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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89화 (18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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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 몰려나온 여인과 수십 명을 본 강태석이 손안의 칠채영도를 다시 한번 움켜잡았다.

목적은 여전히 같다.

쓸어버리다 보면 분명 계획에 차질이 생길 거라 판단한 녀석들이 블랙네트워크를 지키기 위해 기어 나올 것이다.

설령 기어 나오지 않더라도 붉은 앰풀의 확산을 막을 수 있으니 녀석들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어 그것도 좋다.

하여간 일단은 전자가 우선이다.

"긴말 안 하고. 최근에 너희가 유통하는 붉은 약물들 있지?"

"...!"

"다 가져와. 그리고 그거랑 엮여있는 놈들도. 수상한 녀석들 딱 있잖아."

강태석이 고철 바닥에 대고 발을 퉁퉁 굴렀다.

우르르 몰려나오니 찾는 수고는 덜게 해줘서 고맙긴 하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리고 다짜고짜 들어와 강짜를 부리는 강태석을 치뜬 눈으로 살피던 여인은 순식간에 정황을 살피고는 작게 이를 갈았다.

"파스멜 이 등신이... 흔적도 제대로 못 지웠어."

거치형 레일건 포대에 남은 강렬한 구검기의 흔적과 한치의 불안함이라곤 볼 수 없는 강자의 여유.

저런 녀석이 흔할 리가 없다.

여러모로 유추해보아도 답은 하나였다.

갑작스레 쳐들어와 자신들의 핵심 상품과 연관자들을 찾는 게 이해가 안 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윽고.

"뭔가 오해가 있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겠지?"

"아마도?"

퉷.

강태석의 대답에 여인이 침을 퉤 내뱉었다.

자신들은 그냥 사고 안 일으키고 조용히 장사만 하려는데 왜 일이 계속 꼬이는지.

하여간 보아하니 관련된 것만 넘겨주면 넘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그럴 수야 있나?

이제 이 상품은 자신들이 팔고 싶다고 팔고, 팔기 싫다고 안 팔 수 있는 게 아니게 되었다.

현재 높으신 분들의 예약주문이 밀린 데다, 그 값까지 먼저 선불로 완납해버린 상태니까.

물건을 지불하지 못한다면 당장 눈앞의 놈들이 아니라 그 양반들이 가문 내 강자들을, 아니 그걸 넘어 재수 없으면 군대를 끌고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좋은 일엔 마가 끼이는 법이지.'

목을 뿌득 푼 여인이 심호흡을 했다.

병신같은 동생놈은 아까 전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도망가자고 울부짖으며 난리를 쳤지만 그럴 수야 있나.

애초에 자신이 그런 성격이었으면 여인의 몸으로 이 난장판 속에서 블랙네트워크라는 암굴의 지부장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맡은 바에는 책임을 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악!

여인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쿠우우우웅!

쿠우웅!

철커덕.

철컥.

사방, 고철성 구석구석에서 온갖 중화기들이 거침없이 걸음을 쿵쿵 내디디며 등장하기 시작했다.

디스트로이어를 장착한 엑소슈트부터 시작하여 중장갑보병, 온갖 중화기에 거치식 포대들까지.

그 무장 수준이 실로 작은 금속섬 수준이었다.

동시에 여인이 사납게 웃었다.

"직접 찾아가 보던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키이이이이잉...

투콰콰콰콰콰콰콰콰콰!

콰르르르르르르륵!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탄환과 미사일 세례들이 고철성 사이에 서 있던 상대를 향해 폭풍처럼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

블랙네트워크 지부, 깊숙한 곳.

쿠르르르릉...

쿠콰콰콰콰!

"빨리빨리 움직여! 비상 상황이다!"

떨어 울리는 진동 속, 조직원들 수십 명이 황급히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블랙네트워크의 재산들을 빼다 날랐다.

병기, 귀한 것이 묻혀있는 곳에 대한 지도, 높으신 양반들의 치부가 적힌 장부, 보석, 기타 등등.

수많은 것들이 안쪽 깊숙한 곳에 쌓여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신경 써서 나르는 물건들이 있었다.

찰랑...

"조심해라. 그거 검공 쪽으로 빠져나갈 물량들이니까."

"엇... 그런 양반들도 이거 씁니까?"

철컥!

앰풀을 단단한 특수 용기에 담아 봉인한 뒤 메고 나가려던 조직원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게 선풍리에 인기를 끄는 건 알고 있다.

상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신념 하에 자신들은 써 보진 않았지만, 놀라운 효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데 그 유명한 적통 파벌 측의 수장, 검공가에도 공급될 지경이란 말인가?

이에 다른 병기를 챙기던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설마 검공 그 작자가 쓰는 건 아니겠지. 그 아래 고용인들이나 가솔들이 쓰는 거겠지. 아니면 조사 차원에서 사들이는 걸 수도 있고."

"아아. 그런데 뒤쪽이면 큰일 아닙니까? 혹여 철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하죠?"

자신이 짊어진 용기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조직원이 물었다.

사실 전자나 후자, 둘 모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가솔들에게 이런 것을 물들였다고 분노한 검공이 직접 칼을 뽑아 들고 특무대와 쳐들어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며 단죄하려고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후자의 경우 제지하겠다고 생각하면 사업이 망해버리는 건 물론, 그간 얻어낸 것들이 모두 탈탈 털릴 수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후배의 말에 선배가 콧방귀를 꼈다.

"임마. 그래서 조직 운영비가 많이 나가는 거야. 그럴 때를 대비해서 기름칠을 하는 거지. 높으신 양반들한테도 먹이고. 실무자들한테도 먹이고. 우리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뒀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뿌리 뽑으려면... 너무 많이 캐야 해서 감당이 안 될걸? 아무리 검공이라고 해도?"

말을 마친 선배 조직원이 씨익 웃었다.

이미 이 약은 빠르게 퍼져 수도, 로블롭의 내외 대부분을 빠르게 뒤덮고 있다.

가난한 난민들은 끓는 물에 넣어서, 돈 있는 양반들은 여유롭게 차를 타 마시듯.

아직 중독성이 검증되진 않았지만, 이 정도 인기라면 필히 지독한 녀석일 것이다.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검공 그 양반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이 자신들에게 와서 싹싹 빌어야 할 수도 있다.

제발 물건을 공급해달라고 말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더 비싸질 거다. 그러니까 목숨처럼 잘 챙겨. 너한테 떨어지는 보너스도 더 올라갈 거라고."

"... 어우. 그 말 들으니 더 부담스럽네요."

침을 꿀꺽 삼킨 조직원이 등의 철통 배낭끈을 꾹 움켜 메었지만 그와는 다르게 발은 경쾌하게 지하로 만들어진 탈출구를 따라 움직였다.

어차피 자신 같은 밑바닥 인생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숨고 도망치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대비한 훈련 따위는 몇십 번이고 해놓은 지 오래이다.

그렇게 조직원이 아래로 몸을 날리려던 그때.

"... 선배."

"응?"

"피 냄새..."

"...!"

아래, 후배의 말에 뒤따라와 본 선배가 아래 통로에서 풍겨 나오는 미약한, 하지만 결코 헷갈릴 수 없는 혈향에 표정을 굳혔다.

**

콰콰콰콰콰콱!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망과 폭약들.

하지만 온 사방이 갈려 나가는 와중에서도 정작 한가운데 선 강태석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제 이 정도 공격으로는 자신을 어떻게 하기 힘들다.

딱히 흑기사도 꺼낼 필요가 없는 상황.

키이이잉...

전신을 어둠으로 휘감은 강태석이 다시 한번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칠채영도를 긋자 그 선이 사방으로 물감처럼 쫘악 번지며 다시 한번 원형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콰카카카카카카카칵...!

강태석이 손짓한 순간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알을 마치 종잇조각마냥 갈아버리던 구체가 앞으로 스윽 밀려나며 경로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재차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중장갑보병, 엑소슈트.

가리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는 모든 것을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구체를 뿜어냈을까?

투타타타탁...

키...

귀청을 떨어 울리며 퍼지던 소음이 잦아들고 걸레짝이 되어 금속 먼지만 나풀거리는 고철성 속에 적막이 찾아 들었다.

상대의 공격 의사가 그친 건 아니었다.

다만 공격할만한 것들이 모조리 갈려 나가 공격을 멈춘 것뿐이다.

저벅.

사방을 순식간에 정리한 강태석이 조용히 공간을 가로질러 너머,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여인과 수하들을 향했다.

자신의 동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보았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다.

물론 하나하나가 제법 강하긴 했지만, 자신을 당해낼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한데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겠지?

'뭐 상관없지.'

강태석이 걷는 속도를 느긋하게 유지했다.

뭐가 되었건 꺼내는 건 다 치우고 쫓아간다.

어차피 꼬리가 너무 길어서 다 치우기도 힘든 상황일 테니.

그때 강태석을 향해 여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당할 수가 없네요. 항복. 항복이에요."

"항복?"

"그럼요. 항복."

양손을 들어 올린 여인이 강태석을 웃으며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양손을 들어 올린 건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뒤쪽, 서 있는 수십 명의 수하들 모두 허리춤의 칼손잡이에서 칼을 놓고 양손을 들어 올린 채 항복의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강태석 입장에서 이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갑자기 무슨 짓이래?"

턱을 긁적이며 묻는 강태석의 모습에 여인이 입가에 한층 더 진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뭐긴요. 선량한 군수 대납 업체인 저희들이 당신 같은 무뢰배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요? 그냥 항복해야죠."

"선량한 군수 대납 업체?"

"네. 그렇게 등록되어 있거든요. 마침 저기 오시네요. 그걸 증명해줄 사람이."

그러며 턱짓하는 상대의 시선을 쫓아가 보니 저 멀리 수도의 간이 성문 쪽에서 우르르 누군가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이들, 블랙네트워크와는 복장과 자체가 다른 검은 제복의 무리였다.

“이 새끼들이... 수도 근처에서 뭐하는 짓이야!”

“당장 주동자 놈들 모두 잡아들여!”

키이이이잉!

바이크, 혹은 이동 수단을 타고 다급히 달려오는 숫자가 족히 수백은 되었다.

그냥 어설픈 사고로 보고 받고 몰려오는 숫자가 아니다.

이를 지켜보던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아주 그냥 여기저기 많이 먹여 뒀나 봐?"

"대체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네요."

블랙네트워크 지부장.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군수 대납 업체, 헤르메스의 대표.

여인, 파멜란이 강태석을 보며 싱긋 웃었다.

**

샅샅이 뒤져!

"어떻게. 불법의 증거가 나왔는지요?"

"아주 깨끗하군."

정복을 입은 사내가 파멜란의 말에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의 지팡이 겸 에너지소드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런 둘의 주변으로는 밀어닥친 수백 명의 수도 치안 경찰들이 샅샅이 고철성을 헤집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수십 명이 겨누고 있는 레일건의 한가운데 서서 눈앞의 쇼를 지켜보고 있던 강태석이 콧김을 흥 내뿜었다.

아주 그냥 짜고 치고 잘한다.

진짜로 군수 대납 업체라면 이런 수도 외곽 고철성에 본부가 있을 리 없고, 진짜로 깨끗한 녀석들이면 공무원이 이렇게 일이 터지자마자 우르르 몰려올 리가 없지 않은가?

조사도 바빠 보이지만 설렁설렁, 대충대충이다.

조사원들의 거동은 수상한 증거를 찾기보다 오히려 뭔가 흘려진 귀한 물건이 없나를 눈에 불이 나게 찾고 있는 중에 가까웠다.

아주 그냥 평소에 제대로 고기 맛을 보았던 모양이다.

사실 강태석이 고민하고 있는 건 하나였다.

적당히 장단 맞춰 주다가 대화도 좀 섞어가며 문명인답게 해결할지, 아니면 그냥 힘으로 하던 일을 마저 끝낼지.

잠시의 고민 끝에 나온 답은 전자였다.

뭐 정말로 안 받아먹었을 수도 있고, 대화가 통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굳이 주먹부터 먼저 나갈 필요는 없는 법이다.

자신은 문명인이니 말이다.

결정을 내린 강태석은 눈앞, 여인의 앞에 정복을 입고 선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일단 내 말도 좀 들어보면 안 될까? 이놈들이..."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닥쳐라 이 범죄자 놈아! 혼란스런 사태를 노려 잘 운영되고 있는 시민 업체를 노리다니!"

"..."

"반항할 생각하지 말고 순순히 우리에게 잡혀라. 사지가 잘려 나간 채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

여기까지 말을 들은 순간 강태석은 결심을 내렸다.

그냥 주먹으로 일단 하던 일을 마치기로 말이다.

꽈드드드득.

들어 올린 양손의 주먹을 강태석이 조용히 힘주어 쥐며 움직이려던 그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

저 안쪽, 조사대원들이 들어간 방향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에 치안 대장과 강태석을 비롯한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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