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80화 (180/221)

180

"금속섬을 조준하라고요?"

그라함이 다시 한번 물었다.

마울러는 다른 구역과의 항쟁을 위한 병기다.

이런 근거리에서 쏘아댈 만한 놈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하면 섬은 물론이고 수도까지 피해가 미칠 것이다.

거기에 금속섬 녀석들이 죽기 전 반항 하듯 퍼부어 댈 공격까지 생각하면 섣부른 공격은 자신들에게조차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라함의 말에 탈리만이 덤덤히 대답했다.

"이미 결정을 내렸다."

!!!!!

!!

탈리만이 다시 한번 섬광이 번득이는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뭐가 살아나오건 간에 저건 너무 위험한 변수가 된다.

잘 사용하면 득이 되겠지만 한치만 잘못해도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 상황에서 탈리만은 그런 요소들이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조금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아예 신경 쓸 필요가 없게 지워 두는 것이 낫다.

이후 계산이 편해지도록 말이다.

그런 탈리만의 말에.

"...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고개를 꾸벅 숙인 그라함이 마지못한 발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향했다.

**

촤르르르르르륵!

콰아아아앙!

"역시 이렇게 되나."

갑판 위에서 날뛰는 흑기사를 보던 사내가 피를 뚝뚝 흘리며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중년 여인 옆에서 처량하게 입맛을 다셨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라고 했지만, 상황은 압도적이다.

자신들은 그토록 유용한 군대를 손에 넣었지만 안타깝게 상대도, 상성도 너무 좋지 않았다.

사기적인 기체에 사기적인 탑승자.

어지간한 화력은 자체 내장 쉴드로 다 무시해버리며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만 한 공격들은 포신의 방향을 보고 모조리 피해버리거나 결코 쏠 수 없는 각도를 점해 공격당하지 않고 있었다.

전장에서 지금 쏟아지는 공격만 해도 사방 1km 내 수백, 수천 개인데 그걸 모조리 읽어내며 해내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기체의 우월성만이 아니다.

아마 자신이나 다른 녀석이 저걸 타고 있었다면 진즉에 격추되었을 테니까.

아니, 누구한테 저걸 줘도 가능하진 않으리라.

오직 눈앞에 있는 녀석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신기다.

그렇기에 사내는 대충 지금 상대의 정체를 감잡은 상태였다.

"살아서 도망친 놈이 있으니 소주께서 조심하라 하시더니."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들이 다른 세력들로 떠날 이런저런 준비를 하던 중, 현장에서 돌아온 소주와 8인방, 그리고 수십 명의 남녀들의 표정을 보았다.

걱정, 근심, 껄끄러움.

왜 그렇냐고 물어보니 이 집단의 전 핵심 인물이던, 카트란이라던 놈 하나를 놓친 것 때문에 그렇단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놈 잡으러 우르르 몰려간 것도 그렇고 설령 놓쳤다 해도 고작 그것 때문에 그런 걱정을?

소주는 물론이고, 악명 자자하던 여덟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을 해봐야 하나 심각하게 걱정하며 그곳을 떠나 동료들과 함께 이곳으로 도달한 상황.

마주하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저놈은 확실히 거슬린다.

어느 곳, 어느 자리에 놓아두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사내는 결정을 내렸다.

"어이. 준비 다 끝났어?"

격렬한 전장을 바라보던 사내가 뒤를 향해 외친 순간.

터어어어어엉!

터엉!

"일단 개조 다 해놓긴 했어. 그런데 이거 타면 못 내려. 진짜 타려고?"

아래로 내려갔던 두 명의 소녀가 거대한 이족보행형 기체 다섯 대를 무인으로 쿵쿵 조종해 그들 곁에 내렸다.

크기 11m.

두 개의 육중한 다리에 네 개의 팔.

단단한 장갑과 고출력 코어.

야전용 이족보행 중장갑 병기, <베르트랑>.

원래대로라면 세 명이 탑승하여 한 명은 이동과 전술적 데이터 처리를, 나머지 둘은 각기 두 개씩의 팔을 담당해 원거리 무기나 근거리 고출력 병기를 활용하는 식으로 운용되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은 테크니컬인 두 소녀들에 의해 짧은 시간 동안 마개조된 상태다.

출력, 감각기관, 신경 연결망.

모든 게 폭주에 가까울 정도로 처리되었으며 덕분에 기동 시간은 단 5분이다.

유기적인 움직임을 위해 셋에게 연결되는 신경망도 단 한 명에게 집중되게 바뀌었으며, 더 나아가 탑승자는 일단 타면 이후 다시는 내리지 못한다.

밀접하게 연결된 신경망에 의해 탑승자의 모든 뇌와 신경이 녹아버려 기계와 눌어붙다시피 할 테니까.

원래대로라면 대충 아무 파일럿 녀석이나 태워 시간 벌이나 할 생각이었지만...

"다른 녀석이 타면 몇 초 더 버티지도 못할걸. 그게 무슨 의미야."

"..."

저 멀리, 날뛰는 흑기사를 바라보며 말하는 사내의 말에 두 소녀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사내의 판단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짧은 시간 개조했다지만, 결국 이족보행형 기체는 파일럿의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

심지어 이렇게 극한으로 동조율을 높여 놓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저런 기체를 어느 정도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녀석이 타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사내를 비롯한 자신들 군바리안들밖에 없다.

설령 있어도 다른 놈들은 믿을 수도 없고.

"너희는 일단 계획대로 빠져나가. 여기서 죽기에 귀하다."

사내가 두 소녀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테크니컬은 귀중한 자원이다.

비록 이곳의 임무를 위해 임시 차출되었지만, 앞으로 소주를 위해 할 일이 많을 테니 여기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남은 이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다섯, 숫자를 센 사내가 주변을 보며 웃었다.

"안탈 녀석 있나? 계획대로 빠져나갈 녀석?"

그런 사내의 말에.

"염병 진짜."

"아아 이게 무슨 일이야. 죽을 확률은 반반이라며."

"좋게 생각하자고. 어차피 우린 이미 잡혔을 때 죽은 목숨이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연방에 잡힌 순간, 그리고 또다시 잠에서 깨어나 군바리안이라는 검은 사슬에 얽혀든 순간, 이미 자신들의 목줄은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터어어엉!

터엉!

망설임 없이 베르트랑의 콕핏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네 남녀들을 지켜보던 사내가 이내 자신도 발을 굴러 기체 안으로 뛰어들었다.

**

갑판 위.

키이이이잉...

타타타타타타탁!

거칠게 달려들어 몸통 박치기를 하려는 기계 거미를 피해낸 강태석은 그대로 검은 주먹을 움켜쥔 채 몸통 부위를 후려쳤다.

정확히 말하면 거칠게 회전하며 자신을 조준하려는 포신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쿠우우웅!

넘치는 출력의 사이오닉 장을 휘감은 주먹이 직격한 순간 장갑이 형편없이 우그러지며 포신이 부러지듯 꺾여 나가고 그 충격으로 기계 거미 전차 또한 휘청거리며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단 한방으로 벌어진 일이다.

전차는 크기가 흑기사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컸지만, 이제 그 정도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출력과 기동성, 유연성 측면에서 이미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기계 전차 꼴이 된 고철들이 수두룩했다.

터어엉...

'적당히 부숴야지. 나중에 또 써먹을 수도 있으니.'

쓰러져 한 바퀴 데굴 구르는 기계 거미를 피해낸 강태석이 이제는 거진 정리되어가는 갑판을 바라보았다.

앞을 가로막던 소형 전차들은 거의 정리되었고 저 뒤쪽으로 강력한 화력의 출력 병기들이 있기는 했지만, 사격을 멈춘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쏘아 봤자 거의 피해버리거나 빗겨버리는 걸 보았으며, 지금 주변에 멀쩡히 메탈스파이더의 탑승자들이 살아있으니까.

지금 널브러져 갑판에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는 수많은 기계 거미 고철 더미들이 녀석들의 동료이자 아군이었다.

이 정도면 홀로 이곳을 정리해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출력은 30%, 마력은 25%.

철컹.

<이제 주동자만 찾으면 될 것 같은데.>

기계 거미들 사이를 지나 갑판을 벗어나려던 강태석이 한 걸음 육중하게 내디딘 순간.

후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인공 태양의 빛을 가리며 등장한 커다란 그림자가 단번에 땅으로 운석처럼 내리 찍히며 강태석의 앞으로 등장했다.

보기만 해도 시퍼런 빛을 휘감은 네 자루의 파쇄형 도끼를 갑판으로 내리찍은 채.

쩌저저저적...

두께가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철판이 도끼와 그 위에 휘둘러진 에너지장에 형편없이 조각나며 그 틈새를 드러냈다.

고화력 병기에 밀리지 않는 위력이다.

<...>

후우웅...

그걸 본 강태석은 자신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던 쉴드를 거둬들였다.

쉴드는 원거리 병기를 막고 궤도를 비틀어 내는데 효율적이지만, 저런 근거리 무기상대로는 출력 낭비가 너무 심하다.

차라리 움직이는데 출력을 쏟아붓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쿵쿵.

쿵쿵쿵.

천천히 걸어오는 네 대의 기체를 마주하며 강태석이 웃었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용감하네?>

넷.

그리고 저 뒤에 꾸물거리며 뭔가를 하려는 녀석까지 다섯.

하지만 강태석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출력과 마력이 다하기 전 이놈들을 모조리 고철로 만들어버리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여유가.

그런 강태석의 말에.

<네 녀석에게 알려주러 나왔지.>

<?>

<네가 하는 짓은 쓸모없고 우리가 정의라는 걸 말이야.>

이에 기체 속 강태석이 어이없다는 듯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콰아아아아아아앙!

네 대의 기체가 거침없이 자신의 손에 든 무기들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흑기사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

신흥 파벌 쪽의 또 다른 금속섬.

"정말 발사하라고?"

"탈리만 공의 명령입니다."

"....... 탈리만 그 작자는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

현재 신흥 파벌 쪽 가장 높은 군수 지휘권을 가진 중령, 라카트가 그라함을 보며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하나이지만 신흥 파벌도 살펴보면 수많은 이들이 세력과 영향력을 뽐내며 포진해있다.

그리고 지금 빼앗긴 금속섬과 군대는 탈리만이 아닌, 다른 유력가의 소유였다.

그걸 그대로 쏴 버리라고?

마울러 등을 동원해서?

그냥 그 위의 아군과 생존자들을 비롯해 소중한 물자와 병기들마저 모조리 고철로 만들어버리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이다.

하물며 상황이 썩 좋지 않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도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니야. 적통 후계라는 자가 섬을 거의 찬탈 직전이라며? 내버려 두면 되지 왜 쏘라는 거야?"

라카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라함을 노려보았다.

자신도 총책임자.

그렇기에 지금 누구보다도 저 너머 금속섬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결과는 실로 놀라우면서도 흡족했다.

홀로 뛰쳐 들어간 적통 후계는 단신으로 금속섬의 모든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킨 것도 모자라 강제로 끌려나간 군부대를 차례대로 제압하고 발칙한 테러리스트 놈들까지 갑판으로 끄집어내 몰아붙이고 있었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은 과정의 손속이었다.

적통 후계는 자신들 향해 달려드는 군부대를 최소한의 피해로 제압했다.

자신도 책임자 이전에 군인이다.

동료이자 수하들인 녀석들을 제압 와중에도 살리려고 노력하는 상대가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었다.

한데 반대로 아군 측 수장이라는 작자는 섬 자체를 지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런 라카트의 태도에 그라함은 탈리만 공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만나는 이들 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더 머리의 자리에 적합한지, 적통 후계라는 자는 온몸으로 온 사방에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살아 돌아오면 그때는 정말로...

'금속섬이 빼앗기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눈매가 샐쭉해진 그라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카트. 옳고 그름을 쫓으라는 게 아닙니다. 명령을 들으라는 거지."

"지금 뭔..."

"약점이 꽤나 많으실 텐데요. 거부하기에는."

스르릉.

협박하 듯 손가락의 반지를 매만지는 그라함의 태도에 라카타의 이마가 움푹 패였다.

분노했다는 뜻.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너희들은 이 책임을 반드시 지게 될 것이다."

중얼거린 라카트가 통제실의 스위치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