없이 섬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하는 기체를 보며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슈우우우웅...
흑기사의 전신과 연결된 감각을 통해 주변의 광경과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들어왔다.
재차 가까워지는 해수면, 갈라지는 공기 소리.
꾸득.
그 속에서 강태석은 다시 한번 힘을 준 채 떨어져 내리며 발치에 해수면을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건 첨벙거리는 소리가 아닌 육중하고 거친 굉음.
구우웅....
꾸드드드드드드득!
발을 중심으로 주변 바다 전체가 순식간에 진동하고 결집하며 굳건한 발판이 된다.
이로써 일곱 번째 도약.
이제 남은 거리는 두 번 어치.
착지의 충격을 기체 전체로 흩어 퍼트린 강태석이 다시 한번 힘을 주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후우우우웅!
'좋아.'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강태석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일렁이는 장막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장.
막대한 에너지와 놀라운 연산력을 필요로 하는 마법과도 같은 기술.
예전 옵저버같은, 오직 이를 위해 모든 공격력과 방어력을 포기한 고급병기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지만, 외계 생명체의 막대한 에너지 코어와 이를 집어삼킨 금속 생명은 이를 훌륭하게 전투병기인 흑기사에 구현해냈다.
그리고 그게 이 결과물.
콰아아아아아앙!
여덟 번째 도약.
다시 한번 강하게 바다를 박차며 마치 장애물 경주를 하듯 형태를 다잡아가던 쉴드를 후욱 뛰어넘은 강태석이 발아래 바다, 그리고 그 너머 금속의 섬을 바라보았다.
이제 코앞.
콰아아아앙...
아홉 번째.
그리고 마지막, 다시 한발 바다에 내디딘 강태석이 단번에 발을 굴러 섬 위로 뛰어오르려던 그 순간.
후루루루루룩...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뛰어오르려던 강태석이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건 사방, 터렛타워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미사일들.
이대로 뛰어오르면 얻어맞는 걸 피하지 못한다!
당장 회피하거나 칼을 휘둘러 걷어내야 하는 상황.
하지만 그렇게 두들겨 맞기 시작하면 역장이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난다.
그렇지만 고민의 순간은 찰나.
콰아아아아앙!
몸을 수그렸던 강태석이 그대로 강하게 마지막 도약을 행하며 섬 위로 뛰어오른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꺾다시피 하며 쫓아온 미사일들이 순식간에 금속섬, 그 한켠에 올라탄 흑기사의 전신을 사정없이 후두려 팼다.
**
콰르르릉...
통제실의 위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몇 명의 남녀들이 숨 막히는 얼굴로 금속섬한켠,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초인의 시야라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법.
수많은 폭발로 인해 뿌옇게 변한 섬한켠을 바라보던 그때.
"해치웠나?"
"야 이..."
옆, 어떤 동료의 불길한 대사에 사내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운 순간.
촤르르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뻗어 나온 수백 미터 길이의 강철선이 그대로 그들이 선 통제실을 강하게 후려치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