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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행방이 사라졌다고?"
저택.
"네. 완전히. 수도로 들어온 것 같지도 않습니다."
"..."
그라함의 말에 탈리만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녀석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정치적으로 대단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포격을 실행한 것이다.
녀석이라도 처리한다면 일단 어떻게든 나머지는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한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공성 병기의 기습에 가까운 포격을 소형 기체가 조각조각 쪼개버리고 섬을 벗어나?
애초에 그걸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둘째 치고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차라리 사마귀가 밀려드는 수레들을 쪼개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게 더욱 현실성 있는 일이다.
실로 상리에서 벗어나는 경지다.
이를 떠올린 순간 문득 탈리만의 머리속에 구전되는 전설 한 자락이 떠올랐다.
칸헬 대제.
금안의 주인.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나면 그 어떤 난관이라도 헤쳐나가는 비현실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자.
"말도 안 돼. 정말 그 능력들까지 다 이어받았단 말이냐?”
탈리만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딱딱 치며 이를 꾸욱 깨물었다.
하여간 상황이 대단히 곤란해졌다.
자신의 든든한 아군이었던 라카트 중령까지 무리해가며 압박한 탓에 악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또한 금속섬의 원주인이던 유력가는 물론, 신흥 파벌의 다른 이들마저 자신의 이번 결정에 대노대경하며 항의를 내비쳤다.
애초에 탈리만은 검공 같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한 지도자가 아닌, 역량을 인정받아 우두머리 역할을 책임진 포지션에 가까웠다.
거기에 지금쯤 자신에게 대단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적통 후계까지, 하여간 복잡한 상황과는 달리 할 일은 명확해 보였다.
"이쪽 일은 어떻게든 내가 해결할 테니 그라함. 너는 빠르게 적통 후계의 흔적을 다시 찾아내라."
"... 알겠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한결 힘 빠진 대답이었지만 탈리만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채 그라함이 물러났다.
"아냐. 이건 아냐. 일단 이 작자는 다른 방법으로 회유를..."
홀로 남은 탈리만만이 책상을 계속해서 두드리며 분주히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강구했다.
**
해안가.
휘익!
촤아아아아악!
퍼덕퍼덕!
"오 낚였다."
금속 생명에서 대충 뽑아낸 낚싯대를 던져 먹을 것을 낚아낸 강태석이 크기 30cm 정도 되어 보이는 물고기를 대충 손질한 뒤 피워놓은 불 위에 꽂아 올렸다.
군바리안, 탈리만, 적통 파벌, 수도 로블롭.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리로 얽혀오지만...
"솔직히 나랑 별로 상관없지 않나."
우물.
이미 잡아서 구워 놓았던 물고기 하나를 베어 문 강태석이 캠프파이어라도 하듯 밤으로 변한 바닷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원래 일을 열심히 하고 끝내면 현자 타임이 온다.
그래도 해봐야지! 하다가 아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나... 하는 시간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강태석이 딱 그 정도였다.
칸헬이니 뭐니 적당히 장단 맞춰주려다가도 뒤통수에 포탄이 겨눠지는 경험을 하면 자연스레 인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며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것이다.
물론 긴 현상은 아니고 다시 돌아가겠지만, 자신은 기본적으로 사람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말고를 떠나서 말이다.
하지만 그거야 조금 후의 일이고 지금 당장 필요한 건...
"힐링. 힐링이 필요하지."
타닥타닥.
강태석이 멍하니 불치에 앉아 그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며 불멍과 물멍을 동시에 때렸다.
자신이 앉은 이 고철산 뒤쪽, 수도 방향에서는 난민과 신흥 파벌 적통 파벌들이 뒤엉켜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고 있겠지만 지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지금 가는 것보다 적당히 사태가 정리되고 선명해질 때쯤 가는 게 보고 판단하기에는 더 편할 수 있다.
겸사겸사 앞으로 뭐 할지 정리도 좀 하고 말이다.
이를 적당히 퀘스트 형태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띠링!
<현재 다섯 가지 메인 라인이 제공됩니다.>
> 당신은 지금 스스로 구축한 세력과 도우려던 이들에게 이리저리 배신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당신을 배신한 건방진 뇌종의 양 파벌들을 정리하고 세력을 그러모은 뒤 당당하게 아너스빌에게 돌아가 무릎 꿇리십시오.
> 적합한 명분에 적합한 자격과 적합한 분노를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당신을 배신한 모든 이들을 당당하게 단죄하십시오.
> 현재 플래그가 붕괴된 채 11개의 세력이 정처 없이 세계를 떠돌고 있습니다.
> 이들을 모두 그러모아 플래그의 전주인, <찬>의 뜻을 이어받아 12층까지 돌파한다면 이 거대한 콜로니의 비밀이 당신의 손안에 들어옵니다.
> 이 움직이는 대지의 위대한 주인이 되어 은빛 장벽, 저 너머 격렬한 대지로 나아가십시오.
> 당신은 이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입니다.
> 세계를 덮쳐오는 위기를 막아내고 조각조각난 인류를 한데 결집시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 온 문명과 세상이 당신의 업적을 기리며 감사해할 것입니다.
>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당신은 어떤 책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반면 당신은 이 거친 세계를 홀로 서도 헤쳐나갈 수 있는 마땅한 능력이 있습니다.
> 거친 풍파는 무시할수록 좋습니다. 모든 다툼을 무시한 채 오직 스스로의 강함과 생존, 보구에만 집중하며 방주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이 어찌 보면 강인하면서도 나약하여 생긴 일. 넓고 많은 것을 보지만 이를 감당할 힘이 부족합니다.
> 인간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이를 벗어날 몇 가지 파편의 흔적들을 손에 넣은 상태입니다.
> 모든 것을 부숴버릴 무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나십시오. 어찌 보면 홀로 세상의 멸망도 막아설 수 있을 정도로.
"..."
우물.
강태석이 생선을 베어 물며 생각에 잠겼다.
크게 정리하자면 다섯 가지다.
첫 번째, 복수자.
어찌 보면 이제까지 벌여왔던 일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들이었다.
자신을 배신한 신흥 파벌을 무릎 꿇리고, 이 과정에서 적통 파벌에게까지 정당성을 인정받아 그대로 뇌종의 주인으로서 돌아가 아너스빌을 무릎 꿇리고 양 세력의 주인이 된다.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을 귀찮게 했던 녀석들을 싸악 정리하고 단단한 씨앗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영 안 내키는데.'
강태석이 우물거렸다.
솔직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그닥 들고 싶은 것도 아니거니와 두 세력의 주인?
들으면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작아도 너무 작다.
그냥 변방 일개 영주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기 정도?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봤자 마치 파도 앞의 모래성마냥 난이도가 조금만 올라가면 파도에 스러지듯 그대로 무너지고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기각.
사실 두 번째, 계승자 라인도 마찬가지였다.
11개의 군세니, 뭐니 해도 그냥 박살 난 패잔병 집합소다.
그나마 이 라인이 크게 의의가 있다면 <12층>에 도달하여 콜로니의 진정한 기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정도?
콜로니가 제 기능을 끄집어내게 되면 다음 스테이지, 31~60레벨 구간에도 먹힌다.
위성 도시, 센트라들과 각종 왕국의 고문명들과도 비벼볼 만 하다는 뜻이다.
"......"
스윽.
스으으윽.
물고기를 다 먹은 강태석은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망설이 꼬치를 바닥에 슥슥 그었다.
사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구분해 놓았지만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
세 번째 걸 하려면 다섯 번째가 되어야 했고, 다섯 번째를 하려면 네 번째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강태석은 이 플레이를 예전에 <초월행>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지던 상관하지 말고, 오직 이 세상의 전설과 신화를 집어삼키며 초월적인 존재로 자라는 것에만 집중한다.
말하자면 서사 속에 이름을 남길 규격 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철저히 세상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할 존재가 된다.
인세가 감당 못 할 존재와 싸워 이기고 자람으로써 그 밑의 이들이 살아남으니까.
어찌 보면 가장 깔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해낼 역량이 있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해내는 동안 사람이 수만 단위로 죽어 나가건 말건 무시할 수 있는 깜냥만 있다면 말이다.
앞의 두 개도 제법 수고하고 뻔뻔해야 했지만, 뒤의 세 개와 비교하자면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세계>가 버틸 체력이 되는지였다.
레벨도 20에 도달했고 흑기사 등을 얻었으니 최소 진행 요건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좀 더 고민해볼까?"
지금쯤 열심히 버둥거리고 있을 아너스빌과 탈리만, 기타 등등을 생각하며 강태석이 새로운 꼬치를 하나 더 꺼내 들려던 그때.
“꺼져어어어어어!”
탕탕!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 쪽으로 가까워지는 날카로운 비명에 강태석이 동작을 멈췄다.
**
수도 로블롭 근처, 지하.
"마하트는?"
"죽었지.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 개조했으니."
"..."
섬에서 탈출한 두 소녀를 바라보며 앞에 선 수십 명의 남녀들이 혀를 찼다.
모두가 군바리안의 자락들이다.
애초에 섬으로 모두가 모여든 것이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인 그들을 제외한, 자신들이 진짜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위한.
온 시선이 금속섬에 쏠려 있던 덕분에 자신들은 열린 성문과 난민들을 통해 훌륭하게 수도 구석구석에 진입했다.
여기까지가 계획의 일부인데, 하나의 오차가 발생했다.
도망치는 연기를 하듯 금속섬을 끌고 외해로 빠져나갔어야 할 시선조들이 모조리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사내 단 하나에 의해, 심지어 그 사내의 목숨조차도 뺏지 못하고 말이다.
"멍청하기는."
푸후.
한 여인이 담배 연기를 거침없이 뿜어내며 죽어버린 사내, 마하트를 향해 욕지기를 내뱉었다.
애초에 그렇게 어려운 임무도 아니었거늘.
하지만 욕하는 그녀뿐 아니라 주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내를 비롯한 시선조는 잘못한 건 없고, 단지 난입한 상대방이 규격 외의 존재였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희생은 희생이다.
남은 건 마하트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무리를 잘 해내는 것이다.
"다들 챙겼지?"
여인의 말에 주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유리 앰플을 꺼내 들었다.
그 안으로 찰랑이는 건 너무나 아름다운 선홍빛의 액체.
하지만 그 위로 왠지 모를 불길한 검은 광택이 감돈다.
"..."
혐오스럽다는 듯 이를 노려보던 여인이 주변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각자 자리 잡을 만큼 잡았을 테니. 할 일 하자고."
목표는 수도 전체, 나아가 뇌종의 모든 생존자들이다.
그런 여인의 말에.
부스럭.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이 천천히 지하, 고철 더미들 사이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
강태석은 평온을 원했기에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어떤 난리통에도 끼어들지 않기로 했었다.
애초에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할거였으면 고철산 너머에 펼쳐져 있을 난민들의 아수라장을 무시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강태석의 마음대로 흘러가지를 않는다.
탕탕탕!
"야 이 새끼들아! 안꺼져어어어어!"
총을 든 소년과 그 뒤의 소녀와 수십 명의 난민들까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을 보며 강태석이 손에 들린 생선 꼬치 하나를 한입에 남김없이 모두 베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