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83화 (183/221)

수도 바깥, 난민촌.

타타탁...

"미치겠군. 대체 어디 가신 거지."

정신을 차린 카르멘이 쉴새 없이 난민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고철지대 평원 사이를 뛰어다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 수많은 남녀들이 호기심과 경계를 섞은 눈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쉽사리 덤벼들진 않았다.

카르멘이 특전대를 상징하는 특유의 정복을 착장한 채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까 전 넝마를 걸치고 있을 때와는 다르다.

지금은 적통 파벌을 대표하는 무력 부대 중 하나인 특전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드디어 수도 내에서 연락이 왔는데. 모시라고."

카르멘이 엄지손톱을 꾸국 검지 손톱으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불안할 때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였다.

그렇다.

칸헬은 드디어 적통 파벌 측에게 인정받았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모셔오라고 할 정도의 인정을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도무지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설마... 습격당했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수십만이 자리 잡은 고철의 평야지대.

임시로 수천수만 개의 천막과 고철 판옥들이 지어지고 있는, 사람 하나를 찾기에는 답도 없이 넓은 구역을 바라보며 카르멘이 한탄을 토했다.

**

타타탕!

"가까이 오지 마!"

"..."

우물.

생선을 베어 물던 강태석은 난데없이 눈 앞에 펼쳐진 추격전을 보다 한발 스윽 뒤로 물러나 앉았다.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를 쫓아온 수십 명의 난민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싸움에 딱히 껴드는 취미는 없다.

'알아서들 하겠지.'

조용히 물러난 강태석이 마치 자신은 배경임을 주장하듯 조용히 고철 사이 어디 한구석에 박히려던 그때.

"뭐 하는 거야. 꼬마 하나 제대로 못 잡고."

"파스멜님."

철그럭.

총기에 주춤하고 있는 난민들 사이로 걸어 나온 청년이 영 짜증 난다는 눈으로 건너편, 바닷가 막다른 궁지까지 몰린 소년 소녀를 바라보았다.

영 잘못 집었다 싶었기 때문이다.

난민들 사이에서 이제는 멸망한 뇌지국, 그 스러진 왕가의 적통 후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난리가 날 때마다 한 번씩 도는 헛소문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묘하게 제법 정확해 보였기에 자신들, 블랙네트워크에서 친히 나서 헤집었다.

이번 난리통으로 수도 근처로 흘러들어온, 이제는 망해버린 왕실에 그나마 가장 진한 핏줄을 보존하고 있는 가문을 말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이번에 나타난 적통 후계란 작자의 근원이 있다면 필시 이 망해가는 지방 가문일 것이라 생각했거늘 아무것도 없이 개털이었다.

이놈들은 진짜 그냥 예전의 영광 한 조각을 명예마냥 내세워 지방에서 겨우겨우 먹고 살아가던 작은 유력가 수준이었다.

차아앙...

"꼬마야. 이제 너희 가문은 너희 둘밖에 안 남았다. 우리가 잘못 집은 건 미안한데 여기서 그만하자."

연발 화기를 상대로 여유로이 칼을 뽑아 들고 걸어가는 사내의 말에 소년의 얼굴에 분노와 창백함이 터질 것처럼 물들었다.

갑자기 들어와 온 가족을 학살한 녀석이 할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유유자적하게 소년에게 걸어갔다.

일단 건드렸으니 뿌리를 뽑아야 한다.

괜스레 살려 뒀다가 진짜 적통 후계라는 작자가 머나먼 자신의 친척들을 찾다가 이 일에 연루되면 곤란하니 말이다.

투타타타탕...

카카카카카카카캉!

"소용없다니까. 아 그리고 너희는 저기 가서 목격자 치워."

"저희가요?"

"밥값을 해야 할 거 아냐 새끼들아. 이런 것까지 내가 대신해주리?"

겨우 꼬맹이 둘 잡느라 이곳까지 불려 나온 사내, 파스멜이 칼로 총알을 모조리 튕겨내며 짜증 섞인 눈으로 괜스레 할 일 미루듯 삐질 거리는 난민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들은 도무지 상도덕이라는 걸 모른다.

굶어 죽기 직전에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고용되었으면 밥값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씨... 야야 가자.”

“도망가기 전에 잡아!”

후다다다닥!

손에 칼들을 꼬나들고 저 멀리, 고철 더미 사이로 우르르 달려가는 녀석들을 보며 콧김을 푹 내쉰 사내는 고개를 돌려 이제는 절망에 빠진 소년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었다.

이제 총알도 바닥났고 녀석을 지켜줄 그 누구도 없다.

지그시 눌러 처리하면 그만이다.

'이대로 딱 선을 그으면 목 베어지고 시체는 바다 뒤로 풍덩 빠지고. 딱이겠네.'

키이잉...

칼날에 검기를 피워 올린 사내가 높이가 비슷한 두 소년 소녀의 목 부근을 향해 그대로 칼을 휘두르려던 그때.

퍼어어어어어어억!

콰드드드득!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난민들이 우르르 몰려간 고철 더미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파스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한 놈 처리하러 갔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윽고.

"볼일이나 보고 돌아갈 것이지."

터덜거리며 꼬치 하나를 들고 걸어 나오는 사내.

그리고 그 위에서 불타오르는, 자신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선명한 검기를 본 파스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

잠시 후.

"말세다 말세야."

일격에 바닥에 기절한 채 쭉 뻗어버린 상대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강태석이 한숨을 푸 내쉬었다.

아주 그냥 멋도 모르고 이렇게 날뛰는 놈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다니.

물론 자신이 말한 대로 말세,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물.

손에 들린 생선을 마저 베어 문 강태석은 거리를 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 소녀를 마주 보며 손을 휘저었다.

"뭐하니. 어서 안 도망가고. 이 녀석들 더 따라붙기 전에."

그러며 강태석도 슬쩍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어차피 모닥불에 손에 들린 꼬치 말고는 채비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하는 꼴을 보니 혼자가 아니라 세력으로 움직이는 놈 같은데, 검기 사용자 정도가 당했으면 놈들 조직에서도 이내 우르르 몰려나와 귀찮게 할 것이다.

안 얽히는 게 상책이다.

소년 소녀들도 운 좋게 자신 덕분에, 정확히 말하면 운 안 좋게 자신을 건드린 추격자들 때문에 목숨을 건졌지만 좀 더 살고 싶으면 이 기회에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게 좋을 것이다.

부스럭.

말을 마친 강태석이 손에 금속 꼬챙이 하나를 들고 터덜터덜 고철 더미 사이로 걸어가려던 그때.

쪼르르.

"......."

자신과 거리를 두고 따라붙기 시작하는 둘의 모습에 강태석이 눈을 꿈벅였다.

**

고철 지대, 난민촌 어딘가.

"그래서. 놓쳤다고? 병신같이? 정신 차리니까 그놈이랑 꼬맹이 둘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못 찾겠고?"

"..."

"하아. 파스멜. 이 등신아. 널 어떻게 해야 하니. 아주 그냥 요즘 살기 편하니까 막살아도 될 거 같아?"

허름한 임시 고철 판옥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있던 여인이 자신의 앞에 뒷짐 지고 고개 푹 숙인 파스멜을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의 동생이고 실력도 제법 있어 써먹기는 하는데 영 신뢰가 안 가서 문제다.

방계를 지워버린 건 좋은데, 뭐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분노도 잠시였다.

"됐어 됐어. 손 떼. 이번 일에나 집중하자고. 요즘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 줄 알지?"

여인이 자신들 옆에 쌓인 고철 무더기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파묻혀 있는, 고급스런 병기들을 말이다.

키이잉...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윤곽이 흐르는 사출 병기의 광택을 여인이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좋은 시기다.

수도 주변은 혼란스럽고 수도 안쪽도 난리가 아니며, 급작스런 대이동으로 사방은 주인 잃은 귀한 물건들 천지였다.

귀하신 양반들은 어찌나 필요한 게 많은지 웃돈을 척척 불러가며 그런 것들을 구하려고 애쓴다.

넘치는 할 일에 넘치는 먹거리들, 거기에 넘치는 인력들까지.

처억.

"너도 인사했지?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야. 너 이 녀석 따라다니면서 이거 유통 좀 맡아."

옆에 선, 얼굴의 칼자국이 인상적인 사내를 가리킨 여인이 자신의 손에 들린 붉은빛 앰풀을 찰랑거리며 파스멜에게 말했다.

충성할 세력들이 무너지고 거둬주던 주인들이 난리통에 사라졌다.

그로 인해 주인 잃은 칼잡이나 인재들이 거리로 우수수 나앉은 상황이었다.

옆에 거둔 사내는 그중 하나이다.

거기에 녀석은 아주 달콤한 아이템까지 가져왔다.

통칭, ‘열락의 숨결’.

앰풀 안의 붉은 빛을 탐스럽게 바라보던 여인이 이내 인상을 썼다.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파스멜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해. 빨리 움직이라니까. 어차피 그 꼬맹이들이 네 정체 모를 거 아냐. 그럼 그냥 신경 끄라고."

"..."

"너 설마...?"

"기절한 사이에 목걸이를 가져갔어. 꼬맹이가."

"... 이 등신이 진짜!"

퍼어어어억!

"커헉...!"

번개처럼 일어나 배를 후려 찬 여인의 일격에 맞은 파스멜이 피를 토했지만, 여인은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계속해서 파스멜을 걷어찼다.

"이 머저리야! 흔적! 흔적! 흔적은 남기지 말았어야지! 혹시라도 재수 없게 얽히면 어쩌려고!"

퍼어어억!

여인이 열불이 나서 파스멜을 걷어찼다.

물론 평상시라면 그런 망해가는 가문의 힘없는 꼬맹이 둘 따위가 자신들 정체를 알았다고 하여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적통 후계라는 작자가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그 작자가 생각보다 혈통이나 명분 따위를 중요시해 그 혈연의 복수를 하겠다고 덤벼들면 일이 아주 곤란해진다.

안 그래도 중요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무슨 이따위 실수를 한단 말인가!

퍼어어억!

생각할수록 열이 받은 여인의 발차기에 점점 더 힘이 실려 가던 그때.

터억.

"그만하시지요."

"... 너?"

"제가 돕지요. 어차피 나갈 참이었는데. 겸사겸사 동생분을 도와서 흔적도 처리하고 일도 마무리 지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손목을 부여잡고 말리는 사내의 듬직한 미소에 여인의 얼굴이 순간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후우. 좋아. 너 신입 덕분에 산 줄 알아. 붙여줄 테니까 가서 마무리 제대로 짓고 와. 일 처리도 제대로 하고."

"크훅... 알겠어. 알겠다고."

어차피 마력이 실려 있지도 않은 발차기였다.

그저 화풀이였을 뿐이고 이를 받아주고 있었을 뿐이란 것이다.

배를 부여잡고 일어난 파스멜이 투덜거리며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 칼자국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

"..."

"... ..."

"그냥 따라붙어라. 멀찍이 걷지 말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를 지키며 거리를 두는 소년을 보며 앞장서 걷던 강태석이 혀를 찼다.

가려면 가고 붙으려면 붙던가?

굳이 저 거리를 유지하면서 멀찍이 따라오고 있다.

물론 그냥 무시하려면 순식간에 몸을 빼내 버리면 되지만...

'뭔가 신경 쓰이는데. 이거 뭐지.'

몸 안에서 움찔움찔거리는 무언가에 옆머리를 슥슥 긁은 강태석이 이내 에라 모르겠다 하며 몸을 돌렸다.

해안가로부터 멀어지다 보니 어느새 제법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끝난 난민촌, 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순간.

스으으읍

하아

"?"

옹기종기 모여 뭔가를 코로 들이마시고 있는 난민들의 모습에 강태석의 고개가 호기심으로 스윽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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