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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만 공의 저택.
"이게 요즘 유행하고 있는 마약이라고?"
"마약까지는 아니고... 향정신성 약물로 보입니다."
찰랑.
암무대 중 하나가 가져온 약물을 받아 든 탈리만이 눈앞에서 앰풀을 흔들어 보였다.
눈이 타오를 듯 아름다운 붉은 빛이 탈리만의 동공을 사로잡는다.
어찌나 그 빛이 아름다운지 이걸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만 해도 명화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탈리만 공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혀를 쯧 차며 앰풀을 자신의 책상 앞에 턱 내려 두었다.
"난리는 난리인 모양이군. 이딴 물건이나 돌아다니고."
마약, 미약, 약물.
뭐가 되었건 이런 것들이 돌아다니는 게 좋을 리가 없다.
그런 것들은 대개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국가와 집단의 생산력을 떨어트리며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탈리만은 지금쯤은 이런 걸 오히려 잠시 눈감아야 하지 않나 싶었다.
사람들이 광기와 혼란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니까.
이런 것에 취해서라도 얌전히 있는다면 일단 한숨 돌릴 수 있을 테니까.
'쯧. 마음에 들지 않는군.'
"효과가 뭐지?"
평소 같았으면 유통책 놈들을 모조리 뿌리 뽑아 버렸을 물건을 허용해야 하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던 탈리만의 심기를 반영한 날 선 질문에 살짝 당황한 암무대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의외로 효능은 대단히 좋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실험해본 결과 실제로 정신력 향상과 행복감, 활력 부여, 심지어 마력 회복 속도의 증가까지 보였습니다. 1/1000 농도에 비강흡입으로 사용했는데도요."
"1/1000? 비강흡입? 굳이 뭐하러?"
"엄청나게 비쌉니다. 난리통인데도 암암리에 유통하는 놈들이 전혀 값을 낮추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그걸 대가로 노예나 자원, 병기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유력가들 사이에서는 이 앰풀 하나가 공공연히 화폐로 인정받을 정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
탈리만의 표정이 굳었다.
이 난리통 속에 천둥벌거숭이처럼 당장의 쾌락을 좆을 난민 놈들은 몰라도 유력가들은 힘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병기, 노예, 인력, 자원.
이런 것들이 평상시보다 더욱 귀중하고 직접적인 무력이 되어주는 시기였다.
한데 이런 것마저 내어주며 거래할 정도로 이 앰풀이 효과가 좋다고?
화폐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활발하게 거래되면서?
"설마 수도 내 유력가 녀석들도 이걸 벌써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지도부면 몰라도 아래쪽 행정 인원들은 이미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기에요."
이에 탈리만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탈리만을 향한 암무대의 한마디.
"아 그리고 금지 사항이 특이합니다."
"뭔데?"
"절대로 앰풀을 통째로 들이키지 말라는군요. 희석해서 쓰는 게 제대로 된 복용법이고 이를 어기면 죽을 수도 있다고."
"......"
심지어 금기마저 수상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일단 암무대중 소수만 인원을 따로 꾸려 조사를 해봐라. 나머지는 하던 일에 집중하고."
"알겠습니다."
털컥.
끼이이이익...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가는 암무대를 본 탈리만은 몸을 뒤로 누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직감이 거슬린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 조치가 적당했다.
신경 쓸 일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파벌과 파벌, 전체와 전체가 부딪치고 있는 시기다.
한낱 유통되고 있는 향정신성 약물 정도에 온 신경을 쏟을 겨를이 없으며, 거기에 임시로 진행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없고 수상한 내용물도 없는 상황이다.
'별일 없겠지.'
정확히는 이런 약물 정도는 지금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고 암무대가 좀 더 조사를 해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암시장 자투리들인 블랙네트워크들 따위가 벌이는 일인데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
심지어 지금은 수도 내, 아니 뇌종 전역에 다시 동력원이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하는 등의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저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나저나 그라함. 이 녀석은 언제 적통 후계를 찾는 거지?"
지금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그라함을 떠올리며 탈리만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
난민촌.
스으으읍.
하아아아아아...
구석에서 뭘 하길래 저리 모여 우글거리나 하는 표정으로 강태석이 다가가 보려던 그 순간.
스윽.
스으으으윽.
뒤쪽, 소년에게 다가가려는 기척에 혀를 찬 강태석이 몸을 돌렸다.
보니까 별거 없어 보이는 소년 소녀를 둘러싸고 난민들 몇이 둘러싸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탐욕과 광기, 어떤 녀석들은 짙은 열락의 눈동자를 했다.
둘 중 뭐가 되었건 어린 애들에게 보일만 한 눈은 아니다.
세상이 개판이다 보니 도덕과 윤리가 무의미한가 싶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건 강태석 본인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거슬리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이쪽으로 오면 안 따라올 줄 알고 방향을 잡은 건데.'
혀를 찬 강태석이 손을 빙빙 돌리며 뭔 일 터지기 전에 정리하려고 했다.
저런 녀석들이 눈앞에서 다가오는 걸 실제로 겪었으니 생각이 바뀔 것이다.
여기서 적당히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보내면 알아서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다닐 것이다.
하지만 강태석이 움직이기도 전.
퍼어어어어억!
퍼억!
퍼어어어억!
“커헉!”
번개처럼 움직여 주변 난민들을 후려쳐가는 소년 소녀의 움직임에 강태석이 멈칫했다.
뭔가 익숙한 움직임, 동시에 슬쩍 금색으로 물든 강태석의 눈동자가 화려하게 움직이는 둘의 동선을 쫓는다.
잠시 후.
"아 이래서 신경 쓰였던 건가."
“커헉...”
퍼억!
순식간에 주변에서 달려드는 난민들 일곱을 후려쳐 정리해버린 둘을 보며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
해안가.
아까 전, 강태석과 소년소녀가 사라진 장소.
부스럭.
"선배. 선배 선배."
"... 왜."
자신이 기절했던 곳부터 시작하여 바닥을 살피며 셋의 흔적을 살피던 파스멜이 뒤쪽, 능글맞게 웃으며 선 칼자국 사내를 짜증 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배는 무슨, 딱 봐도 자기보다 훨씬 강한 놈이.
괜히 누나가 자신에게 저 녀석을 붙여준 게 아니다.
힘이 다인 이 바닥에서 괜히 저런 식으로 부르니 조롱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마음이 짜증과 다급함으로 가득해서일 수도 있다.
터엉.
"뭐. 말해. 불렀잖아."
"솔직히 말해봐요."
"... 뭐가."
"목걸이. 그런 거 안 가져갔죠? 녀석들이?"
"..."
"솔직히 도망치는 꼬맹이들이 그런 짓거리까지 하겠어요? 괜히 그러면 추적만 두세 배는 붙을 텐데?"
칼자국 사내가 능글맞게 웃었다.
도망치는 녀석들이 복수심에 불타 훗날 찾아오려고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목걸이를 가져갔다?
만약 그 정도로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면 기절한 사내가 살아 돌아온 게 말이 안 된다.
기절한 녀석을 죽이는 건 소년 소녀라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테니.
즉 파스멜을 살려 보낸 것 자체가 소년 소녀는 더 이상 쓸데없는 추적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들의 리더인 여인도 딱히 크게 일을 벌이고 싶어 하진 않았다.
한데 이렇게 된 건 파스멜의 거짓말 때문이다.
그리고 칼자국 사내는 대충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꼬맹이들이 가진 것 중에 뭐 탐나는 게 있나 봐요?"
"..."
"선배. 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돕고 있잖아요. 본업인 유통마저 잠시 접어두고."
찰랑.
자신의 허리춤, 앰풀을 흔들어 보이는 칼자국 사내의 묘한 미소에 점점 더 짜증 나는 표정을 짓던 파스멜이 이내 참지 못하고 툭 내뱉었다.
"적통 기예."
"적통?"
"그래. 썩어도 준치라고. 녀석들이 왕가의 기예를 익히고 있더군. 지방 촌구석에 숨어 지내서 티가 안 났던 거지. 알아볼 놈도 없었을 테고."
이에 칼자국 사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아닌가?
뇌지국의 적통 기예.
소일거리 중에 걸려든 것 치고는 제법이다.
'소주께서는 더 좋은 걸 익히고 계시겠지만 뭐. 수집하는 것 정도로는 좋아하시겠지. 내가 공부해봐도 되고.'
생각을 정리한 칼자국 사내가 자신의 발치 쪽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죠. 이쪽으로."
"엉? 그쪽?"
"네. 그 녀석들 흔적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으니까."
"... 망할 새끼. 진작에 찾았으면서 구경하고 있었어?"
"쫓을 수 있으면 쫓나요? 쫓을 이유가 있어야 쫓죠."
쓸데없는 개인적 원한이었으면 그냥 장단 좀 맞춰주다 못 찾은 척하고 일이나 하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쫓을 이유가 생겼으니 굳이 감출 필요 없는 상황이다.
"선배 뭐합니까? 가자구요."
"..."
꾸욱.
흥얼거리는 칼자국 사내를 맘에 안 든다는 듯 바라보던 파스멜이 이내 품속의 무언가를 한번 매만지고는 인상을 구기며 그 뒤를 쫓았다.
**
고철 지대, 구석.
키이이이잉...
'진짜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뒤 두 소년 소녀의 몸 안으로 마력을 한번 스윽 흘려 넣어본 강태석이 느껴지는 반응에 중얼거렸다.
황금 순록 왕관으로부터 파생된 뇌전의 회로가 정확히 두 작은 몸뚱이 안에 섬세하게 깔려있다.
반사 신경을 극대화하고 마력의 가속을 통해 번개를 만들어 칼끝으로 뿜어내는 왕가 특유의 회로가 말이다.
거기에 몸 안을 그득 메우고 있는 이 특유의 짙은 피까지.
‘틀림없다.’
이 둘은 자신의 손에 죽은 라프텔의 가장 짙은 피를 지닌 후예이자 그 예전,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칸헬 대제에 가장 가까운 유전자를 지닌 후손들이다.
"으음."
"당신 누구죠?"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기운에 소년이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마치 오목함과 볼록함이 만나는 듯한 이 기운.
틀림없다.
이자 또한 자신들과 같은 걸 익혔다.
아니, 어쩌면 더욱더 정순한 것이다.
그런 소년 소녀의 눈동자에 강태석이 덤덤히 대답했다.
"그냥 엉겁결에 이어받은 사람."
"당신도 방계인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음... 좀 복잡하지. 싸웠던 사람이라는 게 더 맞을 거 같은데."
"???"
맞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싸워 죽이고 그 권능을 얻은 것이니.
의아해하는 표정의 소년을 내버려 둔 채 강태석이 생각에 잠겼다.
아까 전부터 심장 어림이 저릿저릿하던 게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양심 있으면 전해달라 이거냐?'
파지지직.
자신의 손끝에 작은 스파크를 피워낸 강태석이 결정을 내렸다.
이것저것 고민해보니 여기에 씨앗 하나 심어 둬서 나쁠 게 없었다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 귀찮게 하는 적통 신흥 녀석들을 고려해봐도 말이다.
이런 씨앗으로 세상 전체의 체력을 키워 둘 수 있다면 나쁠 게 없다.
무엇보다 절대 오래 걸릴 일도 아니고 말이다.
"너희들이 약한 이유가 뭔지는 아니?"
"... 혈통이 약해서?"
"아니. 그 반대다. 피가 너무 강해. 너희 수준에 비해."
강태석이 소년과 소녀 둘을 보며 말했다.
둘의 육체는 돌연변이에 가까울 정도로 피가 강력했다.
잠시 살펴본 강태석이 놀랐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호수가 거대하면 출렁이게 만들기도 힘든 법이다.
그 육체를 자극해 깨워낼 강대한 영혼이나 높은 수준의 마력 운용법이 필요한데, 이 둘에게는 그게 없다.
소프트웨어가 바닥이니 아무리 하드웨어가 훌륭해도 제대로 구동될 리가 없었다.
그저 그 몸을 어느 정도 활용하는 무술 기예만 익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강태석이 몸 안에 심으려는 번개의 씨앗을 받아들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고급스런 피의 대지와 육체에 거침없이 뿌리내리며 싹을 틔우고 자라나며 화려하게 황금의 왕관을 피워낼 것이다.
말 그대로 뇌종.
"내가 그걸 깨워줄 수 있다. 그리고 원하면 주마."
"...!"
파지지지지직!
은거 기인의 동굴과 같은 아늑한 고철 무더기 속에서 강태석의 검지 끝에 피어나는 번개 무더기에, 두 소년 소녀의 눈이 커졌다.
피어나는 갈망과 희망, 하지만 동시에 의구심도 커져가는게 보였다.
이렇게 입맛에 맞는 기회가 달콤하게 찾아온다는 걸 믿기엔 그들이 그간 겪었던 현실이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두 소년 소녀의 모습에 강태석은 말을 이었다.
"빨리 결정하렴. 불청객이 오고 있는 것 같으니."
... 철그럭.
정확히 자신 쪽을 향해 다가오는 두 기세를 느끼며 강태석이 심드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